2.3.
일곱 살 환아와의 놀이 치료 시간이었다. 아이는 진료실에 있던 부엌 장난감을 가지고 역할 놀이를 시작했고, 나를 그리로 초대했다. 아이가 엄마 역할을 맡았고, 내가 손으로 움직이고 있던 인형(“티미”라는 이름을 쓰고 있던 인형)에게 아들 역할을 주었다. 아이는 도마에서 다채로운 재료를 썰기 시작했고, 이내 다양한 요리가 아들 앞으로 나왔다. 엄마는 아들에게 왜 편식을 하냐며 빨리 준비한 음식을 다 먹으라고 말했다. 엄마는 다소 신경질이 묻어나는 말투를 사용했다. 나는 잠시 놀이를 멈추고 “어떤 시나리오로 갈까?”라고 아이에게 조용히 물었다. 아이는 “브로콜리는 안 먹는 걸로 하고 앞으로는 나한테 물어보지 말고 선생님이 흐름대로 알아서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아이가 원하는 시나리오대로 브로콜리가 맛이 없다고 했다. 그러자 아이는 인형에게 플라스틱 장난감 프라이팬을 던졌다. 아이는 “이렇게 열심히 시간과 정성을 쏟아서 만들었는데 아들은 편식이나 하고!”라고 소리 질렀다. 그리고는 진료실 바닥에 쓰러져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그 후 수초 간 정적이 흘렀다. 아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궁금해하며 가만히 기다렸다. 조금 후 아들 역할을 맡았던 놀이를 중단하고 아이에게 괜찮은지 치료자로서 물었다. 아이는 잠에서 깬 듯이 일어나더니 “무슨 일 있었나요? 기억이 전혀 안 나는데요...?”라며 어깨를 으쓱댔다. 이 놀이에서 아이의 어떤 내적 세계(internal world)를 들여다볼 수 있었을까? 나는 아이가 경험했던 강압, 화, 타인을 실망시킨 기억, 그리고 아픔을 잊고 싶은 소망 등을 읽었다. 수년간의 경험을 소재로 지어진 7살 아이의 내적 세계는 언어보다는 놀이를 통해 더 효과적으로 표현되고 전달될 수 있다.
자유 역할 놀이에서 아이는 연기자이자 감독이다.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의 가장 큰 두려움 또는 핵심 갈등을 잘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때론 공격성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 “지금부터 노는 거다!”라고 아이와의 놀이가 명확히 시작되었다면, 안전이 지켜지는 선에서는 예의 바름이나 차분함의 기준을 내려놓는 것도 괜찮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아이나 양육자의 안전이 위협되는 상황이라면 더 안전한 대안 행동을 보여줘야 한다. 딱딱한 장난감을 던지는 행동은 작은 스펀지 공을 던지거나 바퀴 달린 장난감을 미는 것으로 대체해 볼 수 있다. 간혹 놀이나 스포츠를 통해 공격성이 최대한 배출되면 일상에서의 공격성이 줄어든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진 이들도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화와 공격성이 문제가 되는 아이들에게 큰 샌드백 하나만 사주면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자기 제어력(self-regulation)은 정신건강 영역에서 아주 중요한 소재이기에 뒤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다.
놀이가 아이가 TV 나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한 “타인의 삶” 의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간접 경험이 뇌에 저장되고 놀이라는 형태로 재현되려면 아이가 이러한 정보를 자신에게 유의미하다고(salient) 느껴야 한다. 자신이 완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그리고 반대로 두려워하고 혐오할 만한 이야기 모두 어떤 형태에서는 아이의 삶과 접점(Reference point)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기본 소재가 외부에서 전달이 된다고 해도, 그것이 기억되고, 재구성되어, 표현되는 과정 전반은 아이가 삶에서 경험한 감정 및 인간관계의 영향을 받게 된다.
자유 놀이가 특징적인 강점은 그것이 전치(displacement) 상황에서 벌어진다는 점이다. 현실 세계의 상황과는 독립적인 상황이라는 걸 상정하고 시작되는 철저히 보호된 시간이다. 놀이에서는 실수가 발생해도 용납되며 용서된다. 아이들은 언제든지 잘못을 고치는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다. 놀이 중 어떠한 충격이 발생해도 그건 영속적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이러한 안전한 환경에서 각종 위험을 감수하고(risk taking) 실험적인 시도들을 해볼 수 있다. 놀이는 행동 실험실(behavior laboratory)인 것이다. 아이들은 상상력을 동원해서 위협적인 상황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모든 걸 되돌릴 수 있다는 놀이의 특성을 이해한 아이들은 정말 다양한 도전을 한다. 관찰자인 부모와 양육자들은 긴장감을 내려놓고 아이들의 놀이를 따라가 보면 좋겠다. 그러면 아이들은 차분한 기다림에 보답하듯 그들의 신비한 내면세계를 펼쳐 보여줄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양육서 중 하나가 “The Incredible years”이다. 이 책은 과학적으로 효과가 증명된 아이들 양육법을 소개한다. 이 책은 저자들의 개인적인 양육 철학에 치우치지 않고, 통계적으로 성공 확률이 높은 양육 이론을 제시한다. 이 책에서 가장 먼저 소개되는 육아 원칙은 아이들과 즐거운 놀이시간을 최대한 많이 가지라는 것이다. 이 원칙은 책을 읽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들도 꼭 기억해해야 할 사항이기에, 두꺼운 책의 가장 앞부분에 배치되어 있다. 책에서는 즐거운 시간을 아이와 양육자가 함께 보내야만 뒤에 나오는 양육 기술들이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부모와 아이의 즐거운 놀이는 캔버스에 유화를 그리기 전에 젯소를 바르는 기초 과정과 유사하다. 이 기초 공사가 부실하면 유화 작품 자체가 제대로 완성될 수 없듯이, 아이와 충분히 즐거운 시간을 함께 하지 않은 상태에서 양육자의 그 어떤 훈육, 상, 조언도 제대로 된 효과를 발휘할지 못한다.
아이와 부모/양육자 사이의 “대화” 조차도 일종의 놀이가 될 수 있다. 예전에 유행했던 “Choose Your Own Adventure” 책 시리즈가 있다. 한국에서는 “게임북"이라는 장르로 큰 유행을 했다. 내가 초등학교 4-5학년 때 학교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과 책을 돌려봤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은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다른 페이지로 이동해 이야기를 따라가는 형태였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다양한 결말에 다다른다. 때로는 이야기가 파국적으로 조기 종결되기도 한다. 하지만, 여느 놀이와도 같이 이전 갈림길로 되돌아갈 수 있다. 이 때문에 나중에는 손가락을 이용해 이전 갈림길 페이지를 표시해 놓는 버릇이 생겼다.
어린 자녀와 부모와의 대면(face-to-face) 대화도 이와 유사해야 한다. 아이들은 부모와의 대화에서 어떤 말을 할지 선택을 하고 거기에 따른 결과를 경험한다. 이때 전화나 휴대폰 문자가 아닌 대면 대화를 통해서 좀 더 총체적인 결과를 인지할 수가 있다. 대화 내용뿐만 아니라 부모의 표정에서 오는 정보도 함께 수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론 부모의 답변을 통해 좌절을 경험하고 실망도 한다. 부정적인 감정을 대화 선택지의 결과물로 받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인 경험은 아이들이 다음에 더 나은 대화 선택지를 찾도록 하는 동력이 된다. 이러한 과정이 지속될 수 있으려면 우선 부모와 자녀의 대화에서의 최악의 결과물이 “견딜만한 수준의 좌절”이어야 한다. 지나친 좌절이나 정서 및 신체적 학대가 결과물로 기대되는 놀이판에 기꺼이 뛰어들 아이들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부모와 아이의 대화는 안전해야 한다. 단절이 혹여나 발생해도 관계가 회복되는 경험을 통해 아이가 대화와 관계에서 오는 즐거움과 “희망”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상담 치료도 2인 놀이의 극단적인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상담 치료에는 규칙이 있다. 내담자는 정해진 시간에 놀이 공간에 와야 한다. 45분이나 50분간 정해진 시간 동안 떠오르는 생각을 최대한 가감 없이 상담자에게 말한다. 그리고 상담자는 내담자가 말하는 내용, 말하고 있지 않은 내용, 지금 가장 두드러지는 감정, 비언어적인 신호를 모두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이 가장 치료적 일지를 고민하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 치료적인 개입이 존재하지 않아 보이는 순간엔 보통 침묵을 지킨다. 상담은 안정한 환경에서 이루어진다. 안전한 환경에서 강렬한 감정을 함께 있는 두 사람이 공유하는 놀이라고 보면 되겠다. 내담자 입장에서는 실수로 하는 말도 없고, 파국적인 결과도 없다. 그 어떤 상황에도 정해진 놀이는 끝이 나고 다음 정해진 세션을 기약하게 된다. 이런 성질 때문에 상담 치료는 태생적으로 두 사람 간의 단절(disruption)과 회복 (repair)을 반복하는 놀이이다. 어찌 보면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관계의 단절을 의도적으로 재현시키고 거기에 익숙해지게 만드는 놀이이기도 하다.
스탠드업 코미디도 놀이로 이해해 볼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George Carlin, Shane Gillis, Ronny Chieng, Danny Cho 같은 코미디언의 공연을 즐겨 듣는다. 스탠드업 코미디는 1인 독백 형식을 취하는데, 코미디언와 관객과의 놀이이다. 스탠드업 코미디는 보통 사회에서 터부(taboo) 시하는 주제들을 아슬아슬한 수위에서 다룬다. 평소에 말하기 껄끄럽고 불편하고 답답한 이야기를 코미디언은 어디까지 유머러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 그리고 관객은 어디까지 웃으면서 들을 수 있는지 겨루는 일종의 치킨 게임이라고 볼 수 있다. 스탠드업 코미디를 보면 그 사회의 밝고 어두운 면 모두를 볼 수 있다. 화가 날만한 사회의 역설적인 단면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걸 볼 수 있다. 그러한 쓰디쓰면서도 달콤한 감정을 타인과 공유하게 만드는 측면에서 스탠드업 코미디와 놀이치료의 접점을 찾을 수 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스탠드업 코미디를 보고 어느 부분이 가장 재미있고 인상적이었는지를 공유해 보는 것도 놀이를 이어가는 흥미로운 방법이겠다.
아이와 함께 노는 것이 중요한 것을 이해했지만,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막막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진료실과 집에서 내가 즐겨 사용하는 간단한 놀이 아이디어를 소개하겠다. 여기에 적은 것은 지극히 일부 예이다. 이렇게 자유도 높은 비구조화된(unstructured) 환경에서 두 사람이 무언가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하는 목적으로 이 리스트를 참고하면 좋겠다. 어떤 종류의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더라도, 아이에게 온전히 집중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보이지 않는 곳에 보관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스마트폰을 보이는 곳에 놓는 것만으로도 양육자의 주의력이 흐트러진다는 것은 실험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1) 함께 노래 듣기/부르기: 아이가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함께 들으면 좋다. 같이 따라 부르면 더 좋다. 함께 들은 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점이 좋은지 나눠보자. 부모도 자신이 즐겨 듣는 노래를 틀고 어떤 점을 좋아하는지 공유하는 것도 좋다. 아이도 그 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누는 것도 좋겠다. 함께 들은 멜로디에 가사를 붙여 이어서 불러보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겠다.
2) 함께 책 읽기: 3살, 혹은 그 보다 더 어린 나이에도 그림책을 함께 읽을 수 있다. 핵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빠지지 않고 텍스트를 읽는 것이 아니다. 목표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며, 즐거움 외에 다른 학구적인 목적은 내려놓는 것이 좋다. 아이가 가장 집중력이 높은 초반, 제목과 저자명은 소리 내어 꼭 읽도록 권유한다. 그 이후 엔 아이가 책에서 보이는 것을 자유롭게 짚으면서 말해 보도록 한다. 아이가 원하는 속도로 페이지를 넘긴다. 단어를 모르는 아이에게는 양육자가 단어를 알려준다. 글을 읽지 못하는 아이들은 그림을 이용해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 것이다. 그러한 자유도를 허용하면서, 아이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내도 웃으며 칭찬해 주자. “저건 뭘까? 어디로 가는 걸까? 저 친구는 지금 무슨 기분일까?”와 같이 그림에 대한 질문을 가끔 던지면,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내적 세계의 확장을 도울 수 있다. 중간에 책에 흥미를 잃으면 거기서 독서를 중단해도 좋다.
3) 함께 그림 그리기: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도널드 위니컷은 끄적이기 (Squiggle) 놀이에 대하여 방대하게 기술했다. 한 명이 눈을 감고 종이에 어떤 획이나 모양을 끄적이면, 다른 사람이 거기에서 출발하여 원하는 그림을 그려내는 놀이이다. 그리고 그림이 완성된 뒤에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상대방에게 말해주는 것이다. 서로의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는 상당히 흥미로운 놀이이다. 하지만, 나란히 그림을 그리는 것, 함께 색칠하는 것, 아이가 그림 작품을 완성할 때 옆에서 돕는 것 등,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같은 공간에서 “함께 즐겁게 그린다"는 행위가 주된 목적임을 기억하면 좋겠다.
4) 함께 하는 공놀이: 공을 “주고 또 받는” 행위는 상당히 상징적이다. 타인과의 상호 작용을 리듬감 있게 느낄 수 있는 놀이이다. 아이는 양육자와 연결되는 느낌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공을 던져도 좋고 발로 차도 좋다. 공 종류는 전혀 상관이 없다. 스포츠 룰에 굳이 집착하지 않아도 좋다. 아이가 상상력을 발휘해서 어떤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제시하면 거기에 따라가 본다. 이러한 “연결감”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환경에서는 아이들이 긴장을 내려놓고 편하게 대화하게 된다. 그래서 공놀이 중엔 가만히 마주 보고 앉아 있을 때 보다 깊은 대화가 오고 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발달과학 및 정신분석에서 밝혀진 놀이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에서 아이들이 만나서 노는 시간은 점점 줄고 있다. 사회에서의 “성공”을 위해 어린아이들에게 놀이가 아닌 학업에 정진할 것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가 이런 변화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2010년 이후 보급된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SNS)는 이러한 변화 양상에 치명타를 날렸다. 스마트폰은 아이들의 주머니에 있으면서 타인과의 직접적인 놀이보다 훨씬 흥미로운 콘텐츠를 항시 제공한다. 놀이, 특히 비구조화된 대면 놀이의 기회가 아이들에게서 박탈된 것이다. 스마트폰이 소아 발달에 미치는 악영향은 조나단 하잇의 책 “불안 세대(The Anxious Generation)”에 잘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이 아이들에게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다. 스마트폰에 주의를 빼앗긴 최근 부모 세대들은 아이의 행동에 느린 반응을 보인다. 아이의 감정에 반응해서 얼굴에 시기적절한 표정을 띠는 것도 몇 박자 느리게 되어 버렸다. 아이들은 주 양육자에게서 양적으로(quantitative) 적은, 질적으로는(qualitative) 지연(delayed)되거나 조율되지 못한(misattuned) 감정 반응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소아정신과 전임의 수련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던 초여름 월요일 오후. 청소년 그룹 치료를 통해 일 년간 함께 했던 아이들과 실제로 만날 수 있었다. 코비드 팬데믹 기간 동안 안전을 위해서 원격으로 모일 수밖에 없었던 5여 명의 아이들이었다. 한 시간 이상 거리에 사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한 명도 빠짐없이 마지막 만남에 참여해 주었다. 그룹 치료를 일 년간 함께 하면서 나에게 “놀이” 와 “함께함” 이 가지는 강력한 치유의 힘을 가르쳐 주신 나의 멘토 아델 프레스만(Adele Pressman) 선생님은 피자를 들고 걸어오셨다.
우린 일 년간 인터넷상에서 할 수 있는 각종 놀이 아이디어를 짜냈다. 놀이를 하며 경험하는 다양한 감정들을 한자리에서(온라인이었지만) 자연스럽게 공유할 수 있었다. 함께 하는 다양한 레퍼토리의 놀이에서 일어나는 희열, 경쟁심, 질투, 좌절 등의 감정들. 이런 감정은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과거 경험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치료자로서 그런 강한 감정이 떠오르는 순간에 주목하는 법을 배웠고, 아이들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감정을 살피고, 타인과 공유하는 경험을 열어주었다. 보이는 행동이나 말보다, 거기에 묻어있는 감정을 따라가는 대화가 사람들은 연결시킨다. 아이들을 처음으로 직접 만나는 이 모임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크게 아쉬웠다. 아이들과 피자 한쪽씩을 입에 물고 풋볼(football)을 커다란 나무 그늘 사이로 주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