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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서 Jan 04. 2025

일상을 꾸려가면서 일한다는 것

일하던 나 관찰 일기

이전 회사 실장님은 말씀하셨다.


"일복은 팔자예요. 레서님은 다른 회사 가더라도 일이 많을 거야."


저주인가요? 라며 웃어넘겼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다. 정말 타고난 팔자가 일개미인지 어느 회사에 가든 일이 많았다. 회사 일이 줄어들면 개인적으로 일이 생겼다.(혹은 내가 만들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간헐적으로만 부지런한 성향 상 차라리 바쁘면 일을 체계적으로 빠르게 해낼 수 있었다. 늘어질 시간이 없으니.

한 때는 심지어 회사 프로젝트 오픈과 방송통신대학교 졸업, 사이드 프로젝트 오픈, 스터디 진행(심지어 내가 스터디장인..)이 겹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잘 해냈고 힘듦보다는 뿌듯함이 앞섰다.


그랬는데 왜, 달라진 걸까?

물론 하루 15시간씩 일한다는 게 힘든 것은 당연하지만 이전이랑은 차원이 다른 힘듦이 느껴졌다. 

3년 더 나이 들었기 때문일까? 그땐 없던 불면증 때문에 더 힘든 걸까? 아니 근데 불면증도 힘들어서 온 거 같은데?


자꾸만 드는 의문이 더 지치게 만들었지만 어쩔 방법을 찾지 못해 꾸역꾸역 그 시간들을 지나왔다. 심리 상담을 받고 수면을 도와준다는 영양제를 먹으면서, 눈앞의 문제들을 우선 해결해 나가면서. 그러나 여전히 내가 왜 이런지는 알지 못한 채로.


그렇게 한 해를 마무리하고 다음 해 초, 지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그렇게 바쁘면서 커뮤니티 활동에 거의 다 참여하다니 대단하다'는 친구의 말에 나도 모르게 "나 살려고 그랬어. 그거라도 안 하면 진짜 내가 죽을까 봐."라고 답했다. 어라.


솔직히 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던 때가 있었다. 이 모임에 참여하고 나면 새벽까지 다시 야근해야 하는데 내가 왜 굳이 자꾸 나오지? 왜 스스로 더 피곤을 초래하나, 어차피 나와서 힘들다고 징징대기나 하면서. 근데 어쩌면 그것이 나에게 숨 쉴 구멍이었나 보다.


돌이켜보면 이전의 바쁨에는 다양한 요소가 있었다. 회사 일 외에도 개인적인 학업과 프로젝트, 그리고 함께 비슷한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사이드 프로젝트 팀에 속해 있으면서 그 자체로 많은 힘을 얻었다.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밥 차려먹기 같은 내 일상을 챙길 시간은 있었다. 하지만 최근의 바쁨은 오롯이 회사 일 때문이었다. 게다가 밥 차려 먹기도 힘들어 매일 밥을 대충 때우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생활의 균형도 마음도 무너졌었나 보다.


그 와중에 내가 붙잡았던 동아줄이 커뮤니티였다. 몇 년 전부터 동종업계 여성들이 함께하는 커뮤니티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딱히 뭘 하지 않아도 여성 동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 좋았다. 그래서 그 바쁜 와중에도 모임마다 참여했다. 대부분 온라인 모임이어서 부담이 적었던 것도 있지만 모임에 참여함으로써 최소한의 내 일상을 지키고 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록 만날 때마다 회사 일을 했지만 주말 온라인 스터디 모임도 좋은 지지대가 되어 주었다. 이제는 사실상 스터디보단 자조모임에 가깝지만 서로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주는, 결이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 너무 큰 위로였다. 


이렇게 돌이켜보니 완전히 회사 일만 가득했던 것은 아니었다 싶다. 

나의 일상을 지켜주는 요소들을 놓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지 진심으로 깨달았다.


이후에도 힘든 시기들은 또 찾아왔고, 2024년에도 회사 사람들이 쓰러질까 걱정할 정도로 힘든 상황이었지만, 

작년의 이 깨달음 덕분에 일상을 놓지 않고 어느 정도 나를 지켜가며 일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심지어 밥도 꽤 잘 챙겨 먹었으니 조금 발전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런 기억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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