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내내 물리학과를 목표로 공부하였으나 마침내 기계공학을 선택하였다. 주변의 만류와 스스로의 자각 때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학문이기는 하지만 내가 잘할 수 있는 학문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물리학만큼은 진로를 결정하기 직전까지 교과 과정을 넘어선 공부를 해 왔다. 그 경험 덕에 물리학은 천재들의 학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나는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없었다. 부모님의 공대 진학 권유에 못 이기는 척하고 진로를 바꾸었다.
기계공학과에 입학하여 1학년 기초 과목으로 일반물리학을 수강하였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이었다. 나의 물리학 공부는 거기서 멈췄다. 신입생들을 모아 놓고 학과장님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여러분들은 졸업도 하기 전에 대기업에서 입도선매합니다. 기계과에 잘 왔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 IMF의 여파로 대기업의 신규 채용이 전무했던 기억, 집안 형편 상 지방 중소기업으로라도 취업을 해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물리학이 세상의 이치를 파헤치는 학문이라면 기계공학은 고전역학의 토대 위에 사람이 살아가면서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학문이다. 정역학(Statics)에서는 다리를 설계할 때 교각이 받는 힘과, 무거운 물체를 옮기는 크레인이 받는 힘 등을 배운다. 고체역학(Solid Mechanics)에서는 정적인 힘을 받고 있는 구조물의 휨과 응력, 파괴되지 않기 위한 재료와 형상을 설계하는 방법 등을 배운다. 열역학(Thermodynamics)에서는 물질의 상태와 열에너지에 관하여, 열전달(Heat Transfer)에서는 열이 전달되는 과정과 보온재 설계를 배운다. 그 밖에 동역학(Dynamics), 진동(Vibration Mechanics), 유체역학(Fluid Mechanics) 등 자동차, 로봇, 항공기 설계에 필요한 기본 지식들을 배운다. 기계적 현상들을 수식으로 설명하는 공학 수학은 필수이다.
학년 초에 학업보다 전자기타의 매력에 빠져 한 동안 몰두했던 적이 있다. 과 축제 때 밴드를 꾸려 공연한 적도 있고, 졸업 후에는 직장인 밴드를 한 적도 있다. 공부보다 기타를 선택했던 덕에 2학년 마칠 무렵 당시 최고의 투수였던 선동열의 방어율보다 낮은 1.8의 학점으로 학사경고를 받았고, 그 길로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제대 후 3,4학년 때 만회를 한다고 했지만 졸업 학점은 4.5 만점에 2.9였다.
졸업을 앞두고 후회와 미련이 밀려왔다. 내가 선택한 전공을 제대로 공부해 보지도 못하고 졸업하겠구나 하는 아쉬움이 커졌다. 마침 IMF가 터져 그 학점 가지고는 중소기업도 취업을 할 수가 없다는 이유도 한몫했다. 결국 어려운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께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손을 벌렸다. 어머니는 빚을 내서 등록금을 주셨다.
문제는 학점이었다. 그 학점으로 석사 과정생을 받아 줄 교수님은 없었다. 단 한 분만 빼고. 새로 부임하신 그 교수님은 MIT에서 박사학위를 따셨고, 매우 젊고 스마트한 분이었다. 제대 후 정신을 차리고 임했던, 낙제했던 공학 수학 재수강에서 처음으로 뵌 교수님이었다. 그분의 강의에 매료되었고 고3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 교수님 스타일에 따르면, 학기 중 총 4번의 시험을 치르고 앞의 3 시험을 합산하여 3등 안에 들면 마지막 시험을 면제해 주었다. 나는 1등을 하였고, 학부생으로 그 교수님의 눈에 들게 되었다.
그 교수님 연구실에 지원하고 면접을 볼 때였다. 그 교수님은 웃으면서 물어보셨다.
"학점이 왜 이모양이지?"
나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좀 놀았습니다."
다행히 그 교수님이 나를 석사 과정생으로 받아주셨고, 그렇게 대학원 생활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