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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수필집 1 16화

나에게 기계공학이란 (7)

by Neutron

나는 무작정 그 회사를 뛰쳐나왔다. 적이 없어진 상태에서의 취업은 쉽지 않았다. 어디든 적을 두고 있어야 채용을 하는 입장에서도 신뢰가 간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나의 하루 일과는 채용 사이트를 뒤지는 일로 시작되었다. 기계공학 전공을 원하는 수도권 소재 거의 모든 회사에 지원서를 넣었다. 그중에는 면접을 보러 갔다가 실망하고 돌아온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미 한 번 회사를 경험해 보니, 선택에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나름의 취업 기준을 세웠다.


1. 자동차 부품 제조사가 아닐것.

2. 수도권에 근무지가 있을 것.

3.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연구개발 업무일 것.


선택의 기준이 까다로웠는지 나의 백수 생활은 6개월 가까이 지속되고 있었다. 처음 한 두 달은 맘껏 놀았다. 친구들도 만나고 데이트도 매일 하고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다 풀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자유로웠던 시절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생활이 점점 길어지자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사지 멀쩡한 청년이 방구석에 틀어박혀 앉아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바람직하지 않았다.


오랜 백수 생활로 인해 인간의 자존감이 한 층 낮아진 상태에서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D전자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고 연락이 왔다. 근무지는 경기도 군포, 직무는 연구개발이었다. D전자는 세계경영을 기치로 내세운 최고 경영자의 진두지휘 아래 전 세계에 판매 네트워크를 구축한 명실상부한 대기업이었다. 물론 IMF 구제금융에 따른 구조조정으로 그룹이 해체되고 재계 순위가 30위까지 밀렸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아현동 본사 사옥은 여느 대기업과 다름없이 크고 말끔하였다.


면접관은 소음이 무엇인지 설명해 보라는 질문을 하였다.


"소음은 구조물의 진동이 공기에 전달되어 공기의 진동을 만들고, 그중 가청주파수의 진동이 우리 귀에 전달되어서 고막을 진동시켜 우리가 소리로 느끼는 메커니즘입니다. 그중 인간이 불편하게 느끼는 소리를 소음이라고 합니다."


면접관은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의 전공 관련 질문은 하지 않았다. 왜 D전자에 지원했는가 하는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저는 어려서부터 D전자의 제품과 함께 성장하였습니다. D전자의 더블테크 카세트 플레이어로 좋아하는 팝 음악을 듣고 자랐으며, 생의 첫 컴퓨터가 D전자의 제품이었습니다. 저의 성장기와 맞물려있는, 저에게는 애정 어린 D전자의 제품을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도록 좋은 제품 개발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며칠 후 D전자 인사팀에서 문자가 왔다. '축하합니다. 전형에 최종 합격하셨습니다. 신규 입사자 오리엔테이션이 x월 x일에 있으니 참석 바랍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느낌이었다. 지금의 아내와 결혼식이 곧 치러질 예정이었다. 백수 상태에서 결혼 날짜를 잡은 것이 조금 무모했지만, 다행히 결혼을 앞두고 취업에 성공하였다.


인덕원에 신혼집을 마련하고 D전자 군포연구소에 첫 출근을 하였다. 나는 VCR 기구설계팀에 배정되었다. 요새 젊은이들은 VCR이 뭔지 잘 모를 것이다. Video Cassette Recorder의 약자로, 비디오를 재생하거나 녹화할 수 있는 제품이었다. 당시는 정보 저장매체가 VCR에서 CD로 넘어가는 전환기였다. 비디오와 CD를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콤보 제품이 인기가 있었다. 내가 그 팀에서 처음 맡은 업무는 VCR 콤보 신제품을 설계하는 일이었다.


기구설계는 제품 외장을 설계하는 것이었다. 디자인 연구소에서 여러 가지 제품 이미지를 만들면 품평회를 통하여 가장 멋지고 이쁜 디자인을 선택한다. 그 디자인이 기능적으로 설계가 가능한 모양인지 검토하고 필요하면 부분적으로 디자인을 변경한다. 디자인이 확정되면 캐드를 사용하여 도면을 제작한다. 도면이 완성되면 Mock-up을 만들어 보고 외관과 버튼의 작동 등을 점검한다. 필요하면 도면을 수정한다. 최종 도면으로 금형 업체에서 금형을 제작한다. 금형이 완성되면 사출 업체에서 시사출을 해 본다. 몇 번에 걸친 시사출을 통하여 문제점을 걸러내고 필요하면 금형을 수정한다. 마지막으로 사출 된 제품에 문제가 없으면 양산 사출을 진행한다. 양산 사출 부품은 공장 조립라인으로 배송되고 컨베이어 벨트에서 VCR 제품이 조립된다. 조립된 제품은 검사를 거쳐 박스에 포장된다. 박스에 포장된 제품은 전국 양판점으로 뿌려지고 매장에 진열된다.


*Mock-up : 플라스틱 원자재를 깎아 만든 수제 모형이다. 금형 투자금액이 크므로 금형 제작 전에 사전 점검용으로 사용된다.

*금형 : 붕어빵 틀을 생각하면 된다. 금속 원자재를 깎아서 만든다. 플라스틱을 녹인 물이 금형 안으로 흘러들어 굳은 후 금형을 열면 원하는 모양의 제품이 떨어져 나온다.

*사출 : 플라스틱 재료를 녹여 금형 안으로 쏘아주는 과정이다. 사출기를 사용한다.


하이마트 매장에 진열된 내가 설계한 제품을 보는 것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매장을 구경하는 손님들에게 당장 달려가서 이 제품 제가 설계했어요 하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의 두 번째 직장에서는 기구설계와 도면 작성법, 제품 설계에 필요한 여러 가지 지식들을 배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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