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님은 우리 팀이 해체될 것을 미리 알고 팀원들에게 조용히 공지하였다. 빨리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라는 의미였다. 경험과 나이가 많은 선배들은 팀을 꾸려 설계사무소를 오픈한다고 하였다. 갓 들어온 후배들도 다른 기업 공채에 원서를 넣고 있었다. 어중간한 나는 내가 그동안 해온 업무 경험을 살려 경력직에 지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전 해에 승진하여 내 직급은 과장이 되어 있었다. 두 번째 직장에 입사한 지 7년 만에 구인 공고를 다시 뒤적이고 있었다. 여러 구인 공고들을 들여다보던 중 한 헤드헌터가 올린 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올렸다. 업무 내용은 '터보냉동기 기구설계'였다. 터보냉동기가 뭔지는 모르지만 '기구설계'라는 것이 나의 경력과 맞을 것 같아서 지원하게 되었다.
얼마 후 헤드헌터로부터 연락이 왔다. 석사 논문에 대하여 PT를 만들어 오라고 하였으며 면접일을 알려주었다. 나는 면접에서 발표할 자료를 정성스레 만들어서 헤드헌터에게 보냈다. 면접일이 되어 안양에 있는 그 회사 연구소로 갔다. 팀장님께는 면접 보러 간다고 당당히 말씀드렸다. 팀장님은 잘 보고 오라고, 행운을 빈다고 하셨다. 1차 면접을 마치고 며칠 후 지원한 회사 인사팀으로부터 2차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런데 2차 면접 후 연구소장님과의 석식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술자리 면접이구나 생각했다. 당시 채용 면접 방식 중 압박 면접, 술자리 면접 등 극한의 상황에서 사람의 됨됨이를 평가하는 면접 방식이 유행하였다. 2차 면접날 나는 아내에게 오늘 매우 늦게 들어올 수도 있다고 미리 말해 두었다.
2차 면접은 가벼운 대화로 채워졌고 연구소장님은 터보냉동기가 무엇인 지 보여주겠다며 나를 건물 지하로 안내하였다. 건물 지하에는 기계실이 있었고 거기에 금속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기계 장비가 있었다. 연구소장님은 이 장비가 찬물을 만들어 내어 여름철에 건물을 냉방하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해 주셨다. 당시에는 그 시스템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모두 알아들은 척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간 석식 자리에서 연구소장님은 술을 입에도 대지 않으셨다. 함께 간 박사 출신 연구원 두 명도 술을 못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먹고 싶으면 술을 시키라고 했다. 세 명 모두 술을 좋아하지 않고 잘 마시지 못했다. 술을 좋아하던 D전자의 팀장님에 의해 단련된 술 실력을 뽐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밥만 먹고 헤어졌다. '진짜 연구만 하는 사람들인가?' 하고 생각했다. 예상보다 매우 이른 시간에 집에 들어갔더니 아내가 놀라며 면접에서 떨어졌냐고 물었다.
그렇게 세 번째 직장을 갖게 되었고, 터보냉동기라는 것을 설계하는 업무가 내게 주어졌다. 전주에 위치한 공장을 방문한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터보냉동기의 크기에 압도되었다. 모든 부품 조립에는 크레인이 동원되었고, 안전모와 안전화를 착용하지 않고는 공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제품 규모만으로는 중공업이었다. 그동안 VCR과 같은 작은 가전제품만 설계해 오던 나로서는 이러한 거대한 기계를 설계할 수 있을까 겁부터 났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내 기계공학에 대한 지식과 설계에 대한 경험을 믿기로 했다.
나는 전주 공장에 1년간 파견을 나가서 제품 설계를 배워야 했다. 터보냉동기는 재료, 기계 가공, 열처리, 진동, 열전달, 유체역학, 열역학 등등 기계공학의 모든 것이 적용된 제품이었다. 학교 졸업 후 8년 동안 다 까먹은 지식들을 다시 기억해 내야만 했다. 입사 후 연구소장님과의 첫 주간 미팅이 있었다.
"공력 부품들 상사설계를 통해서 1000RT 압축기를 제작해야 하겠습니다. 임펠러는 메르디오널 라인이 완료되었고 도면 작업은 차주에 완료 예정입니다.... 증발기로 핫가스가 넘어가서 효율이 조금 떨어졌는데, 팽창밸브 조정을 통해서 안정화시켰습니다.... 테스트리그에 냉매가 일부 누설되어 할로겐 디텍터로 누설 부위를 찾아내었습니다.... 25% 부하에서 IGV가 모두 닫히는데, 서어지 영역에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압축기 맵을 다시 들여다봐야 할 것 같습니다."
4명의 연구원들은 각자 주간 업무를 소장님께 보고하고 있었는데, 분명히 한국말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순간 큰일 났구나 했다. 과장 직급의 경력사원으로 이직을 하였기 때문에 신입사원들 하고는 달라야 했다. 실전에 바로 투입되어서 회사에 기여해야만 했다. 왜 나를 뽑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그날로 열역학, 유체역학 책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냉동공조 관련 서적을 구매하여 열심히 읽었다.
그날의 충격이 컸던 지 나는 이를 악물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배워갔다. 출근은 아침 8시, 퇴근은 밤 12시였다. 당시만 해도 칼퇴니, 워라벨이니 하는 말들은 저 멀리 외계 언어였다. 다른 직원들은 아무리 야근을 해도 9시, 10시면 집에 갔으나, 나는 더 남아서 일을 처리해야 했다. 내가 설계하는 제품의 원리와 구조를 알아야 했다. 나는 어느새 직원들 사이에서 '독하게 일하는 놈'으로 인식되었다. 그렇게 전주에서 1년의 시간을 보냈다.
연구소장님은 나에게 신제품 개발 프로젝트를 맡기셨다. 회사 생활 처음으로 프로젝트 리더가 되었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에 대한 평가 권한이 생겼다. 그 책임감과 의무감 때문이었겠지만, 프로젝트를 수행하느라 며칠 밤을 꼬박 새운 적도 있었다. 수많은 부품들의 도면을 그리고, 제작하고, 조립하고... 마침내 내가 설계한 터보냉동기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나는 거의 울 뻔하였다. 첫 시운전에서는 목표 성능과 효율이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압축기 내부 회전체 부품이 파손되기까지 하였다. 우리 팀은 원인을 파악하고 도면을 수정하고, 부품을 다시 만들어 냉동기를 다시 조립하였다. 이 수정 작업에만 두 달 정도가 걸렸다. 두 번째 시운전에서도 효율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다시 원인을 찾고, 도면을 수정하고.... 무한 반복될 것 같았던 그 수정 작업이 거의 끝나갈 때였다. 1년 이상의 시간을 그 신제품 개발에 투입하였다. 마지막 시운전에서 나의 냉동기는 목표 성능과 효율을 만족하였다.
그림. 터보냉동기. 출처 : Google, 이투뉴스
그 제품 2대는 고객사에 50억 원에 팔렸고, 외산 냉동기 국산화, 대체화로 인해 향후 부가가치가 더 커지는 제품이 되었다. 그 해 나는 회사에서 받을 수 있는 상이란 상은 다 받았다. 연구개발상, 우수 연구원 상, 연말에 사장상까지... 회사 밖에서는 IR52 장영실상을 수상하였다. 7살짜리 꼬맹이 아들놈은 장영실상 시상식에 따라왔고 아빠가 자랑스럽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영예로울 수가 없던 그 해에 나에게 번아웃(Burn-out)이 왔다. 사내에서 주는 상과 정부에서 주는 상을 받을 때에도 그렇게 기쁘지가 않았다. 그냥 좀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사회에 첫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기계를 설계하고 만들어왔다. 나에게 기계공학이란 생계였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집을 구하고 여행을 가고 하는 일련의 살이 속에 나의 전공은 든든히 나를 받쳐주고 있었다. 또한, 사람들 속에서 경쟁하고, 미워하고, 상처받는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의 상대는 오로지 제품이었고 그 제품은 노력과 뚝심만 있으면 나에게 달콤한 열매를 선물해 주었다.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배신도 하지 않는다. 이 말을 뒤집으면,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배신도 한다. 연구소를 나와 영업 조직에 있으면서 절실히 깨달은 것이다. 그간 사람에 대한 경험이 모자랐던 나에게는 더 큰 상처로 다가왔다.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내가 기계를 이해했던 만큼 이제는 사람을 이해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