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회사는 뛰어난 제품의 설계 기술과 생산기술을 갖추고 있었으나 납품처가 국내 자동차 3사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 대기업들은 매년 꾸준한 오더로 회사 유지에 도움을 주었으나 그 도움은 딱 회사가 생존할 만큼이었다. 획기적인 신제품 개발에 손을 대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왜냐하면 신차 개발 프로젝트에서는 그 자동차에 장착될 모든 부품의 사양이 완성차 업체로부터 결정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양에 따라 내구성 있고 저렴한 제품을 설계하고 만들어 내면 그뿐이었다. 부가가치가 높은 신제품을 개발한다고 해서 그 제품을 아무 데나 팔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회사의 성장에는 한계가 있었고 영업이익률도 매년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중소기업을 택한 사람들의 이유를 들어보면 회사가 성장할 가능성을 본다고 한다. 그래서 회사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그만큼 자리도 늘어나고 직원의 승진도 막힘 없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현재를 견딘다고 한다. 하지만 이 회사는 매년 거의 비슷한 규모로 사업을 하였다. 인사 적체도 심하여 팀장 이상 관리자급으로의 승진이 매우 어려웠다. 내 동기들을 포함하여 대규모 신입사원 채용이 이루어지는 이유는 사업의 확장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많은 인원 결손 때문이었다. 회사의 사정을 알면 알수록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 나를 못 견디게 만든 것은 고객사의 횡포였다. 한 번은 고객사에서 우리 연구소로 출장을 온 사람이 있었는데, 직급이 대리라고 하였다. 그 대리는 나이가 한참 위인 우리 회사 연구소장을 하인 부리듯 하였다. 지난번 출장 때의 팀장님처럼 연구소장님도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굽신거렸다. 이런 게 갑질이라는 것을 잘 보라는 듯이 그 대리는 우리 회사를 휘젓고 돌아다녔다.
나는 일이 익숙해지면 질수록 팀장님과 동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내가 그동안 공부해 온 기계공학의 지식을 충분히 써먹을 수 있었고 업무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부자연스러운 회사 간 위계는 도저히 적응이 안 되었다. 불의에 순응하지 못하는 내 성격이 한몫했을 수도 있다. 그 갑질이 있고 난 후로 내 마음은 이미 회사를 떠나고 있었다.
또 한 가지 퇴사를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는 근무지였다. 지금의 아내와 한참 연애를 하던 중 나는 대구로 떠나버리게 되었고, 우리는 주말에 한 번씩 만나는 주말 커플이 되었다. 그 마저도 금요일에 야근을 하게 되면 서울행 버스를 타지 못하고 주말 내내 기숙사에 처박혀 있어야 했다. 입사 일 년이 다 되어가는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나는 금요일 퇴근 시간에 맞춰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고 우리는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그동안은 회사 업무가 바빠 서울에 올라가지 못하였고, 거의 한 달 만에 만나는 날이었다. 저녁 5시 버스는 서울에 밤 9시쯤 도착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우리를 위해 신께서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선물하시나 보다 했다. 그러나 눈발은 가면 갈수록 굵어졌고, 급기야 폭설로 변해버렸다.
도로 위의 모든 차들은 거북이처럼 기어갔다. 눈이 그칠 기세가 아니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예정보다 한참 늦게 서울에 도착할 것 같았다. 하지만 눈이 빨리 그치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밤 10시쯤 금강휴게소를 지나고 있었고, 나는 아내에게 연락하여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하였다. 내가 탄 버스는 다음날 새벽 3시쯤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하였다. 그날은 몇 십 년 만에 전국에 폭설이 내린 날이었다.
일요일에 대구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결심하였다. 이제 퇴사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다음 날 팀장님에게 퇴사하겠다고 말씀드렸다. 팀장님은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던지 크게 놀라는 표정은 아니었다.
“다 이해한다. 내 마음이 아프다.”
조촐한 송별회 자리에서 술에 취한 팀장님의 눈가는 촉촉이 젖어 있었다. 정이 많은 분이었다.
1999년 12월 31일부로 나는 그 회사를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