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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수필집 1 14화

나에게 기계공학이란 (5)

by Neutron

내가 사회 초년생으로 다녔던 회사는 자동차 1차 벤더였다. 헤드램프를 제작하여 완성차 업체에 납품하는 것이 그 회사의 주된 일이었다. 헤드램프는 빛을 내는 전구(거기서는 bulb라고 불렀다), 빛을 모아서 앞으로 쏴주는 반사경 그리고 기밀이 잘 유지되어야 하는 하우징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구소 건물 지하에 매우 넓은 암실이 있는데 헤드램프를 설계하고 난 후 빛이 원하는 패턴으로 원하는 거리까지 도달하는지 실험하는 곳이었다. 헤드램프에서 쏘아지는 빛은 아무렇게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 법규에 따라 특정 패턴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밤에 일반적으로 켜고 다니는 로우빔(Low beam)의 경우 왼쪽이 낮게 오른쪽이 높게 빛의 패턴이 형성되어야 한다. 마주 오는 운전자의 시야를 방해하지 않기 위함이다. 밤에 헤드램프를 담벼락에 비춰보면 무슨 말인 지 알 것이다.


그 패턴이 법규에 잘 맞도록 반사경을 설계하고, 비나 습기가 안으로 새들어오지 않도록 하우징을 설계하고 제작하는 것이 기술의 핵심이었다. 그 회사는 헤드램프 설계 기술에 있어서 국내 1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대기업에 비하면 작은 규모의 회사이지만 탄탄한 기술력과 안정적인 고객 확보에 의해 그 어려운 시기에도 부채비율이 150% 대였다(일반적으로 회사 부채비율이 200% 안쪽으로만 들어와도 재부구조가 탄탄한 회사라고 칭했다). 부채비율이 낮다는 말은 안정적이라는 말도 되지만, 그만큼 투자에 소극적이라는 말도 되었다. 투자는 설비 증설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사원의 급여와 복지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입사 7개월이 되어 어느 정도 일이 익숙해질 때쯤 팀장님과 나는 완성차 업체에 출장을 가게 되었다. 신차 프로젝트가 진행되면 우리는 램프를 설계하고 시제품을 만들어 납품 전 자체 시험도 하지만 완성차 업체 시험실에서 고객 입회 하에 동일한 시험을 통과해야 하였다. 팀장님과 나는 램프 시제품을 들고 고객 연구소로 향하였다. 가는 도중에 팀장님은 시험이 치러지는 단계와 절차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셨다.


“그 검사원 잘 구워삶지 몬하믄 힘들어진다카이.”


고객사 검사원은 얼핏 봐도 20대였다. 팀장님보다 한참 어렸고, 심지어 나보다도 어려 보였다. 팀장님은 늦은 오후에 고객사 연구소에 도착하여 그 검사원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였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 검사원은 우리 회사의 기술력이 대단해서 자기는 많은 걱정을 안 한다는 둥, 이 어려운 시기에 그렇게 많은 신입사원을 뽑은걸 보니 역시 우리 회사의 저력이 대단하다는 둥, 우리 앞에서 칭찬 세례를 퍼부었다. 식사 자리에 이은 술자리는 당연한 코스였다. 지금은 고객사에서 협력업체로부터 식사나 음주 접대를 받는 것이 매우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런 일이 빈번하였고 당연시 여겨졌다. 노래방에서 거하게 취한 그 검사원은 180도 돌변하였다.


“대 xx 사람들이 이것밖에 못 놀아!”


반말은 기본이었고, 나이가 한참 위인 팀장님한테 주인 종 부리듯 위력을 행사하였다. 더 충격적인 것은 팀장님의 대응이었다. 허리를 굽신거리며 그 비위를 다 맞춰줄 기세로 연신 ‘예, 예’ 거렸다. 이 것이 힘의 논리로 움직이는 사회라는 것인가. 나는 그때 직장 생활의 민낯을 똑똑히 보았다. 나는 그 검사원 앞에서 굽신거릴 이유가 없었다. 시제품을 검사해 보기도 전이었고, 우리가 자체 시험을 했을 때 그 샘플은 모든 항목을 완벽하게 통과하였다. 여기서 그에게 잘 보이던 못 보이던 시제품 테스트 통과는 뻔한 사실이었다. 그 검사원은 자기 흥에 잘 맞추지 못하는 나를 째려보곤 했다.


다음날 그 신제품 샘플은 시험에 통과되지 못했다. 아주 이상한 꼬투리가 잡혔다. 팀장님은 예상했다는 듯이 다음에 보완하여 다시 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그곳을 떠났다. 돌아오는 길에 팀장님은 시무룩해 있는 내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런 일 처음이제? 회사 생활 다 그렇다. 지도 우리 제품이 완벽하다는 걸 알긴데, 괜히 저러는 기다. 길들이는 기다. 담에 예산 좀 더 받아가 접대 좀 더 잘해주믄 되는 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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