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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 잘 끓이는 아저씨

끓는 탕에 뛰어들어 스스로 곰탕이 된...

by 이에누

최우근이라는 이름의 아저씨가 탕을 끓인다.
삶의 온갖 재료를 페이스북 갈피에 섞어 넣고, 시간과 온도를 재며 맛을 낸다.
그가 쓰는 글마다 국물의 색이 다르다. 어떤 건 사골처럼 뽀얗고, 어떤 건 대구탕처럼 맑으며, 또 어떤 건 매운탕처럼 얼얼하다.
그의 글에는 소고기 미역국도, 찌개와 전, 고구마 중탕도 등장한다. 기름집 이야기도, 주차장 요금도, 대중목욕탕 풍경도 빠지지 않는다.

가끔씩 글 머리나 꼬리에 '곰탕'이라는 요상한 단어가 붙어 있어 뭔가 싶었다. 글 몇 개를 읽다가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 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예전에 끓여 놓은 탕을 우려냈다는 뜻으로 ‘곰탕’이라 부른다. 새로 써낸 뜨끈한 창작물이 아니라, 예전 글을 다시 우려내는 작업.
하지만 그 안에는 자조와 유머, 그리고 묘한 작가적 양심선언이 들어 있다.


‘나는 재탕일지언정 복붙은 안 한다.’


그의 곰탕은 그런 정직함의 맛이 있다.
삼탕, 사탕, 마르고 닳도록 우려먹는 비양심의 짓은 결코 하지 않는다. 남이 쓴 글을 슬쩍 훔쳐 자기 것인 양 내놓는 가증스러움 따위도 없다.

그는 삶의 국물에서 맛을 길어 올리는 셰프이자, 때로는 스스로 재료가 되어 뜨거운 탕 속으로 뛰어드는 무모한 인간이다.
사골탕처럼 깊고, 생선탕처럼 날카롭고, 보양탕처럼 진심 어린 문장들. 그의 이야기에는 천진함과 유쾌함이 버무려져 있다.
구수한 욕지기를 섞어 위악을 떠는 시인의 흉내도, 전성기의 회상에 젖어 '나 이런 사람이었어!' 식의 자기애에 쩐 플렉스로 사람 불편하게 하지도 않는다. 굳이 안 써도 될 폭압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껄렁한 마초의 과시욕도 없다.

말하자면 ‘탕 잘 끓이는 오마카세 셰프 아저씨’다. 매번 메뉴가 다르고, 국물의 깊이가 다르다. 한 번 앉으면 다음 요리가 궁금해서 쉽게 일어나기 힘들다.
그의 주방에서는 늘 김이 오른다 — 이야기의 김, 인생의 김, 웃음의 김. 그 뜨거운 증기 속에서 나는 잠시 삶의 온도를 되찾는다.




최우근은 글을 끓인다.
그냥 쓰는 게 아니라, 탕을 끓이듯 쓴다.
소재를 넣고, 불을 맞추고, 잠시 뚜껑을 덮어두었다가 ‘이제쯤 됐겠지’ 싶을 때 툭 하고 건져낸다.
구수하고 찰지고 걸쭉하다. 읽다 보면 군침이 돌고, 웃음이 터지고, 때론 뜨거운 김에 눈시울이 살짝 젖는다.

그의 글은 곰탕, 사골, 보양탕, 때로는 장미탕이다. 탕마다 사연이 다르다.
대중탕의 허허로움, 가족탕의 따스함, 사우나탕의 노출된 인간미, 혼탕의 쓸쓸한 농도.


소고기 미역국 — 사소함의 철학


두 시간 동안 정성껏 끓인 미역국.
깊은 곳에서 푼 건 아내에게,
얕은 곳에서 푼 건 자기에게.
그리고 고백하듯 말한다.
“신이여, 제게 왜 이러시나이까.”

짧은 문장 안에 사랑과 죄책감이 겹쳐 있다.
이건 최민석의 자기 비하형 유머처럼 웃기지만, 동시에 김훈의 『화장』이나 『공터에서』에 나올 법한 절제된 문장이다.
그의 유머는 최민석의 리듬을 닮았고, 문장은 김훈의 단단함을 닮았다.
즉, 비루한 일상에 철학적 숨결을 불어넣는 희극의 미학이 여기 있다.

거창한 철학 대신, 사소한 불평 속에서 인간의 진심을 건진다. 그의 신앙은 가정의 식탁에 있고, 그의 기도는 국자 끝에 매달려 있다.


풍자탕 — 세상의 맞춤법


“- 김치찌게 좋아하셔요?”
“- ‘찌게’? 찌게? ‘찌개’는 좋아합니다만...”

맞춤법 하나가 두 사람의 관계를 박살낸다.
이 단순한 대화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은 곧 풍자로 변한다.
언어의 틀, 사회적 교양, ‘옳음’에 대한 강박이 한순간 코미디로 해체된다.

세월이 지나 여자가 ‘<찌게> 식당’을 차려 성공하는 결말은 블랙코미디의 정점이다.
웃음이지만, 동시에 묘하게 시원하다.
최우근은 ‘오타’ 하나로 세계의 위계를 비튼다.
그의 유머는 결코 가볍지 않다.
작은 실수 속에서 권력과 교양의 허상을 드러내는 치밀한 장치다.

이건 지식인의 오만에 대한 풍자극이다.
웃음 뒤엔 ‘나도 저랬지’ 하는 자기반성의 여운이 남는다. 그가 끓이는 유머는 똑똑한 척하지 않는다. 늘 자신부터 끓여서 우려낸다.


대중탕 — 인간이라는 비누거품


그가 한때 다녀온 ‘장미 사우나’ 이야기.
누가 물을 튀겼느니, 아니니, 싸움이 붙고,
욕탕 전체가 술렁일 때
그는 조용히 비누칠을 한다.
그리고 들려온 그 한마디 —
“어이!”

그가 돌처럼 굳어 돌아보니,
사내가 등 좀 밀어달란다.
“등 대봐, 내가 밀어줄게.”
“아뇨, 괜찮습니다. 원래 등 안 밀어요. 저는 제 등이 안 보여서요.”
그 말이야말로, 인생의 풍자다.
보이지 않는 내 등,
그게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아닐까?
최우근은 그걸 웃음으로 말한다.
한 손에 비누거품을 쥐고, 다른 손으론 인생을 긁는다.


가족탕 — 부부의 체온, 유머의 교집합


그의 부부 이야기는 늘 미묘하다.
이불 속에서 몸의 일부가 ‘교집합’이 되는 순간,
딸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리고 정지된 시간 속에서 친구는 고민한다.
(어쩌면 그 친구가 본인 아닐까?)

‘코를 골까?’

이건 단순한 성인 코미디가 아니다.
한평생을 함께 살아온 남녀가
삶의 열기와 체면 사이에서 벌이는
코믹한 생존극이다.
웃음 뒤에는 늘 묘한 짠맛이 남는다.
그게 최우근표 가족탕의 국물이다.
끓고, 식고, 다시 끓는.


그냥 목욕탕 — 씻음과 정화의 미학


“오늘, 왜 이렇게 잘생겨 보이지?”
아내의 말에 그는 답한다.
“… 씻었어. 비누로.”

이건 ‘청결의 고백’이자 ‘부부의 농담’이다.
비누 냄새 속엔 사랑의 냄새가 있다.
그는 허세 없이, 깨끗한 웃음으로 관계를 닦는다.
이불 아래의 교집합보다, 세면대 앞의 비누거품이 더 진하니까.


한심탕 — 웃음의 끝에서 마주한 연민


“스무 살 무렵, 늦여름의 어느 밤이었다. 205번 막차가 청량리역 버스 정류장에 멈췄다.”

이 문장 하나로 장면이 만들어진다.
청량리, 막차, 늦여름 밤.
서울의 땀 냄새와 먼지가 섞인 공기가 그대로 느껴진다.
이후 등장하는 한 여자의 말,

“– 놀다 가.”
한순간, 이야기는 예측 불가능한 궤도로 들어선다.

남자는 얼떨떨하고, 여자는 무심하게 담배를 빌려 피운다.
그리고 마지막 대사,

“– 우리 집에 오지 마. 더러우니까.”
그 한마디가 모든 감정을 뒤집는다.

처음엔 웃겼던 장면이, 마지막엔 이유 모를 슬픔을 남긴다.
이건 희극이 아니라 인간喜悲극이다.
최우근은 인물의 ‘한심함’을 비웃지 않는다.
대신 그 한심함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외롭고, 얼마나 사람을 그리워하는 존재인지 보여준다.


허당탕 — 또래 김밥과 종량제 아이스크림


냉동실 문을 열고는 아내가 말한다.
- 장 보고 종량제 봉투째 그냥 넣었네?
- 이게 왜 여기 있을까...?

어라? 그게 왜 거기 있지?
지갑 이 자식, 갱년긴가...

지갑을 종량제 봉투째 냉동실에 넣고,
‘또래 김밥’을 보고 기겁하는 이야기.


“고추김밥, 참치김밥, 우엉김밥... 그런데 유별난 김밥이 하나 있다. 또래 김밥.”

이 한 줄로 이미 이야기는 완성된다.
‘또래 김밥’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이름에서 최우근의 재치는 폭발한다.
그가 덧붙이는 마지막 문장은 짧지만 아프다.

“이 동네엔 내 또래가 없다. 그 이유를 이제 알겠다.”

이건 웃음의 탈을 쓴 쓸쓸함이다. 그는 세태를 풍자하되, 결코 사람을 비웃지 않는다. 웃음 뒤에 남는 것은 늘 인간에 대한 연민이다.


우당탕 미묘하고도 시끌벅적한...


'미묘지상주의'에서는 집과 작은 생명체의 움직임을 포착하며 웃음을 만든다. 천장에 새끼 고양이가 뛰고, 어미 고양이가 내려다보는 장면에서, 아내가 “있잖아. 어미가 위협을 느끼면, 달아난대. 조심해. 조심, 조심…”이라고 속삭이는 장면은 긴장과 유머를 동시에 전달한다.

그의 글에는 어린 시절의 놀라움과 순수함도 살아 있다.


‘개 똥 아

똥 쌌 니

아 니 오’


공책에 적힌 세 문장에 온몸을 떨며 감탄하는 장면은, 단순한 장난을 통해 발견한 마방진의 경이로움과 기쁨을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

“나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그 빛나는 문장들을 공책에 받아 적었다.”라는 문장 하나만으로도 어린 시절의 순수한 즐거움이 전해진다.

또한, 일상의 소소한 재미와 인간관계의 미묘함도 놓치지 않는다. 핸드폰 AS센터에서 80대 여인을 돕다가, 뒤에서 남편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 장면은, 현실 속 웃음과 소란, 인간관계의 아이러니를 잘 포착한다.


가끔 곰탕 — 재탕의 미학


그는 스스로 말한다. “곰탕입니다.”
옛날 글을 다시 우려낸 거라며 웃는다.
하지만 그 국물은 한 번 더 끓여서 더 깊다.
웃음과 풍자, 허무와 체념이 시간이라는 불 위에서 중탕되어 나온다.

“남이 쓴 글을 퍼오진 않아.”
그 말엔 작가의 양심과 장인의 손맛이 있다.
그의 재탕은 재활용이 아니라, 숙성이다.
오래된 미역이 더 깊은 맛을 내듯,
그의 문장도 삶을 오래 절인 뒤 나온다.


인생탕 — 웃기다, 슬프다, 허무하다


그의 글은 ‘웃기다’로 시작해서 ‘허무하다’로 끝난다. 그게 그의 문학적 리듬이다.
욕탕의 거품처럼 피어올랐다가, 사라지고 나면 따뜻한 물 한 사발이 남는다.

풍자와 유머, 골계와 허당, 그 모든 걸 국물처럼 녹여낸 최우근의 글에는 한 가지 진리가 숨어 있다.

인생은 끓일수록 진해지고,
웃을수록 씁쓸해진다.
그래도 다시 불을 올려야 한다.
그게, 인생탕이니까.





최우근 이라는 이름을 페이스북에서 발견했을 때 누군지 몰랐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개구쟁이 같은 얼굴 위에 떠 있는 《이웃집 발명가》 랑 《거기 서 있는 남자》라는 포스터를 보고 예전에 봤던 연극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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