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뇌는 진실을 판별하도록 진화하지 않았다. 뇌의 최우선 목적은 오직 생존이며, 무리를 지어 사는 사회적 동물에게 가장 확실한 생존 방식은 다수가 믿는 서사에 동조하는 것이다.
집단 내에서 누군가가 이질적인 존재로 낙인찍히는 순간, 군중은 그를 무리에서 쫓아내기 위해 가장 비합리적인 환상조차 기꺼이 진실로 수용한다. 나 혼자만 다수의 의견을 부정하다가 가해자의 옹호자로 찍혀 함께 배척당할지도 모른다는 짐승 같은 공포. 그 공포 앞에서는 그 어떤 논리나 이성도 힘을 쓰지 못한다.
서지안이 사내 익명 게시판과 외부 커뮤니티에 동시다발적으로 투척한 한 편의 고발 글. 그것은 목요일 아침을 기점으로 태성그룹 임직원들의 스마트폰을 타고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미래전략 R&D 센터 백도훈 전무는 이제 회사의 미래를 책임질 혁신적인 천재가 아니었다. 그는 부하 직원들의 피와 땀을 갈취하고, 심각한 알코올 의존증과 망상에 시달리며 폭력을 휘두르는 흉물스러운 괴물로 대중의 뇌리에 완벽하게 박제되었다.
목요일 오전 9시. 본사 30층 R&D 센터.
센터의 공기는 마치 진공실처럼 무겁고 고요했다. 평소라면 키보드 타이핑 소리와 연구원들 간의 날 선 토론으로 활기가 넘쳤을 공간이었지만, 오늘따라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은 허공을 떠돌다 이내 스마트폰 화면에 띄워진 폭로 글로 향했다. 밤사이 수천 개의 댓글이 달린 그 글은, 30층 연구원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는 완벽한 기폭제였다.
“윤 수석님.”
정적을 깨고 2팀의 박 책임이 파티션 너머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저 글, 보셨습니까?”
“어. 아침부터 다른 부서 동기들한테 전화통에 불이 나게 전화가 오는데, 도무지 누가 쓴 건지 짐작이 안 가.”
윤 수석은 안경을 신경질적으로 치켜올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누가 썼는지가 뭐가 중요해. 내용이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다 우리 심정을 백 퍼센트 대변하고 있잖아. 지난달에 내 알고리즘 기안서 쓰레기 취급하면서 반려시켰던 거, 그거 나중에 부사장님 보고서에 보니까 지 이름으로 교묘하게 특허 출원 준비하고 있더라고. 우리 고혈을 빨아먹는 흡혈귀라는 말이 딱 맞아.”
“저도 소름 돋았던 게, 저번에 전무실 결재받으러 들어갔는데 전무님이 갑자기 허공에 대고 쌍욕을 하길래 스트레스받아서 그러시나 했거든요. 근데 그게 조현병 증상이었던 거네요? 게다가 가까이 갔을 때 진짜 텀블러에서 술 냄새가 났다니까요!”
파편화되어 있던 기억들이, 폭로 글이라는 거대한 프레임에 맞춰 완벽한 괴담으로 재조립되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백도훈의 사소한 기행과 엄격했던 지시들을 그저 괴팍한 천재 상사의 갑질 정도로 여기며 참고 넘겼던 연구원들은, 이제 자신들이 범죄자의 피해자라는 달콤한 합리화에 빠져들었다. 내 실력이 부족해서 혼난 것이 아니라, 저 미치광이가 내 아이디어를 훔치기 위해 나를 탄압한 것이라는 서사는 그들에게 강력한 면죄부를 제공했다.
“당장 내일 오후 2시가 이사회 프레젠테이션인데, 우리가 밤새워 피 토하며 짠 코드로 저런 미치광이만 영웅이 되게 내버려 둘 겁니까?”
“난 오늘부로 코드 수정에 손 뗄 겁니다. 지가 진짜 천재면, 어디 혼자서 수백억짜리 시연 서버 다 세팅해 보라죠.”
배척의 합의가 이루어지는 데는 긴 대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눈빛 교환 몇 번, 그리고 공포를 공유하는 침묵. 그것으로 충분했다. 30층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혐오 공동체로 묶여, 백도훈을 투명 인간 취급하기로 암묵적인 결의를 다졌다.
오전 10시 30분.
백도훈이 거친 발걸음으로 R&D 센터 정문을 통과했다.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밤새 불면증과 알코올 금단 현상에 시달린 탓에 뺨은 푹 패어 있었고, 핏발이 선 눈동자는 초점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 번들거렸다. 구겨진 명품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그는 센터에 들어서자마자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야, 1팀 윤 수석! 어제 내가 메일로 보낸 딥러닝 코어 엔진 패치 파일, 지금 당장 테스트 서버에 올려서 시뮬레이션 돌려!”
도훈의 사자후가 30층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평소 같으면 다급한 대답과 함께 연구원들이 우르르 모여들어 키보드를 부서져라 두드렸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끔찍하리만치 차갑고 건조한 정적뿐이었다.
수십 명의 연구원들이 일제히 타이핑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도훈을 쳐다보았다.
도훈은 순간 비틀거리던 발걸음을 멈칫했다. 그들의 눈빛은 깐깐한 상사를 향한 존경이나 두려움이 아니었다. 동물원 우리 안에 갇힌, 냄새나고 병든 짐승을 관찰하는 듯한 지독한 경멸과 역겨움이 섞인 시선이었다.
적막을 깨고 1팀의 윤 수석이 자리에서 느릿느릿 일어났다. 그는 도훈의 핏발 선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감정이 완벽하게 거세된 기계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무님. 해당 패치 파일은 시스템 안전성 검증 절차를 거치지 않은 비인가 코드입니다. 테스트 서버에 올리려면, 전무님의 서면 결재와 사고 발생 시 모든 책임을 지시겠다는 법무팀의 확약서가 필요합니다.”
도훈의 안면 근육이 기괴하게 실룩거렸다.
“뭐? 확약서? 너 지금 나랑 장난해?! 당장 내일 오후가 피티인데 무슨 미친 소리야! 까라면 까!”
도훈이 이성을 잃고 윤 수석의 파티션 앞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윤 수석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의 다른 연구원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도훈을 적대적으로 에워싸듯 노려보기 시작했다.
“저희는 회사의 규정을 따를 뿐입니다. 구두 지시로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숨 막히는 대치. 철저한 준법투쟁을 핑계로 한 완벽한 항명이었다.
수십 개의 적의 어린 눈동자가 도훈의 살갗을 바늘처럼 찔러댔다. 도훈은 자신의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천재라는 오만한 권력이 이 실무진들에게 더 이상 조금도 통하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폭로 글이 만들어낸 거대한 환상이, 연구원들의 뇌 속에서 도훈을 상사가 아닌 척결해야 할 전염병으로 규정해 버린 것이다.
인간의 뇌는 물리적인 폭행을 당했을 때와 완벽히 동일한 부위가 사회적 고립을 겪을 때 통증을 호소한다. 무리에서 완전히 배척당했다는 원초적인 공포. 아침 빈속에 털어 넣었던 알코올 기운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지독한 금단 현상과 피해망상이 다시금 그의 뇌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이 반란을 일으켰어. 내 코드를 훔치고 나를 내일 이사회에서 매장시키려고 작당을 한 거야!’
도훈은 헉, 하고 가쁜 숨을 들이켰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극심한 빈맥이 찾아왔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을 말아 쥐고는, 쫓기는 짐승처럼 뒷걸음질을 쳐 자신의 집무실로 도망쳐 들어갔다.
쾅!
육중한 문이 닫히고, 블라인드가 거칠게 내려졌다.
완벽한 밀실.
도훈은 책상 모서리를 부여잡고 짐승처럼 헐떡였다. 두려웠다. 내 머릿속의 위대한 영감이, 저 무식하고 열등한 다수의 폭력 앞에 비참하게 짓밟힐 것만 같았다. 내일 오후 2시 이사회 프레젠테이션까지 남은 시간은 단 27시간 남짓.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 도훈의 뇌는 찢어질 듯한 고통을 잊기 위해 가장 강력하고 익숙한 보상을 갈구했다. 알코올.
그는 미친 사람처럼 책상 서랍을 뒤집어엎고, 캐비닛을 열어젖혔다. 서류 더미가 바닥으로 나뒹굴고 펜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아무리 뒤져도 며칠 전 쟁여두었던 술병들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도훈이 전날 밤 집무실을 비운 틈을 타 서지안이 특별감사팀의 권한으로 보안 요원들을 대동하여 그의 방에 있던 모든 주류와 신경안정제를 모조리 수거해 폐기해 버린 탓이었다. 오직 서지안 자신이 건네주는 술에만 완벽하게 의존하게 만들기 위한 치밀한 환경 통제였다.
“술… 술이 어디 갔어… 제발….”
손끝의 떨림이 팔 전체로 퍼져나가며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도훈은 바닥에 주저앉아 헛구역질을 했다. 목이 말라 미칠 것 같았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지옥 같은 무균실에서, 그를 구원해 줄 동아줄이 모두 끊어져 버린 완벽한 절망.
바로 그때.
철컥, 하고 굳게 닫혀 있던 집무실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도훈이 핏발 선 눈을 번쩍 떴다.
역광을 등지고 서 있는 눈부신 실루엣. 티끌 하나 없는 새하얀 화이트 슈트를 완벽하게 차려입은 서지안이 서 있었다. 단정하게 묶어 올린 머리, 창백한 피부에 대비되는 선명한 붉은 립스틱. 그녀의 한 손에는 검은색 가죽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전무님.”
지안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집무실의 썩은 공기를 가르고 도훈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 목소리는 마치 지옥의 밑바닥에 강림한 유일한 성녀의 기도 소리처럼 달콤했다.
“지… 지안 씨… 서 실장님….”
도훈은 체면도, 자존심도 내팽개친 채 바닥을 기듯 다가가 지안의 슈트 바짓단을 움켜쥐었다.
“다들 미쳤어. 내 부하들이 내 코드를 안 받겠대. 나를 벌레 취급해! 부사장님은 내 전화를 받지도 않아! 나, 나 좀 살려줘. 숨이 안 쉬어져….”
알코올 의존증과 편집증이 극에 달한 천재의 처참한 붕괴.
일반적인 임원이라면 이 기괴한 광경에 경악하며 당장 프레젠테이션 취소를 윗선에 건의했겠지만, 지안은 동요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완벽한 파멸의 미학 앞에서 그녀의 심장 박동은 기분 좋게 뛰고 있었다.
지안은 구두를 벗은 채 한쪽 무릎을 굽혀, 바닥에 엎드린 도훈의 눈높이에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조심스럽게 도훈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었다.
“도훈 선배. 진정하세요.”
지안의 크고 짙은 눈동자가 도훈의 흔들리는 시선을 완벽하게 옭아맸다.
“그깟 실무진들이 뭐가 중요합니까. 그들은 그저 선배가 만든 위대한 코드를 타이핑하는 낡은 타자기일 뿐이잖아요. 타자기가 고장 났다고 위대한 소설가가 글을 못 씁니까?”
“하지만… 내일 시연용 서버를 세팅해야 하는데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아….”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인사팀과 보안팀을 눌러서 그들이 딴생각을 못 하도록 제가 철저하게 통제하겠습니다. 선배는 오직 코드에만 집중하세요.”
지안은 도훈을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가져온 가죽 케이스를 올리고 잠금장치를 열었다.
딸깍.
영롱하게 빛나는 황금빛 액체가 담긴 크리스털 디캔터. 1970년 빈티지, 60도짜리 독주 원액이었다.
순간, 도훈의 침샘이 폭발하며 목울대가 크게 출렁였다. 짐승이 먹이를 발견한 듯한 그 맹목적인 탐욕의 눈빛. 지안은 그 황홀한 변이 과정을 여유롭게 감상하며 크리스털 잔에 독주를 가득 따랐다.
“선배는 온전히 내일 무대 위에서 펼칠 예술만 생각하세요. 저 밖에 있는 임원들과 연구원들은 선배의 진가를 몰라보지만, 저는 알아요. 선배의 뇌 속에 이 세상을 완벽하게 뒤집어버릴 혁명이 숨어 있다는 거.”
지안은 잔을 도훈의 떨리는 두 손에 쥐여주었다.
“마시세요. 뇌를 갉아먹는 그 알량한 공포와 바깥의 시끄러운 소음들을, 이 한 잔으로 완벽하게 태워버리십시오.”
달콤한 독배. 그것은 도훈을 파멸의 낭떠러지로 떠미는 무자비한 손길임과 동시에, 공포에 질린 그에게 유일한 위안을 주는 천사의 날개깃으로 교묘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도훈은 홀린 듯이 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꿀꺽.
식도를 타고 흘러가는 60도의 불길. 위장에 닿는 순간 척수를 타고 뇌로 전달되는 강렬한 마취의 쾌감. 도훈의 뇌 속에서 이성과 논리를 담당하던 전두엽의 마지막 퓨즈가 끊어져 나갔다.
대신, 알코올로 증폭된 끝없는 오만함과 광기가 그의 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덜덜 떨리던 도훈의 굽었던 허리가 서서히 펴졌고, 비뚤어진 입가로 기괴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맞아. 지안 씨 당신 말이 다 맞아. 나는 저런 벌레 같은 놈들의 도움이 필요 없어. 내가 신이야. 내가 직접 내일 무대에서, 내 손으로 증명해 주면 돼.”
“그렇죠. 대본도, 실무진의 보조도 필요 없습니다. 선배는 무대 위에서 짐승처럼 날것의 천재성을 쏟아내기만 하면 됩니다.”
지안은 도훈이 단숨에 비워낸 잔에 다시 독주를 가득 채워주었다. 도훈은 낄낄거리며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목요일 오후부터 금요일 아침에 이르기까지.
R&D 센터 30층은 철저한 평행선을 달렸다. 실무진들은 완벽하게 업무에서 손을 놓은 채 유령처럼 앉아 있다가 칼같이 퇴근해 버렸고, 도훈은 굳게 닫힌 집무실 안에서 지안이 곁에 두고 간 엄청난 양의 독주에 절어 밤낮없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술에 만취한 도훈이 작성하는 코드는 참혹했다. 천재의 영감은 온데간데없고, 시스템의 메모리 누수와 충돌을 완전히 무시한 채 오로지 자신의 기괴한 망상만을 억지로 우겨넣은 에러투성이의 배설물이었다. 모니터 위로 붉은색 경고 창이 수십 개씩 떠올랐지만, 알코올이 만들어낸 전능감 속에서 도훈은 자신이 세기의 역작을 코딩하고 있다고 맹신하며 모니터에 대고 삿대질을 해댔다.
그리고 22층 특별감사팀.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 도훈의 웹캠 해킹 영상을 밤새 지켜보던 지안은, 그가 스스로 목에 밧줄을 거는 광경을 보며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이로써 프레젠테이션의 실패는 기정사실화되었다. 남은 것은 오늘 오후, 수백 명의 관객 앞에서 이 파멸의 폭탄이 어떻게 터져 오를지를 결정하는 마지막 뇌관뿐이었다.
결전의 금요일. 오전 10시.
이사회 프레젠테이션 무대를 불과 4시간 앞둔 시각.
도훈의 집무실 바닥에는 빈 술병이 어지럽게 뒹굴고 있었다. 도훈은 며칠째 씻지 않아 끔찍한 악취를 풍기며 소파에 널브러져 코를 골고 있었다.
끼익.
문이 열리고 서지안이 들어왔다. 여전히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새하얀 슈트 차림의 그녀는, 코끝을 찌르는 알코올의 신내와 악취 속에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에는 은은한 광택이 도는, 순은으로 세공된 휴대용 작은 술병이 들려 있었다. 그 안에는 도수 60도를 넘나드는 독주가 가득 차 찰랑거렸다.
지안은 소파에 널브러진 도훈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일어나세요, 선배. 세상을 바꿀 시간입니다.”
도훈이 게슴츠레 눈을 떴다. 술이 깨면서 몰려오는 지독한 숙취, 그리고 불과 몇 시간 뒤면 수백 명의 임원들 앞에서 발표를 해야 한다는 거대한 현실 감각이 그의 뇌를 망치처럼 때렸다.
“아, 안 돼… 못 가. 사람들이 다 나를 비웃을 거야. 내 코드를 훔쳐 갈지도 몰라….”
무대 공포증과 금단 현상이 극에 달한 천재는 어린아이처럼 몸을 웅크리며 벌벌 떨었다. 타인의 시선은 그에게 살을 저미는 칼날과도 같았다. 도훈은 자신의 천재성이 사실은 알코올 없이는 단 1분도 유지되지 못하는 허상이라는 사실을 마주할까 봐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지안은 그런 도훈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손에 쥐고 있던 순은 술병을 도훈의 덜덜 떨리는 품에 다정하게 안겨주었다.
“오늘 오후 2시. 대강당에는 수백 명의 이사진과 임원들이 선배의 입만 쳐다보고 있을 겁니다. 선배의 몰락을 기도하며, 헐뜯지 못해 안달 난 하이에나 떼들.”
도훈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무대 위에서 압박감 때문에 호흡이 가빠지고 머릿속이 하얘지려 한다면, 이 부적을 꺼내세요. 아무도 모르게, 오직 선배에게만 허락된 한 모금의 완벽한 구원이 될 겁니다.”
대중 앞에서의 공포를 이겨낼 기폭제를, 가장 다정한 지지의 형태로 쥐여주는 행위. 무대 위에서 이성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통제 불능의 짐승으로 폭주하게 만들 완벽한 스위치였다.
도훈은 홀린 듯이 은색 술병을 생명줄처럼 꽉 쥐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불안정하게 뛰던 그의 심장 박동을 서서히 진정시켜 주었다. 이 작은 병 하나에 담긴 액체만이 자신을 지켜줄 유일한 신처럼 느껴졌다.
“그래… 이것만 있으면, 이 한 모금만 있으면 난 완벽해질 수 있어. 무대 위에서 저 쓰레기들을 다 짓밟아 줄 거야.”
“잘 다녀오세요. 저는 가장 앞자리에서 선배의 그 압도적인 예술을 지켜보겠습니다.”
지안은 화이트 슈트의 먼지를 우아하게 털어내고 집무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텅 빈 30층의 복도를 걸어가는 그녀의 입가에 뱀처럼 서늘하고 치명적인 호선이 그려졌다.
타겟의 이성을 완벽하게 마비시키고 주변과의 연결을 절단하여, 오직 자신과 알코올에만 맹목적으로 의존하게 만드는 심리전의 극치.
이제 태성그룹 역사상 유례없는, 오만한 천재의 끔찍한 생방송 자살 쇼가 대강당의 화려한 막을 올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