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우웅-! 덜컹!
절대 열릴 것 같지 않던 티타늄 합금의 이중 차폐문이 마침내 육중한 몸체를 좌우로 갈랐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VIP 라운지를 가득 채우고 있던 폭동의 굉음과 피비린내가 타워 내부로 빨려 들어갔다. 태현은 숨을 헐떡이는 서유진의 손목을 낚아채듯 끌고 타워의 입구 안으로 몸을 던졌다.
"닫아!! 당장 닫아!!"
태현의 외침에 유진이 마스터 패드의 엔터 키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철컥! 쾅-!!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열렸던 차폐문이 다시 무서운 속도로 닫히며 굳게 잠겼다.
문이 닫히기 직전, 태현의 시야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프레토리안 가드의 장갑차 같은 외골격을 맨손과 이빨로 뜯어내며 환호하는 수백 명의 하층민 폭도들이었다. 그들은 닫히는 문을 향해 피투성이가 된 손을 뻗었지만, 타워의 문은 무자비하게 그들을 바깥 지옥에 남겨둔 채 밀봉되어 버렸다.
"하아… 하아…."
완벽한 정적.
방금 전까지 고막을 찢어발기던 총성도, 짐승 같은 괴성도, 폭발음도 모조리 사라졌다. 두께만 1미터가 넘는 압도적인 차폐벽이 외부의 모든 물리적 에너지를 차단한 것이다.
태현은 차가운 타워 바닥에 대자로 뻗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전신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총알이 스친 어깨의 상처에서는 끊임없이 뜨거운 피가 흘러나와 바닥을 적셨다.
"살아… 남았군요."
유진 역시 벽에 기대어 주저앉은 채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손은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직 아니야. 진짜 딜러 새끼들 모가지를 따기 전까진 안 끝났어."
태현이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손등으로 턱에 맺힌 피땀을 닦아내며, 처음으로 입성한 판옵티콘의 심장부, '중앙 타워'의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화려함의 극치였던 VIP 라운지와는 정반대의 공간이었다.
어떠한 장식이나 그림도 없는 완벽한 무채색의 공간. 오직 차가운 금속성 패널과 푸른빛의 LED 라인만이 타워 내부를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공간 한가운데에는 위로 끝없이 뻗어 있는 거대한 유리 원통형 승강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게… 벙커를 통제하는 메인 서버이자, 놈들의 도주로인가."
태현이 승강기 쪽으로 다가갔다.
승강기 내부에는 벙커 전체의 생명 유지 장치, 전력망, 보안 시스템을 통제하는 복잡한 홀로그램 콘솔들이 배열되어 있었고, 그 위로는 아득히 높은 천장을 향해 수직 통로가 뚫려 있었다.
"강태현 씨, 수몰 진행 상황이 심각합니다."
유진이 마스터 패드의 서브 모니터를 띄우며 다급하게 보고했다.
화면에는 판옵티콘 벙커의 3D 단면도가 붉은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사회가 자폭 시퀀스를 가동하면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해수 밸브를 전부 열어버렸어요. 하층민 구역(The Pit)은 이미 100% 수몰되었습니다. 미처 올라오지 못한 빈민들은 전원 익사했을 겁니다."
"시민 구역은?"
"현재 시민 구역으로 물이 차오르고 있습니다. 수압 때문에 격벽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예요. 앞으로 20분… 길어야 25분이면 우리가 방금 떠나온 VIP 라운지까지 완전히 바닷물에 잠깁니다. 이 타워의 외벽이 아무리 튼튼해도, 수천 톤의 심해 수압을 견디지는 못할 겁니다."
시간이 없었다.
이사회가 미련 없이 벙커를 수장시키기로 한 이상, 25분 뒤면 판옵티콘에 있는 모든 인간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물고기 밥이 된다. 유일한 생존 방법은 이 타워 꼭대기에 있는 비상 잠수정을 탈취하는 것뿐이었다.
"올라가자."
태현이 핏방울이 떨어지는 소총을 고쳐 매고 원통형 승강기 안으로 들어섰다. 유진도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위이이잉-
유진이 패드를 조작해 승강기를 작동시키자, 투명한 바닥이 부드럽게 떠오르며 무서운 속도로 타워를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승강기가 위로 솟구칠수록, 투명한 벽 너머로 벙커의 끔찍한 말로가 눈에 들어왔다. 타워 외부의 유리창을 통해, 붉은 비상등 아래서 무너져 내리는 돔형 천장과, 살기 위해 서로를 짓밟는 VIP 라운지의 폭도들이 개미 떼처럼 작게 보였다. 카지노의 군상들이 맞이한 가장 비참한 엔딩이었다.
[침입자 감지. 침입자 감지.]
승강기가 중간층을 돌파할 즈음, 타워 내부에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이사회 놈들이 시스템을 수동으로 조작하고 있어요! 승강기 제어권을 빼앗으려 합니다!"
유진이 키보드를 미친 듯이 두드리며 소리쳤다. 승강기의 상승 속도가 덜컹거리며 불규칙해지기 시작했다.
[쥐새끼 두 마리가 끈질기게도 기어 올라오는군.]
승강기 내부의 스피커에서, 아까 홀로그램으로 들었던 이사회의 그 오만한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여러 명이 섞인 기계음이 아니라, 지독히도 냉소적이고 날카로운 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였다. 이사회의 '수장'이 분명했다.
[너희가 그 잘난 해킹 기술로 타워의 문을 열고 들어올 줄은 알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지? 너희는 지금 물이 차오르는 관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거다.]
"주둥이만 살아있는 딜러 새끼. 관짝 사이즈는 니 몸집에 딱 맞춰 놨으니까 걱정 말고 기다려."
태현이 승강기 천장에 달린 감시 카메라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크큭.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강태현. 요람에서 룰을 비틀고, 하층민 구역에서 칩을 살포해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고, 마에스트로의 눈을 가려 파산시킨 수법들. 인정하마. 너는 내가 이 판옵티콘을 세운 이래 보았던 가장 완벽한 겜블러다.]
수장의 목소리에는 분노보다는 기묘한 환희가 섞여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완벽한 장기말을 찾아낸 듯한 탐욕스러운 음성이었다.
[그래서 내 제안을 하나 하지. 넌 저 밑바닥의 벌레들과 함께 수장되기엔 너무 아까운 재능이야. 지금 당장 무기를 버리고 올라와라. 내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이 무너지는 벙커 대신 내가 지상에 세울 '새로운 카지노'의 지배인 자리를 주마.]
권력과 생존을 미끼로 한 달콤한 회유.
수천 명을 버리고 올라온 타짜에게 건네는, 악마의 동업 제안이었다.
하지만 태현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들고 있던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천장의 카메라 렌즈를 박살 내버렸다.
콰직!
"회유? 동업?"
태현이 박살 난 카메라의 잔해를 향해 침을 뱉었다.
"내가 카지노에서 딜러 짓 할 때 제일 혐오하는 새끼가 누군지 아냐? 판돈 잃을 것 같으니까 판 엎어버리고 도망가는 먹튀 새끼들이야."
태현의 두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난 잃은 돈 찾아주러 온 게 아니야. 니들이 숨겨둔 판돈까지 영혼까지 털어먹으러 온 거지. 기다려라. 대가리에 구멍을 내서라도 계산은 확실하게 받아낼 테니까."
[…어리석은 놈. 지옥 불에 타죽어라.]
수장의 서늘한 저주와 함께, 승강기 상단의 천장이 윙,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리며 수십 개의 붉은 레이저가 쏟아져 내려왔다.
"강태현 씨!! 레이저 커팅망입니다!!"
유진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고출력 공업용 레이저가 승강기 내부를 격자 모양으로 가르며 훑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닿는 순간 인체를 순식간에 절단해 버리는 죽음의 그물이었다.
"빌어먹을!"
태현은 즉각 소총을 내던지고, 승강기 바닥의 비상 패널을 뜯어냈다. 그는 뜯어낸 티타늄 패널을 우산처럼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레이저를 막아냈다.
치이이이익!!
고출력 레이저가 티타늄 패널에 닿자 엄청난 열기와 함께 불꽃이 튀며 금속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태현의 두 팔 근육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고, 녹아내린 쇳물이 그의 어깨 위로 뚝뚝 떨어지며 살갗을 태웠다.
"크으으윽…!! 서유진!! 해킹 뚫어!! 빨리!!"
태현이 이빨이 부서져라 악물며 소리쳤다. 패널이 완전히 녹아내리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10초.
"큭… 이사회 메인 터미널이 방어 코드를 쏟아내고 있어요! 연산 속도가 부족…!!"
유진이 절망적으로 외치는 순간.
콰아아아앙-!!
타워의 저 아래쪽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울리며 승강기 전체가 강하게 요동쳤다.
수압을 견디지 못한 시민 구역의 메인 격벽이 붕괴하며, 수만 톤의 바닷물이 타워의 하층부로 들이닥친 것이다. 엄청난 충격에 타워의 전력망이 순간적으로 쇼트를 일으켰고,
파직-!
승강기를 내리누르던 레이저 커팅망이 찰나의 순간 전력 공급이 끊기며 소멸했다.
"지금이야!!"
태현은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녹아내린 패널을 집어 던지며 승강기의 상단 비상구 해치를 주먹으로 쳐서 박살 냈다. 그는 유진의 허리춤을 붙잡고 짐승 같은 탄력으로 도약하여 승강기 지붕 위로 몸을 끌어올렸다.
두 사람이 승강기 지붕 위로 올라서기가 무섭게, 다시 전력이 복구된 레이저가 승강기 내부를 완전히 난도질해 버렸다. 단 1초만 늦었어도 둘은 깍두기처럼 썰렸을 터였다.
"하아, 하아… 미친 새끼들. 환영 인사가 아주 따뜻하네."
태현이 타들어 간 어깨의 화상을 움켜쥐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타워의 최상층.
승강기 통로 끝에 연결된, 거대하고 육중한 티타늄 빗장이 걸린 단 하나의 문 앞이었다.
[Sector-1 Main Control Room / Ark Launch Pad]
메인 통제실이자, 비상 잠수정(방주)이 연결된 최후의 보루.
"열어."
태현의 서늘한 지시에, 유진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스터 패드를 문 옆의 패널에 연결했다.
삐빅- 철컥.
이미 시스템이 붕괴하기 시작한 터라, 문의 잠금장치는 유진의 해킹에 맥없이 풀려버렸다.
태현은 발밑에 떨어진 사병의 권총을 집어 들고 록을 푼 뒤, 문을 걷어차고 통제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움직이지 마!!"
하지만 통제실 안으로 뛰어든 태현의 발걸음은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그가 예상했던, 중무장한 경호원들이 진을 치고 있거나 권총을 든 악당들이 반항하는 뻔한 그림이 아니었다.
거대한 통제실 내부는 도서관처럼 고요했다.
한쪽 벽면은 벙커 전체의 붕괴 상황을 보여주는 수십 개의 대형 모니터들로 가득 차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검은 바닷물이 출렁이는 수조와 연결된 은빛 비상 잠수정이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 놓인 거대한 타원형 회의 테이블.
그곳에는 고급 정장을 빼입은 예닐곱 명의 남녀가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독이 든 샴페인 잔이나,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이미 관자놀이에 바람 구멍이 나 있거나, 입에 거품을 물고 의자에 기대어 숨을 거둔 상태였다.
"이게… 무슨…."
유진이 참혹한 광경에 숨을 멈췄다.
판옵티콘을 지배하던 '선각자 이사회'의 임원들. 수천 명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들던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벙커가 무너져 내리고 폭도들이 밀려 올라온다는 공포와 절망감에 휩싸여, 탈출을 포기하고 수장과 함께 집단 자살을 택한 것이다.
오직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왔나, 들개 군."
테이블의 가장 상석.
죽어있는 임원들의 시체를 양옆에 두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남자가 여유롭게 코냑 잔을 흔들고 있었다. 방금 전 스피커로 태현을 회유했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 이사회의 '수장'이었다.
수장은 피투성이가 되어 총을 겨누고 있는 태현을 보면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의 앞에는 잠수정의 기동 시스템과 연결된 작은 검은색 콘솔 가방이 열려 있었다.
"동업을 제안했는데 거절당해서 꽤 섭섭했지. 보다시피 내 겁쟁이 동료들은 수압에 짓눌려 죽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는 쪽을 택했더군. 덕분에 잠수정에 자리가 아주 널널해졌어."
수장이 코냑을 한 모금 들이마시고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너… 이 새끼…."
태현이 총구를 수장의 미간에 정조준하며 다가갔다.
"쏴라. 쏘고 싶으면."
수장이 양팔을 벌리며 태현의 총구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소름 끼치는 독사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내가 죽으면, 내 심박수 센서와 연결된 이 자폭 콘솔의 마지막 타이머가 즉시 0으로 떨어지지. 그럼 이 잠수정의 해치도 영원히 잠기고, 우리는 사이좋게 이 통제실 안에서 물고기 밥이 되는 거야."
수장의 셔츠 사이로, 심장 부근에 부착된 붉은색 LED 센서가 깜빡거리고 있었다. 데드맨 스위치(Dead Man's Switch). 자신이 죽으면 폭탄이 터지는 끔찍한 협박 장치였다.
"……."
태현의 방아쇠를 쥔 손가락이 멈칫했다.
"자, 강태현."
수장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태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무력을 쓰면 다 같이 죽는다. 이 벙커의 첫 번째 룰이자, 내가 너에게 가르쳐준 마지막 룰이지."
수장이 테이블 중앙의 죽은 시체들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새하얀 트럼프 카드 한 덱과 탄알이 한 발만 장전된 리볼버 권총 한 자루를 꺼내어 올려놓았다.
"네가 그토록 원하던 '진짜 딜러'와의 데스매치다."
수장의 두 눈이 도박사의 광기로 번들거렸다.
"판돈은 이 방주의 열쇠와 내 목숨. 너의 판돈은 네 목숨과 저 여자의 목숨. 룰은 간단해. 카드 한 장씩 뽑아 숫자가 높은 쪽이 리볼버의 방아쇠를 상대의 머리에 당긴다. 실탄이 발사되면 게임 끝. 빈 총이면 다음 카드를 뽑지."
궁극의 하이롤러 게임. 러시안룰렛과 카드 뽑기가 결합된, 순도 100%의 운과 깡을 시험하는 미친 도박판.
"이 방에 물이 차오르기까지 남은 시간은 15분. 그 안에 결판을 내지 못하면 우리는 다 같이 죽는다."
수장이 태현을 향해 턱짓을 했다.
"앉아라. 타짜. 패를 섞을 시간이다."
무너지는 심해 벙커의 꼭대기, 오직 죽음만이 기다리는 밀실에서.
체제를 붕괴시킨 밑바닥의 왕과, 체제를 창조한 절대 권력자의 마지막 단판 승부가 장막을 걷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