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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같은 만남

5부 소현의 과거 회상

by 도심 Feb 27. 2025

신은 오직 내게만 불공평하다 여긴 적도 많았다.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라게 했고 스스로 이혼을 선택해 불우한 환경을 자처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 또한 모두 신의 장난처럼 느꼈다. 어쩌면 나를 가지고 노는 게 그들이 하는 놀이가 아닐까도 생각했었다. 가끔 내게 좋은 사람이 나타나도 마음을 채 다 열기도 전에 포기하고 나를 떠났었다. 감정의 정체가 사랑이든 사랑이지 않든 사회생활도 마찬가지였고 유일하게 주변에 남아있던 사람은 봉수 단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봉수가 짓궂게 행동해도 응징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진짜 막연하게 사랑다운 사랑이 하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지만 사실은 뭔지도 잘 몰랐고 비현실적인 영화 같은 사랑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허황된 꿈이고 머릿속에서만 가지는 낭만 혹은 희망 회로의 한 줄기였다.

 

부정적인 마음을 갖고 살던 내게 소현이라는 사람이 나타난 건 신선하면서도 기분 좋은 충격이었다. 지금까지 주변에서 아주 많이 봐왔던 보편적인 여자들과는 가치관 자체가 달라 보였다. 더없이 기뻤지만 한편으론 똑같이 떠나가지 않을지 의심과 두려움도 함께 공존했다. 과거의 여자친구들과 전 와이프를 만나고 헤어지면서 생긴 두려움 때문인지 자존감도 많이 내려가 있는 상태였기에 내가 모르는 어떤 이유에서 단시간에 내가 마음에 들어서 하는 입에 발린 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또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그리 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대단한 사람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소현의 말투와 표정은 거짓을 말한다고 보기에는 어려울 만큼 진중했고 왜인지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소현이 말한 ‘삐에로 같다.’라는 말이 왠지 내게도 감정의 혼돈을 불러일으켰다. 스스로가 얼마나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쓰고 있었는지를 타인이 알아챌 정도로의 태도나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사실에 갑자기 나 자신이 안타까웠다. 사랑받고 사랑하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 일인지 알았다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같은 찰나의 내 생각을 소현도 읽었는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나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그럼에도 나 같은 망설임이 없었다. 내 눈빛에는 망설임이 가득했을 것이다. 그녀는 양손으로 내 볼을 감싸 따뜻하게 포개주었다. 마구 흔들리는 나의 눈빛을 향해 그녀의 깊고 말간 눈동자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는 듯했다. 자신감을 잃지 말라는. 그리고 나도 사랑받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그 길을 함께 가자는 메시지처럼 보였고 들렸다.


가만히 서로의 눈을 바라보다가 그녀를 다시 품에 안아보았다. 그날의 밤은 내가 살아온 어떤 밤보다 아름답고 반짝반짝 빛이 나게 느껴졌다. 하늘의 별과 달도 내가 가는 길을 축복해 주는 불꽃놀이 같았다. 생각지도 못한 이벤트로 알게 된 사람이 앞으로 살아가는데 엄청난 에너지를 북돋아 주고 심지어는 나이가 어림에도 내가 아직 해내지 못한 일들을 이미 해낸 사람처럼 느껴졌다. 누가 봐도 웃음이 가득하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그녀는 사랑을 듬뿍 받는 가정에서 자란 사람으로 보였다. 편견 없는 시각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고 주변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점은 배우고 싶었다. 나는 오히려 외부 시선을 신경 쓰느라 먼저 움츠러들고 그러다 보니 누구를 만나도 자존감이 낮아서인지 죄책감과 피해망상도 같이 따라다녔다. 남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혼자서 타인의 마음을 재단하고 숨거나 방패를 꺼내 들어 자연스럽게 나를 떠나게 했다.


나름 노력했던 방법은 상대방이 평소보다 차갑거나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면 기분이 곧 태도라고 판단해 내가 ‘돌싱’이라서 ‘역시 돌싱 만나는 게 아니었어’라고 생각한다고 상대방의 판단을 속단하고 믿어버렸다. 그리고 의심을 내가 현실이 되게 만들었다. 먼저 마음을 열 생각도 못 하고 더 굳게 잠가버렸다. 그때마다 ‘나는 마음을 열고 싶은데 상대가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라며 합리화하기 바빴다. 언제든 마음을 여는 속도보다 방패를 드는 속도가 빨랐었다. 사람을 두려워했고 상처받기 싫었음에도 사랑은 하고 싶었다. 마음을 나름대로는 충분히 열었다고 생각했지만 상대방이 느낄 땐 전혀 아니었겠다 싶었고 왜 사랑받고 사랑을 줄 줄 모른다고 말하는지 그제야 조금은 이해가 됐다.


나는 그동안 현실에 없는 낭만적인 사랑을 꿈꿨다. 내가 원한 사랑은 부모와도 같은 맹목적인 사랑이다. 내가 무슨 행태를 취하더라도 절대적인 지지자가 되어주고 원하는 모든 것을 이해해 주고 먼저 알아주기를 바랐다. 말이 안 되는 욕심이었다. 이건 신이 아니라 신의 할아버지가 오셔도 해줄 수 없는 사랑이었다. 하다못해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형제, 자매 사이에도 지켜야 할 선이 존재하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타인이 마음을 모두 이해하고 헤아려주며 감싸 안고 사랑해 주길 바라는 건 현실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그동안에는 생각지도 못하고 세상에 없는 것을 찾으려 했던 것일까?


나는 과거 장작 같은 사랑을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모든 것을 해주려 노력했다. 사소한 모든 걸 챙기고 섬세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열심히 다니던 직장도 상대방 스케줄에 맞추어 그만두거나 연차를 내고 쉬며 개인 생활을 전혀 영위하지 않았다. 남는 시간은 모두 상대방의 시간에 녹여냈다. 그래야 날 바라봐주고 떠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러다 보면 어느샌가 몸이 타서 한 줌의 재가 되어있다는 사실조차 끝날 때까지 자각하지 못하기 일쑤였다. 사랑이 끝나면 다 타버린 하얀 재만 마음에 남았고 손에 쥘 수도 없는 처참한 상태가 되었다. 상대방의 모든 것에 맞추는 일은 초반에는 분명히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그만큼 상대에게 집중하고 애정을 쏟아붓고 있다는 증거니까. 하지만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장작으로 시작한 건 좋으나 재가 되기 전에 화력 조절을 통해 숯으로 변해야 했다. 그래야 은은한 온기로 상대가 필요할 때 내어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봉수와 그의 여자 친구는 그런 사랑을 하고 있었다고 느꼈다. 뜨겁지 않아도 필요할 때 찾으면 언제나 곁에서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는 그것이 믿음이고 사랑이었다.

  

내가 소현의 존재를 통해 많은 걸 짧은 시간 안에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그럼에도 만난 시간이 물리적으로 짧아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도 필요했다. 사람이 가진 정육면체 중에 이제 겨우 한 면 혹은 두 면을 보았다. 그래서 박소현이라는 사람이 더 궁금했다. 아직 내게 말해주지 않은 다른 면들의 생김새가 궁금했다. 먼저 내 2/3 정도의 정보를 오픈했다. 나머지는 개인적인 취향이라거나 취미 혹은 개인적인 선호도와 가정사 정도만 남았었다. 처음 만나서 가정사까지 말하는 건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고 이미 돌싱이라는 사실을 오픈했었기에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천천히 알아가고 싶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대체 어떻게 살아왔기에 내게 힘이 되는 말들을 해줄 수 있었던 건지. 모두 궁금해졌다. 항상 웃으며 상대를 배려하는 모습과 활발하진 않지만 조용조용하게 할 말을 모두 하는 그녀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녀는 조수석에 등을 기대고 정면을 응시하며 한숨을 깊게 한번 내쉬고는 자신이 살아왔던 과거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놀랐다. 부모님에게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살았을 거라 판단했던 내 생각부터 틀렸다. 내 맘대로 생각하며 속단하기를 여기서도 또 멈추지 못했다. 그녀는 친부모님의 얼굴조차 모른다고 했다. 기억이 나던 어린 시절엔 지방의 한 보육원에서 또래 아이들과 지냈다고 했다. 다행히도 좋은 선생님들과 좋은 어른들과 착한 친구들이 있어서 엇나가지 않고 성장할 수 있었다고 했다. 당연히 힘든 날도 많았고 부모를 원망하기도 했고 때론 포기하고 싶었던 적도 많았다고 했다. 특히 학교 다닐 때 부모가 없다는 이유로 친구들의 따돌림이 심했고 학교를 그만둘 생각도 했었지만 그때마다 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보육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고 했다. 그녀에게는 친엄마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라며 웃었다. 소현이 아주 어릴 때부터 울거나 떼를 쓰면 달래주고 친구들과 다퉈도 먼저 와서 달래주고 마음이 어땠는지 세심하고 다정하게 물어주고 학교 다닐 때도 돌아오면 제일 먼저 마중 나와 웃으며 하루가 어땠는지 마음이 어땠는지 그저 들어주는 선생님이셨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 어떤 판단도 대신 내려주거나 조언도 하지 않으셨고 다 들어보고 소현이 어떻게 하고 싶은지를 묻고 하려고 하는 행동에 무조건적인 지지를 해주었다고 하셨다. 그래서 괴롭히는 친구들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도 선생님에게 말하고 나면 마음이 풀어져서 그럴 생각조차 없어져버리고 아무리 괴로운 일이 있어도 저녁에 만날 완전한 내 편을 떠올리며 힘을 냈다고 했다.


선생님에 대해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하던 소현의 표정이 천천히 굳었다. 한숨을 한번 더 내쉬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는 채근하지 않고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보육원에서 자라 20세가 되면 독립을 해야만 했기에 처음에는 사회에 혼자 던져지는 게 두려웠다고 했다. 선생님도 매우 아쉬워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생 못 보는 건 아니고 연락은 주고받을 수 있으니 괜찮다고 안아주시며 안심시켜 주셨고 보육원을 나와 전문대학교를 다니며 아르바이르를 하고 작은 원룸을 얻어 바쁘게 생활했다고 했다. 처음 독립해서는 매일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보육원에서 있던 것처럼 똑같이 하루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는데 워낙 학교생활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다 보니 일상에 지쳐 하루 건너 하루가 되기도 하고 2~3일에 한 번씩 하던 게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힘들 때 언제든 전화를 걸어도 똑같이 밝은 목소리로 받아주던 선생님이 너무 소중했고 감사했다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일상에 치여 바쁘게 살아오던 때에 선생님은 소현이 독립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암이라는 큰 병을 얻었다고 했다. 손쓰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위암 4기의 환자셨다고 했다. 병원에 입원해 치료받으시면서도 그녀가 속상해할까 전혀 티 내지 않으시고 전화가 올 때면 너무 기쁜 목소리로 항상 전화를 받아주던 선생님의 목소리는 환자임을 전혀 알 수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마지막 통화하던 그날은 숨소리가 거친 탓에 처음에는 힘든 일을 하시고 계신 줄 알았었는데 병원에서 마지막을 준비하고 계시던 때였다고 했다. 자신이 곧 세상을 떠날 걸 알면서도 혹시 걸려올지 모를 그녀의 전화를 받아주려 기다리셨던 것이다. 소현은 그날에서야 선생님의 투병 소식을 들었고 바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갔을 때는 자신이 알던 선생님의 모습이 아니었다고 한다. 털모자를 쓰고 병상에 누워 뼈밖에 남지 않은 앙상한 모습에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고 했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울고 있는 소현의 손을 양손으로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웃으며 마지막 한마디를 해주셨다고 했다.

     

“소현아, 너는 내 딸보다도 소중한 아이였어.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고 소현이가 말해주는 매일의 일상을 듣는 일이 나에게는 너무 소중했어. 선생님의 딸로 살아줘서 고마웠고 앞으로도 예쁜 그 마음 변치 말고 내 사랑을 받은 너는 누구에게든 사랑을 전할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되길 바랄게. 하늘에서도 선생님은 소현이가 해주는 매일의 기도를 들을 거야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 말고 꼭 소현이가 사랑해주고 사랑받을 수 있는 가정을 꾸려서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길 바라. 우리 소현이 덕에 잠시나마 엄마가 될 수 있어서 정말 너무 기뻤어. 그래서 지금도 진심으로 행복해”


마지막 말을 끝으로 선생님은 웃는 표정 그대로 그녀의 손을 잡고 영면에 드셨다고 했다. 그녀의 두 뺨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선생님이 아프신 것도 까맣게 몰랐던 자신이 미웠다고 했다. 세상에 태어나 친부모님이 아니어도 키워주신 엄마 같은 사람에게 넘치는 사랑을 받았음에도 정작 선생님의 마음이나 몸은 어떤지 물어본 적이 없던 자신을 원망했다고 했다. 나는 가만히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 토닥여주었다. 무슨 말을 해주기보다 그저 들어주고 온기를 나누는 일이 어떠한 위로의 말보다 힘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던 소현이 팔에 눈물을 닦으며 다시 나를 바라보곤 울음이 섞인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하기로 했어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저도 사랑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야 선생님의 마지막 말씀처럼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게 가능해진다고 믿어요.”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다시 한번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세상 가장 불행한 사람인 줄 알았던 마음이 창피해졌다. 지금 여기 나보다 육체적으로 약한 존재도 저렇게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멋진 사람이 되었는데 나는 내 불행에만 집중했고 사랑을 받을 생각만 했었던 과거를 반성했다. 그녀와 나는 그날부터 자연스레 연인이 되었다. 누가 먼저 형식적으로 ‘사귀자’라는 말로 고백하지 않았어도 서운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좀 더 깊게 알아가기 위해선 더 가까워져야 한다는 그녀의 말이 있었을 뿐이다.


이제 드디어 나보다 약하지만 강한 그녀의 말을 따르며 은은한 온기를 가진 숯이 되기 위한 위대한 여정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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