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
은은한 온기를 가진 숯이 되어가는 여정은 마음의 고향을 찾아가는 기분이었다.
언제 어디서 떠나왔는지 모르는 꿈속의 고향. 그곳엔 언제나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고 땅에는 온통 초록초록한 들판과 노랗고 파랗고 빨간 꽃들이 무성하게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지상낙원이었다. 내가 원하는 맹목적인 사랑은 오직 그곳에만 존재했다. 그래서 그렇게 환상이 만들어 놓은 낙원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그토록 찾아 헤맸나 보다. 환상 속에만 있는 낙원이 현실에 있을 거라 믿지 않았고 내가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은 더 몰랐다.
소현이와 만남 이후 나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부터 조금씩 변했다. 30년 가까이 살아온 습관이 하루아침에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의식적으로라도 그녀가 갖고 있는 사람을 보는 시각과 태도에 대해서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들판에 피어난 꽃들처럼 만연하고도 무성한 편견과 색안경을 낀 시각들이 존재한다. 겉으로 티를 내지 않을 뿐이고 진짜 편견이 없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유도 간단명료하다. 살면서 내게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세상의 흐름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나도 내가 이혼이란 걸 할 줄 몰랐고 아버지조차도 내가 이혼할 줄 몰랐을 거다. 남들처럼 평범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살고 평범한 직장을 다니며 평범한 여자를 만나 결혼해 아이를 낳아 키우고 아이가 크면 가졌던 모든 것을 상속한 후 땅으로 돌아가는 일. 그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믿었었다. 큰 틀에서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상세내용은 제각각 다르고 언제라도 누군가에 의해서든 어떤 사건에 의해서든 변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내가 이혼을 경험했음에도 이혼한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생기는 건 옛 속담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라는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소현이 더 대단해 보이고 멋져 보였다. 어떨 때는 후광이 비추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녀는 내게 무엇도 바라지 않았다. 마음이 가는 대로 표현하고 행동하고 말하며 솔직한 감정들을 꺼내 보였다. 그럴 때면 만족한다는 듯이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반달 같은 눈 모양으로 내게 미소 지어주었다. 나는 그녀의 웃음을 좋아했고 꼭 지켜주고 싶었다. 나름대로 곧 잘 흡수해 가며 배우고 있었다. 누구를 만나든 맞춰가는 것에 익숙했고 그렇게 해야만 마음이 편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이건 변하지 않았다. 그 덕에 소현의 장점들도 빠르게 흡수해 갈 수 있었다. 함께한 시간들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처음에는 잘 보지 못했었는데 소현은 처음에 내게 입과 눈의 표정이 다르다고 이야기했었다. 마치 삐에로 같다며 슬퍼 보인다고 했었다. 시간이 지나고 자세히 보니 그런 모습을 소현도 가지고 있었다. 내게 들키고 싶어 하는 건지 들키기 싫어서 의도적으로 감추는 건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가끔 떠오르는 선생님에 대한 기억들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지 않을까 추측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나를 향해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이 슬퍼 보였다. 꽤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며 지켜봤는데 어떤 날은 정말 많이 힘들어 보였다. 그녀는 일부러 내게 웃어 보이려는 듯이 입꼬리의 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걸 목격했다. 그때 알았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나를 위해 웃음 짓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그녀의 진짜 웃음을 꼭 지키고 싶었고 나를 위해서도 지켜야만 했다.
“소현아 나 할 말이 있어”
“응? 뭔데”
“네가 나를 지키고 싶어 하듯 나도 널 지키고 싶은데 왜 날 밀어내려 해?”
“내가? 오빠를? 밀어냈다고?”
“응 시간이 갈수록 너와 나는 반대가 되어있어 우리는 함께인데 혼자 다 참아내려고 하지 마.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울고 싶으면 펑펑 울고, 투정 부리고 싶으면 투정 부려도 돼. 그렇게까지 입술을 꽉 깨물어가며 참는 건 내가 너고 너는 선생님인 거야? 그러면 안 되잖아.”
내 말을 들은 그녀는 생각지 못했던 말이었는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흘렸다. 그간 나를 위해 참아왔던 그녀만의 아픔이 투명한 눈물로 녹아내렸다. 조용히 그녀의 곁을 지켜주었다. 내 목을 껴안고 한참을 울던 소현은 그제야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티 안 내고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티가 났다면 미안해. 사실 오늘이 선생님의 기일이야. 며칠 전부터 오늘이 다가오니 계속 그날의 일이 떠올라서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어.”
“그게 나한테 미안할 일이야?”
“그럼! 나는 힘들어하던 오빠를 위로하고 싶었고 그래서 사랑했고 나도 사랑받았는데 이상하게 이 날만 되면 마음이 내 통제력을 벗어나는 거 같아”
“소현아 우리는 서로 완벽하지 못한 존재야. 그래서 상호 보완이 필요해. 근데 너는 나에게 해주려고만 하잖아.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 우리는 서로에게 공평히 마음을 표현해야 할 권리가 있어”
씩씩하고 어른 같기만 했던 그녀에게도 서툰 면이 있었다. 내가 마음에서 우러난 조언을 해줄 수 있었던 건 실패라고만 생각했던 아픈 과거들이 한 줌의 하얀 재가 되어 날아가버렸을 줄 알았던 기억 조각들에서 과거의 내 모습을 그녀가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과거의 나처럼 그리고 선생님처럼 활활 타는 장작이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장작의 결말은 타버리고 나면 재가 되어버려 한쪽만 남게 되고 남은 한쪽은 까맣게 그을린 채 상처 입고 다시 장작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면서도 치유를 바라며 이곳저곳을 헤매게 된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공감’의 분야는 생각보다 방대하고 넓은 분야이고 실생활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공감의 단어는 바로 ‘마음’이었다. 상대방이 누구든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 생기거나 반대로 기분이 좋은 일이 생기더라도 ‘지금 기분이 어때?’라고 묻는 것보다 ‘요즘 마음이 어때?’ 혹은 ‘지금 마음이 어때?’라고 묻는 게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 질문을 들으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기분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자신의 기분을 마음으로 자각하게 만들며 생각하게 한다. 효과는 생각보다 강력하다. 나는 그녀를 만날 때마다 마음을 묻기로 했다. 질문으로서 돌아오는 답변도 있지만 그 질문은 나 자신에게도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녀의 마음을 묻고 답변이 되돌아오는 시간에 내가 그녀를 지켜보면서 느끼는 마음의 모양이 어떤지 느낄 수 있다. 그녀는 기분이 좋을 때나 선생님의 생각으로 기분이 좋지 않을 때도 나의 ‘마음’ 질문을 들으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단순히 어떤 단어를 선택해서 답변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마음의 상태가 어떤지 자각하고 느껴보고 적절한 단어를 선택해 내게 전해주었다.
내 마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을 묻는 자체가 재밌었고 흥미로웠고 행복했다. 비슷한 답변을 들어도 매일 새로웠다. 그런 날들이 점점 쌓이자 날 위해 웃어주기만 하고 위로해 주려 하고 자신의 마음을 돌보고 털어놓는 일이 거의 없던 그녀는 어느새 나만 만나면 재잘대는 아기새가 되어있었다. 장거리 연애 특성상 자주 만나지 못하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만나곤 했는데 항상 만날 때면 먼저 알아보고 달려와 두 팔을 벌려 꽉 안아주었다. 환영 인사가 끝나고 나면 평소에 메시지로도 말하고 통화를 하면서도 말했었음에도 묻지 않아도 일상과 마음을 모두 말해주었다. 그중에는 이런 것까지 말해도 되나 싶을 정도의 여자들 사회에서만 말할 수 있는 것들도 말했다. 말을 끝낸 뒤에는 항상 잊지 않고 내 마음에 대해서도 물어주었다. 그녀는 나만의 방청객이었다. 반응이 너무나 뜨거웠다.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보기에도 민망해 보일 정도로 리액션이 조금은 과했다. 그래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당하고 귀여운 모습에 나는 그녀와 있을 때면 항상 웃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처음 봤을 때 보다 더 밝고 씩씩한 숙녀가 되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거의 없었다. 조금만 더 알았다가는 조선시대 족보까지 모두 외울 기세였다. 서로의 마음에 대해서 가감 없이 표현하는 나도 좋았고 그녀도 좋았다. 하루는 봉수네와 같이 펜션에 놀러 갔던 날에 술에 취한 봉수가 내 과거 여자 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가슴이 철렁했다. 다빈이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제수씨~ 얘가요 제수씨 만나기 전에 다빈이라고 얼마나 그렇게 술만 마시면 찾아댔는지 몰라요~”
“그래요? 그 언니는 예뻤어요?”
“에이 예뻐봤자 제수씨보다 안 예쁘죠~”
“근데 왜 술만 마시면 찾았대요?”
“아~ 그게~”
정말 다행히도 그 뒤의 말은 봉수의 여자 친구가 손에 들고 있던 김치전을 봉수의 입속으로 밀어 넣으며 어색한 웃음과 함께 무마되었다. 그녀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었어도 과거의 연애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해본 적은 없었고 그녀도 마찬가지로 과거 연애사에 대해서는 묻지도 먼저 말하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봉수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내게 미사일이 되어 날아들었다. 그날 밤 커플들끼리 서로의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을 때 그녀는 잔뜩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내 쪽으로 돌아누워 질문했다.
“오빠 그래서 그 언니는 왜 그렇게 찾았어?”
“어..? 어? 나도 잘 몰라.. 술에 취해서 그런 거니까~”
대충 둘러대려는 내게 그녀는 유도신문을 해왔다. 여태까지 말 안 한 비밀이 없다며 자신도 과거에 대해 물어보면 얘기해 준다고 하면서 회유하기 시작했다. 계속 술에 취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해도 취중진담이 진심이지 않냐며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물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모두 다 얘기했다. 다빈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헤어지고 나서도 잘 맞았던 속궁합 때문에 술에 취하면 봉수에게 다빈이의 얘기를 꺼냈었다고 숨김없이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녀는 내 오른팔을 베고 누워 가만히 내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미소를 보이던 입가는 무표정으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말이 끝나자마자 등을 홱 돌리더니 몸을 잔뜩 웅크리고 삐져있었다.
“소현아 왜 그래 삐졌어?”
“조금 그렇네”
“왜 뭐가?”
“다 좋은데 속궁합 때문이라니”
“에이 다 과거일 뿐인데 왜 그래”
그녀가 그렇게 토라진 모습을 보여준 건 처음이었다. 살짝 장난식으로 삐진 척을 한 적은 있어도 이렇게 진심을 담아 토라진 걸 보면 질투심이 불타올랐나 보다 싶었다. 하긴 여태까지 이성 관계에 대해서 문제를 일으키거나 한 적 자체가 없었으니 모르기도 했지만 예전에 유행하던 깻잎 논쟁에 대해서도 그녀는 완전한 반대파이긴 했었다. 나는 잔뜩 토라진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아 보기도 하고 뒤에서 꼭 안으며 회유를 시도해봤지만 먹히지 않았다. 마음을 물어보아도 됐다며 내 손을 뿌리치기만 했다. 몇 번의 시도에도 꿈쩍 않는 그녀를 잠시 가만히 두었다. 시간을 좀 두고 다시 달래주려 했다. 그런데 잠시 후 등을 돌린 쪽에서 코를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돌아보니 그녀는 눈물을 베개에 잔뜩 적시고 있었다. 즉시 그녀의 앞쪽으로 넘어가 품에 꼭 안아주자 서러웠던 마음이 폭발한 듯 엉엉 소리 내어 오열했다. 그러면서 말하는 그녀의 말은 내게는 마냥 귀엽게만 느껴졌다.
“으앙.. 그러면 나 만나서 나랑 관계할 때도 그 언니 생각하고 그랬을 수도 있다는 거잖아 내가 오빠를 만족시키지 못해서 그런 얘기가 나왔던 거잖아 그게 너무 속상해!!”
“아니야 소현아 오해야 진짜! 내가 봉수랑 얘기한 건 널 만나기 훨씬 전 얘기야 최근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그녀는 서럽게 울고 있었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또 어른인 척하더니 질투하고 심지어는 자신이 전 여자 친구보다 못한다고 생각해서 자존심이 상해서 운다니 너무 귀여웠다. 내 말을 들은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고는 진짜냐고 물었고 나도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울음을 그쳤다. 그녀는 자세하게 알지 못하고 속상함에 눈물을 보였던 게 부끄러웠는지 도무지 내 쪽으로 돌아눕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 밤은 그녀의 의지에 따라 등 뒤에서 꼭 안고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잠에 들었다.
아침이 밝고 소현은 여전히 잠에 들어있었다. 거실에 나와보니 봉수와 봉수의 여자 친구가 컵라면을 먹고 있었는데 봉수의 여자 친구는 어제 울음소리를 들었다며 무슨 일 있었냐며 걱정 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별일 아니라고 말하고 봉수의 곁으로 다가가 신중하게 젓가락으로 면을 집어 올려 한입에 넣으려는 봉수의 뒤통수를 한 대 갈겼다. 봉수는 당황스럽다는 듯 그대로 멈춰버리고 나와 봉수의 여자 친구는 웃음을 터트리며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고 봉수는 무릎 꿇는 시늉 하며 죽을죄를 지었다고 싹싹 빌었다. 그렇게 셋이 깔깔대며 웃는 사이 울다가 잠에 들었던 소현은 눈이 퉁퉁 부어서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한 채로 거실로 걸어 나오더니 내 품에 쏙 안겼다. 봉수네 커플은 누가 봐도 ‘좋을 때다’라는 표정을 지으며 음흉하게 웃었고 다사다난했던 펜션에서의 하룻밤은 끝이 났다.
어느덧 계절이 한 바퀴 돌아 다시 무더운 여름이 돌아오고 소현과 나는 처음 만났던 들깨삼계탕 가게에서 보양식을 먹고 있었다. 열심히 눈앞의 삼계탕을 짐승처럼 물어뜯고 있을 때 소현이 엄청난 말을 아무렇지도 않은 무표정으로 내게 꺼냈다.
“오빠 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
“.... 뭐?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