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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헤어졌던 순간에는... 34화

약간 피폐한 로맨스

by 맑고 투명한 날


난 언제나 우유부단했다.


어떤 상황이 내게 닥쳤을 때.

난 그걸 바로 해결하지 못했다.


언제나 빙빙 둘러가며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좋은 밥법이 있는 게 아닌가 따져보았다.


나도 이런 게 얼마나 답답한지 잘 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난 어떤 결정이든 곧바로 내리지 못했다.


그런데 지소영은 달랐다.


지소영이 살아온 28년.

그 대부분의 인생을 함께한 가장 친한 친구인

김미숙을 단숨에 내친 것이다.


그것도 내 한마디에...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못하지...


지소영처럼 오래된 친구도 없지만 있다 해도

분명 난 다른 이유를 찾으며

오래된 친구를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2년 정도 만난 지소영.


그녀는 언제나 내 기억 속에서 무색무취한 존재였는데.

오늘 보니 난 소영이를 완전히 잘못 보았던 거였다.


구름 속에서 천둥이 치고

번개가 지상에 내리 꽂히듯

난 지소영과 침대 위에서 폭풍처럼 뒹굴었다.


그리고 또 정적이 찾아왔다.


이젠 진짜

더 이상 우릴 불태울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크르르렁... 크러러렁..."


말없이 내 품에 안겨 있던 그녀는

결국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나도 점점 의식이 흐려진다.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


자욱한 안개...


왜 내 주변이 항상 이런 자욱한 안개가 껴 있는지 모르겠다.


난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앞으로 나아갔다.


도달한 곳은 아주 익숙한 내 방문 앞이었고.

난 방문의 문고리 앞에 서 있었다.


끼이이익...


난 천천히 그걸 돌려 문을 열었다.


자욱한 안개 너머로 보이는 소파에는 아버지와 엄마가 마주 보고 앉고.

놀랍게도 작은 엄마가 아버지 옆에 함께 앉아 있었다.


"넌 방에나 있지 왜 기어 나왔어! 짜증 나게!!!"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크게 소리 질렀다.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고.

난 그냥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엄마에게 나란 존재는

이 세상에 절대 존재해선 안 되는

그야말로 불필요한 잉여 인간이었으니까.


"왜 자꾸 애한테 소리를 지르고 그래!"

"그냥 다 뒈져 버렸으면 좋겠어. 그냥 다...!!!"


아버지의 말에 엄마는 몸서리를 치며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성근아 이리 와... 앉아."


그러나 작은 엄마는 언제나 나에게 상냥했다.

그에 반해 엄마는 나에게 항상 인상을 쓰고 소리를 질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날 물리적으로 때리거나 괴롭히지 않았다는 것 정도...


반대로 작은 엄마는 항상 날 미소로 대했다.

그래서 난 작은 엄마에 대한 반감이 거의 없었다.


원래라면 아버지에게 생긴 새 여자라는 이유로 경멸했어야 했지만.

경멸의 대상은 작은 엄마가 아니라 언제나 내 친엄마였다.


난 말없이 소파로 가 작은 엄마 옆에 천천히 앉았다.


"이 미친 새끼가... 지 어미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어딜 거길 앉아. 앉기는..."


엄마는 내가 엄마 옆에 당연히 앉을 거라 생각한 거 같았다.


하지만 내가 왜 그래야 하나?


엄마는 날 철저하게 부정하는데.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네가 행동하니까... 성근이가 싫어하지."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더니... 아주 쌍으로 그냥..."


아버지 말에 엄마는 더욱 날이 서 있었다.


그런데 왜 작은 엄마가 왜 우리 집에 와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린 일이 있었나?

잘 모르겠다.


내 기억이 부서져 철저하게 파편으로 나누어진 것 같다.

그러지 않다면 내가 이런 결정적인 일을 기억하지 못하진 않았을 테니까.


"언니... 그만 화 풀어요. 우리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이젠 이런 상황에 대해 인정할 때도 되지 않았어요." "이 미친년 보게... 애도 하나 제대로 못 낳는 주제에 어디서 그딴 막말이야. 망발은!"


난 바로 옆에서 작은 엄마의 미소 띤 얼굴이 급격하게 무너져 내리는 걸 바라보았다.


"야! 사실 너 때문에 민정이가 애를 못 낳게 된 거잖아."

"왜 그게 내 탓이야. 다 멍청한 저 년 탓이지."

"뭐라고? 하 정말... 말하는 모양새 봐라. 최국천!!! 너의 그 배다른 오빠가 중국에서 약을 구해 온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 오빠에게 직접 물어야지."


도대체 아버지와 엄마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작은 엄마가 애를 낳지 못하게 된 이유라는 게...

엄마의 배다른 오빠라는 사람이

중국에서 약을 구해와서 작은 엄마에게 먹였다는 말인가?


작은 엄마는 고개를 푹 숙이고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난 얼른 티슈를 꺼내 작은 엄마에게 건넸다.


"내가 그랬다는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왜 생사람을 잡고 난리야!"

"내가 다 알아봤어. 어디서 허튼소리만 하는 거야. 민정이가 병원에서 검사한 거야. 이래도 거짓말할래?"

"난... 모... 몰라. 모른다고... 애 하나 제대로 낳지도 못하는 년 하고 붙어먹더니... 이젠 자기 마누라한테... 억울한 누명을... 마... 막 씌우네."


엄마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난 알 수 있었다.

엄마는 거짓말을 할 때 조금씩 말을 더듬는 습관이 있었다.


나도 그런 엄마를 닮았는지

조금만 억울하거나 흥분을 하면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민정이는 너의 그 더러운 짓거리를 다 알면서도... 참았어. 나 같았으면 가만 안 뒀을 텐데 말이야."

"어디서 저년 역정을 들어. 역정을 들기는... 넌 내 남편이야. 애도 하나 제대로 못 낳는 저 미친년이 아니라. 알아?!!"

"으이구..."


아버지는 엄마가 답답했는지 고개를 돌렸다.


"언니. 그래도 우린 예전에 친했잖아요. 그러니 그냥 내게 사과해요. 그러면 나도 그냥 없던 일로 할게요."



작은 엄마가 아주 차분하게 말했다.

차분해도 너무 차분했다.


하지만 난 잘 안다.

작은 엄마는 지금 엄청난 분노를 속으로 삭이고 있다는 걸.


"이 미친년아. 내가 왜 너한테 사과를 해.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멀쩡한 남의 남편을 가로챈 너 같은 창녀 년이지!!!"

"언니. 그만해!!!"


작은 엄마는 엄마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얼마나 크게 소리쳤는지 거실에 있는 모두가 깜짝 놀랐다.


"내가 맨날 웃고 다니니까. 언니는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어?"

"이 년이 진짜... 미쳤나? 오늘따라 왜 이래?"


엄마는 작은 엄마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지 엄청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엄마의 모습이 작은 엄마를 더 극심하게 자극하고 있는 거 같았다.


"언니, 오빠 만나기 전에... 이 남자 저 남자 막 만났다가... 결국 수도 없이 낙태한 거..."

"야! 이 미친년아. 애도 있는 자리에서 왜 그딴 말을 해!!!"

"아악!!!"


갑자기 엄마가 벌떡 일어서서 작은 엄마의 머리채를 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가뜩이나 몸도 엄마보다 작은데 머리채를 잡힌 작은 엄마는

엄마가 머리채를 잡고 이리저리 흔들 때마다 몸도 함께 크게 휘청거렸다.


"그만해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 머리채를 잡고 있는 엄마를 향해 소리쳤다.


머리채를 잡힌 작은 엄마도

엄마도... 아버지도

모두가 나의 모습에 놀라 멈춰 있었다.


"내가 엄마 편을 들고 싶어도... 이러니까 들지 못하는 겁니다... 작은 엄마 인생을 망친 책임은 아버지도 있지만.. 엄마도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해요."

"너... 너..."

"작은 엄마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래요? 어서 이 손 놔요!!!"

"어어..."


난 얼른 작은 엄마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엄마의 손을 우악스럽게 걷어냈다.

엄마는 그런 내 행동에 놀랐는지 아무 말 없이 소파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엄마 괜찮아요?"

"응. 괜찮아."


난 작은 엄마를 그냥 엄마라 불렀다.


작은 탁자 맞은편에 앉은 친엄마 대신.

엄밀히 말하면 아빠와 바람을 피우고 있는 불륜녀에게 엄마라고 부른 것이다.


"흠흠흠..."


아버지는 거친 헛기침만 계속 내뱉었다.


사실 이 상황에서 가장 나쁜 사람은 엄마가 아니다.

바로 아버지지.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남들 인생이야 어찌 되건 말건...

아니지 남도 아니잖아.

한 명은 법적 부인이고

다른 한 명은 원치 않는 불륜녀가 되어버린 불쌍한 여인들.


"아버지가 제일 나빠요!!!"


나도 모르게 아버지를 향해 소리쳤다.


"아니... 이 새끼가..."

"왜 두 여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계속 상처만 주나요. 그냥 한 명만 선택해요. 다른 엄마가 더 큰 상처를 받기 전에요."

"야... 야.... 너... 이 새끼가... 아버지한테 못하는 말이 없네..."

"아버지면 아버지답게 굴어요. 주위를 봐요. 두 엄마 모두 상처받고 슬퍼하잖아요."

"이... 이..."


아버지는 나를 때리려 들었던 손을 내게 붙잡혔다.

어라 그런데 지금의 난 어린 아이가 아니라 성인이었다.


난 항상 부모님과 같이 살던 집에서는 어린아이였는데...

이상한 일이다.


"이 녀석이... 크더니 아버지를... 흠흠흠..."


성인이 된 내 힘에 밀려서 그런 건지.

아버지는 그냥 소파에 주저앉아

더 이상 내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왜 혼자의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은 철저하게 짓밟냐고요. 아버지는 나빠요. 아버지가 제일 나쁘다고요. 그냥 한 명만 선택해요. 아버지가 결정을 내리지 못할 때마다 두 엄마 모두가 다 힘들다고요. 제발 좀 정신 좀 차리세요. 제발요!!!"


난 울부짖었다.


엄마도 작은 엄마도 사실 모두 피해자다.


깊은 상처를 주는 사람은...

바로 그 잘나 빠진 나의 아버지다.


"난 절대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처럼 주위 사람을 힘들게 하지 않을 거라고요. 아버지는 자신이 잘 났다고 생각하겠지만. 전혀요. 아버지는 패배자고 결정 장애가 심한 그저 그런 못난이라고요. 알아요!!!"

"..."


왜 내가 이렇게까지 아버지를 향해 막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온통 사방이 짙은 안개다.


안개...

안개...

짙은 안개...


모두가 그 짙은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


난 급히 눈을 떴다.


자면서 눈물이 얼마나 흘렀는지 눈 주변이 축축하다.


얼른 소영이의 상태를 살폈다.

지소영은 계속 깊은 잠을 잔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난 그런 지소영을 보며 다짐했다.


나로 인해 불행해지는 사람은 절대 생겨선 안된다고...


사랑스러운 얼굴로 잠을 자는 지소영.

난 깊은 잠에 빠진 지소영의 머리카락을 계속해서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넌 내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직접 보여주었지. 나도 너처럼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줄게.'


난 그런 다짐을 하며 다시 잠을 청했다.





35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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