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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헤어졌던 순간에는... 35화

약간 피폐한 로맨스

by 맑고 투명한 날


“으음...”


눈을 뜨니 지소영이 미니 화장대에 앉아 화장하는 모습이 보였다.


“일어났어?”

“으... 응... 아차!!!”


나도 모르게 시계부터 찾았다.

하지만 여긴 지소영의 원룸.

당황해서 그런지 시계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갑자기 왜 그래?”

“지... 지금 몇 시야? 몇 시냐고?”


지소영은 내가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아는 것 같았다.


“여깄어.”


지소영이 내민 건 내 핸드폰이었다.

난 얼른 지금 시간을 보았다.


화요일.

오전 8시 57분...


“이런 젠장... 이건 완전 지각이잖아. 아니야. 이건 지각도 아니라고... 이러다 회사에서 쫓겨나는 거 아냐...”


나도 모르게 내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평일 오전 9시가 다 된 시간...

절대 출근 시간을 맞출 수 없다.


“오빠, 회사에서 일주일 동안 무급 휴가라며?!!”

“응? 아... 맞다... 그렇지...”


난 안심했다.

다시 침대로 벌렁 누웠다.


‘그런데 잠깐만... 왜 내 핸드폰을 소영이가...’


난 얼른 상체를 일으켜 소영이를 바라보았다.


“오빠는 생각이 전혀 안나나 보네.”

“생각이 안 난다고?”

“새벽 6시도 안 되었을 때, 갑자기 벌떡 일어나 이빨을 닦는다고 그렇게 난리를 피워 놓고도... 그게 전혀 생각 안 나는 거야?”

“내가 그랬다고...”


지소영은 침대로 와 걸터앉았다.


“내게 오빠 핸드폰을 보여주면서, 이젠 일어나서 출근해야 한다고 그랬잖아.”

“내... 내가?”


난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내가 아니라고. 더 자라고 말했더니... 야수처럼 날... 또... 눕혀서는... 큭큭큭...”

“내가... 그랬다고?”

“오빤 힘도 좋아... 그렇게 좋아하면서 여태 어떻게 참은 거야?”

“아닌데...”

“아니긴... 그동안 너무 참아서 엄청 쌓여 있었나 봐. 그래서 그냥 그걸 다 나한테 풀어낸 거고...”

“...그... 그런가...”


기억이 나지 않으니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허리가 몹시 아팠다.


몸이 이런 걸 보니 지소영의 말은 전부 사실인 거 같았다.

내가 허리를 만지자 지소영이 그걸 보며 킥킥 거렸다.


“큭큭큭... 오빠도 오빠지만 나도 어제부터 오늘까지 계속 시달렸더니... 몸살이 심하게 난 거 같아.”

“... 미... 미안해...”

“미안하긴... 그래도 오빠가 엄청 건강한 거니까. 다행이지. 킥킥킥.”


지소영은 내 반응이 재밌다는 듯 킥킥거리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또다시 지소영이 바른 화장품 향기가 내 코를 강하게 자극했다.


“오빤, 짐승이야... 아니면 야수라고 해야 하나?”

“그게 싫어?”

“싫긴. 그런데 내가 버티지 못할 정도로 하면 안 되는 거 알지?”

“그래.”

“싫다는 건 아닌데. 적당히... 아주 적당히 하자고.”


그 말과 동시에 지소영은 날 강하게 안았다.

나도 모르게 화장품 향기에 반응했다.


하지만 몸이 이상했다.

이건 확실히 몸에 무리가 가는 게 느껴졌다.


“우리 소영이가 오랜 친구인 미숙이를 단칼에 처리했듯... 나도 내 주변을 좀 깔끔하게 정리해야겠는데...”

“왜 일어나...?”


내가 침대에서 일어서자 지소영은 많이 아쉬워했다.


“나랑 이런 시간은 앞으로도 엄청 많이 갖게 될 테니까... 좀 쉬어!”

“오빤 괜찮아?”

“나도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게 있으니까.”

“그래. 그럼 난 하루 종일 좀 쉬어야겠어. 온몸이 너무 땅겨. 오빠 때문에 근육통이 생겼나? 큭큭큭... 등이고 허벅지고 너무 당겨서...”


난 지소영 이마에 키스를 해주었다.


“키스할 거면 입술에 하지.”

“다녀와서 아주 찐하게 해줄게.”

“그럼 알았어.”


난 욕실로 들어가 몸을 닦았다.


평소 회사를 다니며

단, 한 번도 예외가 없었던 평일 루틴이 완전히 깨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욕실에서 씻고 나오니 지소영은 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피곤하긴 많이 피곤했던 거 같았다.


난 지소영의 원룸에서 나와 조금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제의 난.

지소영과 완전하게 이별하겠다고 굳게 다짐했었다.


하지만 오히려 지소영과 결혼을 약속하고 말았다.


헤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평생을 약속한 사이가 된 것이다.


그러다 아주 우연찮게

원룸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차들을 바라 보았다.


“잠깐... 뭔가 이상한데?”


분명 지소영의 차가 있어야 할텐데.

없었다.


지소영은 국산 차도 아니고

딱정벌레처럼 생긴 비틀이라는 독일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특이한 외형을 가진 차를 내가 못 찾을 리도 없고

더군다나 지금은 출근 시간이 지난 시간이라

원룸 주차장은 거의 텅 빈 상태였기에

지소영의 차를 못 찾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수리를 맡겼나?”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무 예민해진 것일 수도 있다.


어제 성호랑 같이 있던 지소영의 모습을 보고 오해했던 것처럼.

지금 소영이 차가 없다는 거에 너무 과한 반응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난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옥상으로 올라가 피우지 못했던 담배를 피웠다.


회사에서 있었던 일.

그리고 지소영과 꼭 헤어져야겠다고 다짐했던 일들.

하지만 성호와 같이 있던 소영이를 보고 갑자기 느낀 질투심.


그러다 소영이와 함께 자게 되었고.

소영이는 내가 듣는 앞에서 오랜 친구인 김미숙을 버렸다.


“후우...”


난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이젠 소영이가 보여준 행동에 대한 답을 내가 할 차례다.


하지만 조현영에게 전화를 거는 건...

뭔가 꺼림직했다.


왜 그럴까?


으으... 모르겠다... 모르겠다고...


하지만 도망 갈 순 없지.


여자인 소영이도 내게 보여주었는데.

남자인 내가 못한다면 그건 정말 말도 안되는 거니까.


결국 조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침부터 웬일이야?”


조금 피곤해 보이는 목소리다.


“지금 시간 괜찮으면 좀 만났으면 해서.”

“큭큭. 오빠가 이젠 먼저 나에게 연락을 자주 하네.”

“...”

“나랑 결혼할 생각을 하니까. 막 흥분되고 결혼을 기다리는 게 너무 힘든가 봐. 큭큭큭.”

“그런 게 아니야.”

“아니면 뭔데?”

“만나서 해야 할 말이 꼭 있어서 그래.”

“...”


조현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내 전화를 굉장히 밝고 가볍게 받았던 조현영인데.

뭔가 느낌이 평소와 다르다고 생각한 거 같았다.


“그래, 만나. 어차피 지금은 나도 특별히 할 것도 없긴 하니까.”

“그럼...”

“아빠가 있는 병원 입구로 와.”

“알았어.”


난 전화를 끊고 난 뒤.

담배를 하나 더 피웠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넌 꼭 할 수 있어. 소영이도 하는데... 내가 왜 못해!!!”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었다.


엄마 때문에 언제나 바닥이었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억지로 했던 건데.

의외로 나에겐 효과가 좋았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용기를 북돋아서 그런지.

몸에 힘이 나고 용기가 끝없이 샘솟는 느낌이다.


그렇게 난

조현영을 만날 준비를 마쳤다.


**


“밥은 먹었어?”


차에 태운 조현영에게 내가 한 첫 마디다.


평소라면 절대 이런 말은 하지 않았을 텐데.

나도 모르게 평소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글쎄... 내가 먹었다고 대답을 해야 하나, 아니면 안 먹었다고 해야 하나?”


조현영의 표정이 몹시 굳어 있었다.

내가 왜 자신을 만나는지 이미 알고 있는 눈치다.


“먹었으면 먹은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그런 미지근한 대답이 어디 있어?”

“나도 이런 내가 이상하긴 해. 평소라면 회사에 있어야 할 오빠랑 이렇게 같이 있다 보니까. 나도 좀 이상해진 거 같아서 말이야.”


날카로운 눈매.

운전을 하면서 슬쩍 바라본 조현영의 눈빛은 굉장히 매서웠다.


“아... 그건 말이야... 어떻게 된 거냐하면...”


난 최대한 내 상황에 대해 좋게 포장하려 했다.


“일주일 무급 휴가라며?!!!”

“헉! 그걸 어떻게...”

“오빤 내가 바보로 보여?”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내가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어떻게 아냐는 거지?”


조현영은 내가 굉장히 하찮다는 듯 날 한번 쓱 위아래로 흘겨보았다.


“어제 성호 오빠를 만났다면서?”

“어... 그... 그게 말이야... 혹시, 성호가 말해 준 거야?”


조현영의 눈빛은 점점 더 무섭게 변해갔다.

마치 검사가 범죄자를 취조 하듯...


“그 미친년하고는 아주 당연하게 좋은 일이 있었을 거고... 아니 확실히 있었지.”

“...”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지만 조현영은 지소영과 있었던 일을 이미 다 알고 있는 거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다.


성호는 분명 먼저 떠났는데.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서 어떻게 조현영이 다 아는 거 같지?


“저기로 들어가서 차 세워!”


조현영은 마치 하인에게 명령하듯 내게 말했다.

난 그녀가 손을 들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호... 호텔... ???”



36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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