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피폐한 로맨스
"그럼... 우리가 몇 번 같이 만났던 그 남자...?"
"아니. 미숙이가 2년 전에는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었어... 그리고 지금 만나는 남자와는 한 1년 반 정도... 그런데 어제 완전히 끝냈다고 하더라고..."
"어제?"
"응... 그런데 미숙이가 생각 외로... 그렇게 많이 힘들어하지 않더라고... 뭐랄까. 너무 담담하게 나오니까. 미숙이가 그 사람을 진짜 좋아하긴 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
"그랬구나... 그럼 위로 같은 것도 할 필요가 없었겠네?"
"응. 너무 남 이야기 하듯 해서... 그래서 핸드폰 배터리가 빨리 닳았었나..."
참 놀라운 일이다.
어제 애인과 완전히 헤어졌다니...
난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김미숙과 남자 친구를 몇 번 본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난 진짜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냥 지소영이 같이 만나야 한다고 하도 우겨서
어쩔 수 없이 몇 번 본 게 진짜 다였다.
거기다 난 사람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다.
어릴 적부터 부모는 내게 우호적이지 않았기에
모든 사람이 다 적대적으로 보였다.
난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되기에
그저 그걸 표현만 하지 않았을 뿐.
그냥 형식적으로 인사하고 반가운 척했다.
그것도 군대를 다녀오면서 많이 좋아진 게 이 정도다.
그런데 몇 달 전 술집에서 우연히 김미숙의 남자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너무 답답하다며 김미숙과 있었던 일을 하소연했다.
난 그 말을 들으며 왜 지소영이 시도 때도 없이
내게 특별한 이유도 없는데 툴툴거리는지 알게 되었다.
그래. 그게 김미숙에 대해 내가 아는 전부였다.
그런데 결국 그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니...
그것도 바로 어제...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다.
내가 왜 소영이와 나 사이에 자꾸 끼어들려는 김미숙에 대해 알아야 하나.
하지만...
서성호와 김미숙의 생각 못한 접점은
나로 하여금 이유 없이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들게 만들었다.
"그럼 미숙이와는 어떻게 만난 거야?"
"그야 우린 아주 어릴 적부터 같은 동네에 살았으니까... 어린이 집도 같이 다니고... 초중고를 한 학교를 다녔고... 그러고 보니 대학만 달랐네. 미숙이가 나보다 조금 좋은 대학에 다녔고... 난... 좀 그렇네."
지소영은 대학 이야기에 잠시 멈칫했다.
그걸 보니 갑자기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도 아버지와의 학력 차이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다.
특히나 작은 엄마가 아버지와 같은 대학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엄청난 히스테리를 부렸다.
사실 나도 아버지나 작은 엄마가 다니는 대학에 가면 절대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나 작은 엄마는 그런 엄마의 말은 절대 들어선 안된다고 했었지.
"그딴 대학이 다 무슨 소용이야..."
"에이. 오빠니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거지..."
지소영은 내 품에 안겨 고개를 파 묻었다.
난 말없이 지소영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맞다.
사실 나 같은 존재가 이렇게 많은 여자를 만날 수 있는 것도.
내가 나온 대학 덕분이라는 걸 무시할 순 없는 거지.
내가 남들보다 얼굴이 잘 생기거나
키가 엄청 크다거나
그렇다고 다른 특별한 재능이 있는 건 절대 아니니까.
그전에 만났던 여자들이나 지금 이렇게 같은 침대에 누워있는 지소영도.
사실 날 만나는 이유는 내 학벌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엄마는 자기 말을 듣지 않고 내 멋대로 대학을 갔다고
나와 완전히 절연을 하겠다고 말했었다.
지금 보니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와 작은 엄마... 그리고 나의 접점...
사실 엄마와 난 그런 접점이 없는 거 같다.
날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으면서도
그 누구보다 날 저주하고
내 탄생 자체를 부정했던 엄마.
"오빠..."
"응?"
"우리... 합칠래?"
"합쳐?"
"동거하자고..."
동거라...
갑자기 이런 식으로 너무 훅치고 들어오니까.
정신이 없다.
"오빠도 원룸에 살고 나도 원룸에 살고... 둘이 같이 살면 돈을 많이 아낄 수 있을 거 같아서 말이야. 어차피 우린 결혼할 건데. 지금부터 돈을 부지런히 모아야지."
"그렇긴 한데..."
"무슨... 문제 있어?"
"문제라기보다는..."
난 사실 지소영과의 동거가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정작 큰 문제는 그게 아니라...
나의 복잡한 가족 관계였다.
아버지는 엄마와 법적 이혼도 하지 않은 상태로
세상 모두가 불륜녀라고 욕하는 작은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거기다 엄마도 다른 남자 집에 함께 살고 있다.
차라리 부모님이 이혼을 했다면
지소영에게 이런 나의 복잡한 가족 이야기가
오히려 설명하기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왜... 싫어?"
"싫긴... 그게 아니라 지금 다니는 회사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는 내 상황이 너무 불확실해서 그러지..."
"그럼... 다행이긴... 한데..."
지소영은 굉장히 실망한 것 같았다.
분명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소영이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잡한 내 가족이야기를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고 싶진 않았다.
아니 결혼을 해도...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하고 싶지 않다.
그건 나의 엄청난 치부니까...
"내가 일주일 동안 무급 휴가야. 별로 내키지 않는 자유 시간이지만... 그동안 내 주변을 정리하는데 쓰면 좋을 거 같아."
"그럼 그 미친년 하고.. 완전히..."
지소영은 환한 미소를 짓다가
황당해하는 내 표정을 보더니
얼른 내 가슴에 얼굴을 다시 묻었다.
"그래. 그게 가장 큰 문제긴 하네. 그 문제도 이번에 완전하게 해결할게."
"진짜?"
"그래."
"하아... 고마워. 앙앙앙."
지소영은 또다시 내 가슴을 고양이처럼 살짝살짝 깨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점점 강도가 강해졌다.
"아아. 아파... 그만 깨물어... 하하하!!!"
"하하하하하!"
무슨 고양이도 아니고...
지소영에게 이런 취향이 있었는지 오늘 처음 알았다.
"그런데 오빠..."
"응?"
"미숙이가 그렇게 싫어?"
"싫은 게 아니라. 남의 인생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면서 끼어드니까... 그래 솔직히 말해 싫지. 그런 행동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어."
"그렇단 말이지..."
지소영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자신의 핸드폰을 가져왔다.
"다행히 충전이 다 되었네."
"뭐 하려고..."
"오빠가 싫어한다니까... 나랑 결혼할 오빠를 위해... 내가 바로 보여줄게."
"???"
지소영은 자신의 핸드폰을 내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김미숙에게 전화를 거는 것 같았다.
"잘 들어 봐... 오빠를 위해서라면... 오랜 친구에게도 난 이렇게 할 수 있어."
"응???"
"이렇게 스피커 폰으로 해 놓고..."
내 가슴 위에 올려놓은 지소영의 핸드폰.
그런데 그때였다.
"응, 왜?"
"미숙아,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전화했어."
"할 말은 내일 직접 만나서 하면 되지... 나 지금 좀 피곤한데..."
"남자 친구랑 헤어져서 힘든 거 아는데..."
"전혀 힘들지 않아. 그냥 몸이 좀 피곤할 뿐이야."
스피거 폰으로 들려오는 김미숙의 목소리는 진짜 피곤한 목소리였다.
"그럼 빨리 말하고 끊을게."
"그냥 내일 만나서 하면 안 되니?"
"아니 지금 말해야 할 거 같아서 말이야."
"그럼 빨리 말해."
지소영은 갑자기 내 손을 들어 손등에 뽀뽀를 살짝 했다.
"앞으로 오빠랑 나 사이에 벌어지는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은 끼어들지 말았으면 좋겠어."
"응... 뭐? 뭐라고?"
무척 피곤했던 김미숙의 목소리가 급변했다.
"많이 피곤하다니까. 다시 한번 말하고 바로 끊을게..."
지소영은 이번에도 내 손등에 키스를 했다.
그러더니 내 가슴 위에 올려놓은 자신의 핸드폰을 향해 크게 말했다.
"다시는 우리 사이에 끼어들지 마! 만약 또 오빠랑 나 사이에 조금이라도 끼어들면 널 다시는 안 볼 거야. 이건 내 진심이야!"
"헉!!!"
"많이 피곤하다니까. 이만 끊을게."
"소... 소영아. 소영아. 끊지 마. 끊지 말라고..."
핸드폰 스피커로 들려오는 김미숙의 목소리는 굉장히 다급했다.
지소영은 그런 김미숙의 목소리를 들으며 굉장히 자랑스러워했다.
마치 큰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처럼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난 그런 지소영의 손을 잡아 그녀가 했던 것처럼 손등에 키스해 주었다.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너도 애인이랑 헤어져서 힘든 거 같은데."
"너 지금 그 새끼랑 같이 있니?"
"그 새끼라니... 말 조심해!!"
"소... 소영아..."
이미 승자는 정해져 있었다.
난 지금의 통화로 그동안 지소영이 김미숙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나와 미래를 약속했기 때문일까?
2년 정도 만난 나로 인해 그녀는 평생을 같이 한 친구와 헤어지려 했다.
그것도 내가 둘의 통화를 듣고 있는 곳에서...
"너... 그 새끼랑 같이 잤구나?!!"
"그런 것까지 내가 너에게 보고해야 하니?"
"소... 소영아... 너 지금..."
"많이 피곤하다니까... 그냥 자! 그만 끊을 게."
틱...
지소영은 핸드폰 전원까지 꺼 버렸다.
그리고 아주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난 오빠를 위해 나랑 가장 친한 친구를 버렸어... 이젠 오빠 차례야."
"알았어... 그런데 그전에..."
"어멋!!!"
우린 그렇게 또다시 거대한 폭풍우를 불러왔다.
34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