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피폐한 로맨스
우린 흡사 발정기의 뱀처럼
서로의 몸을 칭칭 감았다.
지소영은 에덴동산에서 뱀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먹은 후.
자신이 알몸이었다는 걸 자각해
부끄러움을 느끼는 게 아니라.
오히려 탈피에 성공한 뱀처럼
그동안 억눌려 있던 수치심을 모두 벗어버리고 알몸이 되어
나와 성적인 자유를 마음껏 느끼고 있었다.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에 대해 눈을 뜨고 있었던 것이다.
난 회사에서 있던 일 때문에 몹시 지쳐 있었지만
지소영의 요구 때문에 몇 번이나 더 그녀를 내 품에 가득 안아주어야 했다.
그녀가 만족할 때까지.
그동안 28년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도록
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거대한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간 뒤.
사방은 바람 한 점 남지 않은 것처럼 평온했다.
온통 땀에 젖어 머리가 헝클어진 지소영.
엄청난 쾌락 뒤에 찾아오는 그 극심한 허무함을 이기지 못하는지
내 품에 안겨 잠시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난 그런 그녀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정리해 주었다.
"오빤... 이런 경험이 아주 많은 거 같아."
"..."
"굉장히 자상하고... 뭐랄까... 내가 이런 행동으로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도록 날 잘 이끌어 준다는 느낌이 들어서 말이야."
"..."
"이런 자상함과 포근함이... 그냥 얻어졌을 리는 만무할 테니..."
"소... 소영아..."
지소영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빠를 탓하려는 게 아니야... 단지 나에게 오빠가 첫 남자였듯이... 오빠도 내가 첫 여자였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미... 미안해..."
"아니야.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내가 오빠를 26살에 처음 만났으니... 그럴 수밖에..."
"..."
"많이 아쉽지만 어쩌겠어..."
"미... 미안해... 웁..."
지소영은 내게 얕지만 아주 강렬한 키스를 해주었다.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었다.
만약 조현영과 이런 상황이었다면
우리 또다시 거대한 폭풍에 휘말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나 지소영 모두.
탈진할 정도로 모든 기력을 퍼부었기에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오빠..."
"응."
"우리 서로 힘들게 하지 말고... 짜증도 내지 말고... 우리 둘만 행복하게 살자."
"..."
나도 모르게 과거 엄마가 했던 말이 떠 올랐다.
아버지와 엄마 사이에 작은 엄마가 끼어들어 불행했다던 엄마의 말...
그런데 지금 지소영이 나에게 엄마가 했던 말을 그대로 하고 있었다.
"우리 둘만 사랑하고... 남들은 우리 사이에... 절대 끼어들지 못하게 하자고."
"..."
"난 미숙이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게 할 테니까... 오빤... 그 미친년을..."
"꼭 약속할 게..."
더 이상의 주저함도 없었다.
원래라면 지소영에게 이런 식으로 확답을 바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이미
그 어떤 콘크리트보다 더 강력하게 융합되어 하나가 되었다.
"고마워. 사실 나도 잘 한 건 없지만... 오빠가 헤어지자는 말에 그렇게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해서 사실 많이 놀랐어. 거기다 과거 오빠를 만났다는... 그 정신병자 같은 년은..."
"소영아.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미... 미안해."
난 지소영이 안쓰러웠다.
거칠고 흡사 야생마 같이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그런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의 지소영은 아주 고분고분했다.
내가 명령만 내리면 어디든 뛰어갈 준비가 된 명마처럼...
"사랑하는 사이에는 미안하다란 말도 고맙다는 말도 하면 안 되는 거래. 그러니까 더 이상 그런 말은 우리 사이에 하지 말자."
"누가 그런 말을 했는데?"
"글쎄... 누가 했더라..."
지소영은 갑자기 내 품에 안겨 내 가슴을 고양이처럼 살살 물었다.
"오빤, 순 엉터리. 하하하."
"하하... 하하하."
우리 서로를 부여안고 정말 오랜만에 한참을 웃었다.
참 행복했다.
우리 사이에 완성되지 못한 퍼즐이 뭐였는지 항상 궁금했는데...
사실 이런 거였다니...
남녀 관계란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대단한 관계가 아닌 것이다.
**
우린 행복했다.
소영이 침대에 나란히 누워 서로의 몸을 쓰다듬으며
이젠 앵콜 무대마저 끝나버린 쓸쓸한 무대를 아쉬워했다.
"그런데 오빠... 오늘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주 많은 일이 있었지."
지소영은 내 가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물었다.
"내가 그렇게 많은 전화를 오빠에게 했는데.. 단 한통도 받지 않다니..."
"그때 회사에선 아주 심각한 일이 있었거든... 그런데 소영아. 넌 핸드폰이 왜 꺼져 있었던 거야?"
"내 핸드폰이 구형이라 그런지 배터리가 금방 나갔지 뭐야. 그거 충전하려고 하는데. 성호 오빠가 어제 이야기했던 내 일자리 문제 때문에 와서... 나도 정신이 없었어."
"그래?"
좀 이상했다.
아니지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세상은 설명하기 힘든 일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니까.
'그래 의심하지 말자. 의심병이 커지면 우린 또다시 위기를 맞을 거야...'
난 지소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회사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모두 말해주었다.
"저런... 회사에서 그런 일이 있었어?"
"엄청 심각했지..."
"난 그것도 모르고... 오빠가 일부러 날 외면하는 줄 알고... 끝도 없이 전화만..."
"괜찮아. 다 그런 거지 뭐. 나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솔직히 답이 없었거든."
우린 그렇게 서로의 상황에 대해 이해했다.
그냥 서로의 몸만 섞었을 뿐이데
그 어떤 말보다 납득이 쉬웠다.
한없이 관대해진 이해심...
나도 모르게 지금 이 순간이 씁쓸했다.
"그런데... 소영아."
"응... 왜?"
"성호는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성호 오빠를 어떻게 처음 만났냐고???"
"응."
솔직히 너무 궁금했다.
성호와 난 각자 다니던 대학교 졸업 이후에 처음 만났다.
같이 술을 마시고 함께 어울리다 보니
친구가 귀했던 난 금방 성호와 형제 이상의 친분이 생겼다.
그런데 아까 성호와 지소영의 태도는 뭐랄까...
서로 좋아하는 사이처럼 너무 다정해 보였다.
성호가 좋아하는 여자가 지소영이라면
굳이 나에게 소개해 주지는 않았을 텐데...
아깐 내가 눈이 돌어갈 만큼
둘은 너무 다정했다.
"오빠에게 말하긴 좀 그런데..."
"괜찮으니까 말해 봐."
지소영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이내 결심한 것 같았다.
"미숙이를 통해서 알게 되었어."
"미숙이...?"
"응."
"너 친구 미숙이랑 성호가... 원래부터... 잘 아는 사이야?"
"응. 미숙이가 성호 오빠를 소개해 주었지. 뭐 오빠처럼 사귀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 그냥 이런 사람이 있다 하는 정도의 소개로..."
"김미숙이... 성호를 안다고?"
참 이상한 일이다.
전혀 예상 못한 이야기였으니까.
김미숙이 성호와는 어떤 접점이 있었던 것일까?
"그럼 만약에 말인데..."
"응?"
"만약에 성호가... 나에게 너 친구인 미숙이를 소개해 줄 수도 있었단 이야기잖아."
"응. 그런데 그땐 미숙이에게 남자 친구가 있어서... 날 소개해 준 거지."
정말 놀라운 말이었다.
내가 김미숙과 연결될 뻔했다니...
33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