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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헤어졌던 순간에는... 31화

약간 피폐한 로맨스

by 맑고 투명한 날

"오... 오빠..."


소영이 눈에서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성호야, 너 똑바로 말해. 안 그러면 오늘 넌 내 손에 죽는 거야!!!"

"마... 말할게. 말할 테니까... 컥컥... 이... 이... 손부터 좀... 놓고... 컥컥컥!"

"에잇!!!"


난 성호를 바닥에 힘껏 밀어 버렸다.


"컥... 컥..."


성호는 막혔던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지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그걸 보니 내가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빠... 괜찮아?"

"어... 응..."


그때 지소영이 바닥에 쓰러져 있던 서성호에게 다가가 여기저기 살폈다.

그걸 보니 멱살을 잡아 미안했던 감정이 전부 사라진다.


"오빠에게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소영이는 날 향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뭐???"

"날 위해서... 여기까지 온 성호 오빠한테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독기가 가득한 지소영의 모습.

뭔가 잘못된 거 같은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


"소영아, 난 괜찮아. 아무래도 성근이가 우릴 오해한 거 같아."

"오빠, 괜찮아?"

"괜찮아."

"내가 부축해 줄게."


지소영은 내가 보는 앞에서 서성호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이렇게 되고 보니 내가 아주 나쁜 놈이 되어 버렸다.


"성근아. 소영이가 다시 일을 다녀야 할 거 같다고 해서... 내가 알아봐 주겠다고..."

"그... 그래?"

"그래."

"그러면... 미안해... 내가 회사에서 너무 힘들다 보니까... 오해를 제대로 했네."

"괜찮아, 그런데 너 손아귀 힘이 언제부터 그렇게 셌냐?"

"어... 그게..."


이렇게 되고 보니

난 의도치 않게 성호의 멱살을 잡았고

결과적으로 목을 조른 것이 된 거였다.


"성근아, 너 차는 어딨어?"


성호는 지금 상황이 어색했는지 화제를 돌렸다.


"아... 지... 집에... 전철 타고 왔어."

"그러냐. 난 이만 집에 가봐야겠는데."


성호는 계속 자기 목을 잡고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어보았다.

그 모습을 보니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다.


"어. 그래. 그래... 내가 운전해서 집까지 태워줄까?"

"아니야. 그 정도는 아니고..."

"어. 그래... 미안하다. 성호야."

"미안하긴. 다 그런 거지... 살다 보면 심한 오해도 하고... 나라도 그랬을 거야."


성호는 지소영을 보고 간다는 말도 안 하고 손을 들어 인사했다.

성호가 자기 차에 타 출발할 때까지도 소영이는 걱정 가득한 눈으로 성호만 볼뿐.

성호가 탄 차가 떠난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소... 소영아..."


난 어색하게 불렀다.

왜 내가 갑자기 이런 죄인이 된 건지 모르겠다.

회사에서 너무 힘들어서 그런지 내 인내심이 바닥을 친 게 확실했다.


"왜?"

"아니 그게 말이야... 내가 오해를..."

"왜, 그런 식으로 성호 오빠를 아프게 하니까 좋아? 좋냐고?"

"..."


지소영은 독사 같은 눈빛으로 날 노려보았다.


"너무 창피해. 동네 사람들이 지금 일어난 일을 다 봤을 텐데... 누구 때문에 난 앞으로 편의점도 편히 가기 힘들게 됐네."

"소영아... 내 말을 좀 들어봐."

"듣긴 뭘 들어... 내가 전화를 그렇게 할 때는 받지도 않더니... 이런 식으로 갑자기 나타나면 내가 감동이라도 할 줄 알았어?"

"그런 게 아니라..."


난 분명 지소영에게 확실하게 헤어지자고 말하려 온 거다.

그래 난 소영이와 이별을 하려고 온 거라고...


그런데 지금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지소영은 휙 돌아서 자기 집으로 빠르게 갔다.

난 멍하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오빤, 거기 계속 있을 거야?"


지소영은 갑자기 멈춰서 휙 돌아섰다.

그러더니 날 보며 어서 오라고 급한 손짓을 했다.


"어... 어???"

"빨리 집에 들어가야지. 거기 있으면 뭐 하려고?"

"어... 어어... 그래."


난 얼른 소영이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지소영은 달려온 내 손을 갑자기 덥석 잡고는 집안으로 이끌었다.


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소영이의 손길에 이끌려 집안으로 들어갔다.



**



소영이와 사귀고 난 뒤.

매번 왔던 소영이 원룸이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성호가... 있다가 가서 그런 건가...'


뭔가 분위기가 어수선하다고 해야 하나...

말로 표현하기 좀 힘들지만 분명 이상했다.


난 소영이 침대에 걸터앉아

작은 화장대에 앉아 화장을 고치는 소영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밖에 나가자고 하지도 않았는데

왜 갑자기 화장을 하는지 모르겠다.


"오빠가 오는 줄 알았으면 미리 준비를 했을 텐데... 이런 식으로 갑자기 들이닥치는 건 좀 아니잖아."

"어... 그게 말이야... 그러니까..."


난 내가 여기 온 목적을 되새겼다.

지소영과 완전하게 헤어지는 것.


왜냐고?

지소영과는 내가 맞지 않는다.


결혼한 부부가 이혼할 때 하는 말처럼

우린 성격차이...


아니지, 그것보다는 뭔가 잘 맞지 않는다.

자꾸 이상하게 엇박자가 난다고 할까?


그래서 난 지소영과의 완전한 이별을 고하러 여기 온 거였다.

그런데 이상하다.


성호가 소영이와 원룸에서 함께 나오는 모습을 보고

난 왜 화가 그렇게 난 거였을까?


아직도 난 소영이를 좋아하는 건가?

아니야. 아니라고...


하지만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살갑게 있는 모습에

그런 식으로 자극받는 건

정말 이상한 감정 아닌가?


난 지소영을 아직도 포기하지 못하는 건가?


그래, 그럴 수도 있다.

사실 우린 2년 동안 큰 문제가 전혀 없었다.


물론 소소한 마찰은 있었지만.

그건 우리가 헤어져야 할 만큼 큰 사건은 아니었으니까.


그래. 김미숙...

우리 사이에 김미숙이 갑자기 끼어들면서

우린 이렇게 멀어지게 된 거다.


특히 내가...


"오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 어어... 그게..."


침대에 걸터앉은 내 옆에 소영이가 앉았는데.

여자들이 사용하는 특유의 화장품 향기가

내 코를 아주 강하게 자극했다.


"내가 그렇게 애타게 전화를 할 때는 마구 씹더니... 지금은 내가 그리웠어?"

"어어... 그... 그게..."


소영이가 갑자기 내 품에 파고들었다.

난 그런 소영이를 감싸 안았다.


"오빤... 내가 필요할 땐 꼭 없다가... 이런 식으로 갑자기 나타나는 거 같아."

"그... 그건 말이야..."

"난 다 알아... 오빤 내가 좋은데... 겁이 나는 거야."


품에 안겨 고개만 들어서

날 바라보는 소영이의 얼굴을 보니

너무 사랑스러웠다.


"내가 겁이 난다고..."

"그래. 아까 성호 오빠도 그러더라... 원래 남자가 결혼할 나이가 되면 많이 혼란스러워한다고..."

"성호가... 그런 말을 해?"

"응. 성호 오빠도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데... 그 여자가 자기가 아닌 다른 남자만 봐서 너무 힘들데."


그러면서 소영이는 내 가슴을 꽉 껴안았다.

그와 동시에 화장품 향기가 내 코를 심하게 자극했다.


"아까... 사실 황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좋았어."

"좋았다고...?"

"응. 오빠가 성호 오빠를 그렇게 질투하는지 몰랐거든."

"질투..."

"날 좋아하니까. 잘 지켜 주려고 성호 오빠에게 그렇게 달려든 거잖아."

"어... 어... 그... 그래."


모르겠다.

아까 내가 성호를 죽일 것처럼 달려들었던 건...


회사에서 힘든 것도 있었지만.

사실은...

성호가 소영이와 나 몰래 육체의 대화를 나눈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왜 그랬을까?

왜 성호가 소영이와 그런 행동을 한다는 생각을 했던 걸까?


모르겠다.

모르겠다고...


"사실 내가 오빠에게 헤어지자는 말로 떠보지만 않았으면... 오늘 이렇게... 우리가 힘들어해야 할 이유는 없었잖아."

"그... 그래... 그건... 날 무시하는 행동이니까. 내가 분명하게 하지 말라고..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그래서 내가 미안해."


그러더니 소영이는 날 침대에 살짝 밀었다.

이건 조현영이 침대에서 나에게 하던 행동인데... 이상했다.


"내가 순결을 지키고 싶다고 하니까... 오빤 엄청난 인내심을 보여 줬잖아."

"아니 그건..."


소영이는 내 옷의 단추를 하나둘 풀기 시작했다.

평소 소영이에게 이런 면이 있었는지 정말 몰랐다.


"우리가 결혼하면 내가 오빠에게 선물로 주려고 했는데... 미리 줘도 될 거라고 생각해."

"소... 소영아... 그건..."

"아니야. 오빠도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렸잖아."

"어... 어... 소... 소영아..."


나도 모르게 또 조현영의 이름을 부를 뻔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잘 넘겼다.


"어차피 우린 결혼할 사이야. 난 더 이상 오빠에게 이런다고 부끄러워하지 않을게."

"소... 소영아..."


지소영은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버렸다.

그리고 내 옷도...


"가... 갑자기 왜..."

"왜 싫어...?"

"..."

"사람의 심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오빠의 진심을 들어볼까?"


그러더니 엎드려 내 심장에 귀를 대었다.


"오빠의 심장 소리를 이렇게 직접 들으니 너무 좋은데."

"소... 소영아..."

"그동안 내가 너무 아이처럼 굴었어 그렇지?"

"아... 아니야..."

"난 다 알아... 오빤 날 너무 사랑하는데... 내가 오빠를 너무 힘들게 한 거야."

"그... 그게 말이야. 그렇지 않아..."


소영이는 내 몸을 타고 미끄러지듯 올라와 내 머리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우린 이제 하나가 될 거야. 꼭 그렇게 되어야 해."

"소... 소영아... 우웁..."


난 이미 소영이의 향기에 취해 있었다.

아니지 더 정확하게는 소영이 몸에 취해 있었다.


조현영이 그랬던 것처럼...

지소영의 이런 적극적인 모습에 난 철저하게 무너졌다.


평소 너무 무색무취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 욕구를 지소영이 들어주지 않았기에

그렇게 생각했던 거였다.


그래 난 그런 놈이다.

본능에 충실한 놈.


여자들이 이런 식으로 유혹하면

남자이기에 못 이기는 척하면서 넘어가는

그런 짐승...


하지만 사람이 아닌 짐승이 된 지금.

지소영과 함께 한 이런 순간이 너무 행복하다.


엄마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이런 식으로 다른 여자에게 충족하려는 걸까?


모르겠다.

모르겠다고...


나도 내가 누구고

뭘 하려는 건지 잘 모르겠다.


지소영의 몸짓 하나하나에

내 몸은 격하게 반응해 전율할 뿐.


그래. 난 그런 놈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여자들이 사용하는 화장품에는

사랑의 묘약이라도 넣은 건지.


이상하게 난

이런 향기에 꼼짝을 하지 못한다.


모르겠다.

모르겠어.


그냥 내 본능이 시키는 행동이 너무 부끄러워

핑계를 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내겐 너무 좋다.


왜 지소영이 이런 행동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오... 오빠..."

"으... 응..."

"날... 사랑해?"

"그... 그래..."

"그... 그럼... 날 떠나지 마... 절대로..."

"..."


난 쉽게 대답하기 힘들었다.


"왜... 대... 대답이 없어?"

"난... 난..."

"그럼 사랑한다고... 말해... 어... 어서..."

"그... 그래..."

"나도 사랑해. 오빠..."

"..."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내 몸 위에 있는 소영이의 부드러운 살결 때문이었을까?

곧바로 그 후회는 썰물처럼 사라졌다.


"사랑해... 사랑해 소영아!!!"

"어멋!!!"


난 소영이를 꽉 안았다.


"다신 널... 놓지 않을게..."

"오... 오빠... 우웁..."


우린 그렇게 하나가 되었다.


분명 이곳에 올 땐

이별을 말하러 온 나였는데...


결국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놈이다.

쾌락에 날 팔아먹은 쓰레기 같은 놈...


그래 난 쓰레기다.

구제가 안 되는 쓰레기...


어릴 적 아버지와 엄마가 나에게 수도 없이 했던 말처럼

난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그런 놈이다.


하지만

서로의 체온을 강렬하게 느끼는 지금 이 순간만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32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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