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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한 충무김밥

바다와 도시를 잇는 작은 다리, 충무김밥

by 녕인 Mar 21. 2025

가끔 별것 아닌 것들이 마음을 꽉 채울 때가 있다.


한겨울 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시린 날, 친구가 무심코 건네준 손난로가 그렇고,

유독 피곤한 어느 아침, 회사 동료가 힘내라며 건네준 비타민이 그렇고,

집 앞 골목길 조그맣게 돌돌 말려 포장된 단정한 충무김밥이 그러하다.

선선하게 바람이 불어오는 날이면 유독 충무김밥이 생각나곤 한다.

김이 바삭하게 말려 있는 얇고 단출한 김밥. 속을 들여다보아도 평범하기 그지없다. 오직 밥과 김, 단 두 가지뿐인 투박하고 소박한 김밥. 그런데도 이 김밥을 한 입 베어 물면 늘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지고는 한다.


충무김밥은 화려하지 않다.

겉으로 보면 너무도 단순해서 밋밋해 보이기까지 하는 생김새. 하지만 그 곁에 함께 놓인 매콤한 오징어무침과 아삭한 깍두기, 그리고 따뜻한 국물이 더해지면 그 소박함은 어느새 풍부하고 깊은 맛을 지닌 한 그릇의 만찬이 된다.

사는 것도 그렇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채우고 덧붙이느라 바쁘다.

더 화려해야 할 것 같고, 더 특별해야 할 것만 같다. 하지만 충무김밥처럼 최소한의 단순함 속에서 오는 따뜻함과 진한 맛이 있다는 걸 자주 잊곤 한다.


그저 담백하게, 꾸밈없이, 내 자리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알차고 넉넉한 하루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사실 알고 있다.

충무김밥은 마치 한 편의 오케스트라와 같은 음식이다. 혼자서는 결코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곁에 가지런히 자리한 빨간 무김치와 매콤한 오징어무침을 입안에 넣고 아삭아삭, 쫀득쫀득 씹다가 충무김밥을 한입 베어 물면, 그제야 하나의 연주가 완성되며 깊은 울림과 맛이 입 안 가득히 전해진다.


충무김밥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지만, 깊고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화려한 속재료를 품고 있는 여느 김밥과는 다르게, 충무김밥은 자신을 낮춘다. 오로지 밥과 김만으로 정체성을 지키는, 소박한 아름다움. 그것이 바로 충무김밥의 매력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나는 감성이 예민해서 남들보다 상처가 짙게 남고, 좋았던 기억이든 나빴던 기억이든 자주 곱씹어보는 사람이다.


이런 내게 어울리는 수더분한 참치마요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와 비슷한 성향의 매콤한 전주비빔 같은 사람이 있다. 서로의 성향을 조심스럽게 잘 파악하여, 자칫 상처를 주거나 내 욕심으로 그 사람을 덮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나의 예민함을 누군가의 넉살이 채워주고, 또 누군가의 상처를 내 섬세함으로 감싸줄 수 있는 그런 관계.

그것이 바로 충무김밥처럼 온전하고 조화로운 관계가 아닐까.

충무김밥의 시작은 바다였다.

긴 항해를 떠나는 남편들을 위해, 바닷마을 아낙들이 정성스럽게 싸주었다는 김밥.

쉽게 상하지 않도록 속재료를 뺐고, 그 대신 따로 준비한 반찬을 곁들였다. 그렇게 사랑으로 만들어진 충무김밥은 거친 바다를 건너 도시로 넘어왔고, 지금은 바쁜 현대인의 식탁 위에서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내가 충무김밥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비워내는 군더더기 없는 소박한 미학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과하게 꾸미거나 보태지 않고도 충분히 빛날 수 있는 삶. 충무김밥은 그런 삶을 잘 설명해 준다.


어쩌면 우리도 충무김밥 같아야 하는 건 아닐까.

너무 많은 걸 욕심내지 않고, 꼭 필요한 것들로만 하루를 채우는 것.


무언가 가지는 것은 쉽지만,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손에서 놓기란 어려운 이 세상 속에서 비우고 덜어낼 줄 안다는 것. 그때서야 우리는 비로소 무언가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충무김밥 한 줄에 담긴 깊은 이야기처럼, 우리 삶도 그렇게 단출하지만 풍성한 맛을 내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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