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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탕빛 하늘

북극곰과 하늘 한 조각

by 녕인 Jan 26. 2025

어느 시린 겨울날, 곰탕을 끓이다가 문득 흐린 하늘과 곰탕의 색이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로부터 비 오기 전의 탁하고 뿌연 하늘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곰탕이 생각나곤 했다.




어릴 적, 아버지께서는 곰탕 한 그릇을 맛있게 싹싹 비우는 내 모습을 보고 장난기가 발동하셨던지, 문득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하셨다.


“사실 이 곰탕은, 북극의 아주 커다란 백곰으로 만든 것이란다. 그래서 이렇게 새하얗고, 양도 무지무지 많은 거야.”


싱글벙글 웃던 아버지께서는 몰랐겠지만, 그 후로 나는 곰탕을 볼 때마다 어쩐지 북극에 사는 커다란 백곰을 떠올리게 되었고,


눈부시게 하얀 북극곰은 어린 나의 머릿속에 단단히 각인되어, 밤마다 꿈에 나타나 이리저리 뛰어놀다 결국은 커다란 곰탕 솥 안으로 풍덩 빠지고는 했다.


그렇게 나의 곰탕 한 그릇은 내내 북극곰으로 몇 년쯤 살다가, 곰탕 재료에 얽힌 진실을 알게 되고나서부터는 흐린 하늘이 되었다.

뽀얗게 우러난 곰탕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저런 색깔들이 섞이고 가득 차서 정신없던 마음속도 가만히 하얗게 내려앉게 된다.


마치 흐린 하늘을 우연히 올려다봤을 때처럼 알 수 없는 기분이 든달까. 울적하다고 하기엔 편안하고, 그렇다고 신난다고 하기엔 어딘가 채도가 부족한 기분. 이렇듯 형용할 수 없는 담담하고 뿌연 마음이 고요히 떠오른다.

곰탕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늘과 닮았다.

한없이 맑고 담백하지만,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많은 이야기들이 얼기설기 숨어 있기 때문이다. 푸른 하늘이 때로는 먹구름을 한 움큼 품고 있듯, 곰탕의 마냥 뽀얀 국물 속에도 깊은 맛과 기다림이 존재한다.


오래도록 뭉근히 끓여낸 국물을 후- 불어 한 숟갈 뜰 때마다 흰 빛의 하늘이 마음 깊숙한 곳까지 구석구석 닿고 스며든다.




어느 날은 흐린 하늘 아래 뿌연 곰탕 국물을 떠먹으며, 삶도 이 국물처럼 서서히 우러나기를 바랐던 적이 있다. 한정된 나의 시간이 고춧가루를 풀었을 때처럼 빠르게 변하지 않고, 곰탕을 끓일 때처럼 천천히 우러나다가 소멸되었으면 했다. 조급할 필요 없이, 그저 묵묵히 자신의 시간을 견디며 말이다.


옅은 진주색 하늘을 올려다보며 곰탕 한 숟갈을 들이켠다. 따뜻한 국물이 속을 채우고, 저 하늘은 마음을 채운다. 오랜 시간을 견뎌낸 국물이 따뜻하게 뱃속을 덥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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