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더 >, Stephen David Daldry
(짧은러프리뷰..)
달콤하고 아찔한 첫사랑의 기억. 아무것도 모른 채였기에, 그 무엇도 나를 두렵게 만들 수가 없었던 아름다운 고통. 내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었던, 아픔과 치환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지극했던 그 여름의 나의 그녀는, 차라리 서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기억 속에서 떠올릴 그 순간으로 간직하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 첫사랑이란 무릇 그런 법이니까. 그러나 지나쳤는지 인식도 하지 못했을 행인의 입을 닦아주고, 아무것도 모르지만 괜찮다 다독여주던 그 다정한 포옹이, 살과 온몸을 어루만지던 잊지 못할 그 부드러운 손길이, 사실은, 매월 공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선정한 사람들을 확실한 죽음에 등 떠밀었던, 닫힌 교회에서 불에 타 죽어 가는 사람들의 발악을 감시라는 명목 하에 문을 걸어잠궜던 것이었다면. 그 지극한 사랑의 순간으로 남아야 했을 그 기억에 은밀히 공존했던 핏자국과 신음을 이제서야 목도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시는 지울 수 없는 그 자국 같은 장면과 그녀를 ‘살인자’라는 프레임과의 이중노출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면, 개인은 얼마나 고통스러울 것인가.
어떤 고통과 피해는 가시적인 자상과 죽음으로 오며, 그리고 또 어떤 아픔은 눈에 띄지 않는 붕괴와 내면의 상처와 결핍으로 온다. 심지어 어떤 것은 자신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채로 무의식적인 방어 기제가 되어 이미 곪아 있을지 모른다. 타인의 아픔을 감히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피해에 있어 층위가 존재하는 듯 보인다. 이는 단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다층적으로 존재하는 피해자들을 세심하게 조명하려는 시도는 눈앞에 디밀어지는 폭력의 리얼리티보다 최선의 위로가 된다는 것을, 극 중에서는 이러한 위무를 실현하고자 할 뿐 아니라 와해된 피해자로서 개인 간의 이해를 봉합하고자 한다. 개인의 삶에 전체가 개입할 때, 연대의 기억이 아니라 침입과 붕괴로도 설명될 수 없는 방식이라면 그것은 가장 고통스럽다. 그것이 직접적이 아니라 간접적일지라도, 개인은 그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이클의 기억이 그렇다. 나이가 들어서까지 여전히 그녀와 함께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같이 들었던 성가대의 노래를 틀고, 일상 속에 여느 순간에서 자신도 모르게 상기될 만큼 오래 남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마이클에게 있어 그녀의 만행에 대한 목도는 개인의 삶에 대한 혼돈으로서, 그리고 사랑의 기억의 해체에 대한 불신으로서, 삶의 중핵 자체가 흔들리는 경험이었다. 그렇기에 짧은 결혼 생활 이후 하룻밤 지내는 인연을 전전하면서 그런 상대에게 까지 오래 버틴 사람이 있었냐는 물음을 받고, 딸에게까지 가까이 가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러한 고통의 결과로써 개인에 내재하게 된 일종의 흉터일 것이다. 그 또한 직접적이진 않지만, 피해자이다. 한나라는 사람, 그리고 국가의 악행에 의해 간접적인 형태로 개입당한 개인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삶과 개입당한 역사의 경계에서 그는 서있다. 아무리 그런 짓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사랑한 사람인데, 또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살인의 방조를 저지른 사람일 뿐이라는, 어느 하나 막연하게 들기는 어려운 그 사이에서 서있는 딜레마에 처한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는 일종의 중재자가 되기도 하며, 단죄자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영화에서 공간의 내부와 외부로 연결되는 ‘문’, 이러한 내부에서 외부로 마이클을 출입하게 하는 미장센이 종종 등장한다. 특히 한나의 집이 있는 건물, 그리고 수용소 내부에서 문을 눈에 띄게 잡는 쇼트라던지, 한나가 있는 구치소에 입장할 때도 그렇다. 이러한 문을 통한 출입은 이 영화에서는 3개의 층위로 나누어진 피해자 간의 이해와 관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첫 번 째는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유대인 마더 가의 직접적인 피해,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개인에 대한 전체의 개입으로 인한 내면적 붕괴와 같은 마이클의 간접적인 피해, 그리고 한나의 피해이다. 극 중 한나는 분명 살인자가 맞다. 그러나 그녀는 재판 중에 죄를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감시자의 역할을 다했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자신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음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듯 보이는데, 그녀의 입장에서 그녀 자신은 제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녀는 문맹인데, 국가는 이러한 멍청한 개인에게까지 수용소의 일을 부과한 것이었다. 수용소의 일은 부끄러운 줄 모르지만 문맹이라는 것은 부끄러운 줄 아는 이에게까지 말이다. 그렇기에 그녀도 명백한 가해자이자 일종의 국가에 의한 피해자로 묘사되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한나와의 한때를 보내던 그 시절, 한나의 현관문은 제대로 된 잠금장치도 없이 그냥 열렸다. 욕조는 방 한가운데 문도 없이 반투명한 유리 하나를 두고 놓여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이때 당시는 사랑이라는 매개를 통해 이해 없이 서로를 이해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나의 법정을 본 이후 그래도 마이클은 그녀를 이해하고자 하지만, 세미나 이후 수용소에 방문하는데, 이때 마이클은 계속해서 철책을 넘고, 여러 개의 문을 통과하며 처참한 실상을 파악한다. 이는 한나가 아니라 유대인 피해자인 마더 가의 그들에 다가가고자 한 것이다. 그렇기에 마이클이 한나의 문맹 사실 실토를 설득하러 면회에 갈 수 없었다.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녀의 죄를 안다. 따라서 그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단죄이자 이해는 책을 읽어주는 일, 그녀 스스로가 언어를 배워 제 잘못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이때, 글을 익히기 위해 도서관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한나가 처음으로 문을 통과하는 쇼트가 등장한다. 층위를 넘어선 공감을 글을 익힘으로써 기대되는데, 마이클이 수용소의 문을 넘듯, 그리고 그녀가 처음으로 문을 넘듯 그 기대는 결국 책을 밟은 그녀의 자살과 마더에 대한 사과로 까지 이행되게 된다. 스스로의 문은 누구든 들어올 수 있도록 열었지만, 자신이 열고 들어가는 경험으로 그녀는 제 안에 무지로 내재했던, 타인에 대한 고통의 고통을 수면 위로 드러내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자살은 놀랍지 않을 수 있다. 문맹임이 아니라 본인을 자괴해야 했으므로. 출입을 통한 공감과 이해로의 노력, 그리고 무릎 꿇은 사과보다도 더 진정한 용서로의 접근, 그리고 스스로를 자조하게 하는 효과적인 단죄의 방식임을 감독은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 영화는 개인적인 사랑의 서사로서, 그리고 홀로코스트 피해의 피상적인 측면으로서 이해되어서는 안 됨이 분명하다. 피해자의 층위를 확인하고, 그 아래 할 수 있었던 개인의 최선의 노력이 단지 폭력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시키고 공감시키는 데 있다는 것을, 사랑은 결국 이를 가능하게 했다는 것을, 이러한 접근으로써 이 영화는 담론에 다가간다. 한나가 수용소에서 했던 감시자의 역할도, 마이클의 이해와 중재, 단죄의 시도도, 그리고 마더가 했던 세상에 목소리를 내는 일도, 모든 개인의 힘은 양측에서 결코 약하지 않다. 단지 문을 넘고 책을 읽어주어도, 많은 것은 바뀐다. 역사를 읽고 공감하는 개인과 사랑의 힘은 영화와 같은 예술의 형태로서 가장 강력하게 작용할 것이다. 나는 그 힘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