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 선 면 그리고 오와 열

by Haley


공사가 시작되고부터는 거의 매일 현장에 들렀던 것 같다.
아예 퇴근을 그 집으로 했달까. 하지만 기억하시겠지만 나는 턴키*라는 점.


( *Turnkey : 열쇠를 돌린다는 의미로, 제품을 곧바로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완성하여 고객에게 인도하는 것)

업체에서는 싫어하는 눈치였지만 내 성격상 안 가볼 수도 없었다. 바로 길 건너에 살고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궁금해 죽겠는걸.

오늘날 아파트 리모델링은 설계라고 할 것이 없다고 한다. 아파트는 정해진 구조를 크게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에 사실상 시공이 전부인 셈이라 시공을 잘하는 업체를 고르는 것이 포인트라고.

업체는 오와 열, 점 선 면을 강조했던 나와 결이 맞아 복도 벽 전체에 석고를 치고 칼각으로 벽지를 발랐다. (어쩐지 견적서에 목공비가 후덜덜 하더라니) 정돈된 벽면을 보면 심신이 안정되는 느낌이었다. 전체 벽지와 바닥재를 작업 후 가구를 올려 꼼꼼하게 작업하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종종 실수도 발견되었는데 예를 들어 벽지가 다른 공간에 잘못 발라져 있다든지, 샷시 필름 색이 다르거나 시스템 선반의 높이가 바뀌는 등. 대체로 금세 바로잡아졌지만 어쨌거나 매일 갈 이유는 많았다.

공사 기간은 약 한 달 정도였는데 의외로 초반에는 이렇다 할 작업이 없어 보이더니 뒤로 갈수록 하루가 다르게 채워져 갔다. 나의 살, 그리고 허리 디스크 몇 개와 맞바꾼 우리 집이 완성되고 있었다.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뒤로하고, 드디어 가전과 가구가 들어오는 날이었다. 이사를 계기로 신혼 때 장만한 가전과 가구 대부분을 처분하고 마치 새 시집이라도 가는 양 많은 것을 새로 들이게 됐다. 냉장고도 그중 하나였다.

요즘 유행하는 키친핏으로 주방 가구의 도어 색과 맞춰 주문을 했는데 설치하고 보니 묘하게 가구와 냉장고 사이 공간이 기울어져 보였다. 때마침 현장에는 마감 공사로 한창인 인테리어 가구 디자이너가 함께 있었고 내가 말했다.

"여기 공간이 좀 기울어져 보이지 않나요?"

냉장고 설치 기사가 주머니에서 수평계를 꺼내 대보더니 말했다.

"냉장고는 이상 없습니다."

그러자 가구 디자이너가 어디선가 내 키만 한 수평계를 가지고 오더니 말했다.

"가구는 잘 맞아요."

어쩐지 긴장감이 느껴졌다. 냉장고 설치 기사가 같이 온 후배쯤으로 보이는 동료에게 차에 가서 무언갈 가져오라 지시했다.
그 사이 다른 가전이 배송되어 나는 잠시 자리를 비워야 했고 돌아와 보니 설치 기사가 냉장고 문짝을 다 뜯고 있었다. 아무래도 삼O이 패배한 모양이다.

가구 디자이너가 조용히 말했다.

"가구가 기울었을 리 없어요. 저희 요즘은 다 레이저 띄워서 작업해요. 고객님 잘 아시잖아요."

연일 폭염 경보가 떨어지던 한 여름 더위에 기사님은 땀을 뻘뻘 흘리시며 문짝을 다시 조립했다. 그런데도 내 눈엔 여전히 조금 기울어져 보였다. 기사님이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아무래도 가구가 기울어진 것 같은데.."

나는 이쯤 했으면 괜찮으니 이만 돌아가시라고 했다. 저녁때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해줬더니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쿨하게 말했다.

"집이 기울어졌나 보지 뭐. "

우문현답이네.



기울어짐과 별개로 상/하부장의 높이는 거의 난센스에 가까웠는데, 내가 구매한 삼O전자에서는 냉장고 전체 높이는 제공하되 냉장칸과 냉동칸 도어의 세부 치수는 제공하지 않았다.


가전보다 가구가 먼저 들어오다 보니 생긴 이슈였고, 결과적으로 내 눈에는 너무 커 보이는 상/하부장 높이 편차가 생겼지만 이 정도는 받아들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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