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에서부터 이어져 온 상실의 수레바퀴
실로 고단한 삶이었다. 그 속의 무수한 것들 중 지금의 나를 만든 이력은 단연코 2010년도에 일어난 외삼촌의 죽음일 것이다.
삼촌 하나를 잃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화목한 가족과 동심, 말수와 삶의 기쁨마저.
그러나 나는 오랫동안 이 일이 내게 남긴 여파에 대해 모르고 살았다. 다섯 살에 일어났던 일이라 남은 기억이 없다.
엄마에 의하면 삼촌이랑 나는 많이 닮았었고 친밀했으며 돌아가신 이후에 내가 삼촌의 사진을 씩씩거리며 찢었었다고 한다.
내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건 죽음 이후의 집안 분위기였다. 아빠는 한국에 계셨고 엄마와 나는 프랑스의 외조부모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가족들은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슬프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 보는 가족들의 무너져 내림과 멈추지 않는 울음소리는 내게 ‘재앙’이었다.
나까지 합세해 울 수 없었다. 나까지 울면 어른들이 달래줘야 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냥 방에서 혼자 울었다. 그마저도 소리가 들리면 신경이 쓰일까 조용히 삼켜냈다.
몇 년이 지나 엄마의 마음의 병은 깊어져만 갔다. 그런 엄마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나 또한 활화산 같은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고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수 없게끔 거리를 뒀다. 가까워지기만 하면 비수가 날아와 심장에 꽂혔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중학교로 진학하고, 고등학생이 되어도 바뀌는 건 없었다.
나는 언제나 '슬픈 아이'였다. 상실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십 대의 나는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라 믿으며 살아갔다.
겉은 어린아이의 외형이지만 속은 깊어지는 겨울의 칼바람을 맞아 가루로 부서져버린 가을의 나뭇잎과 같은 그런 인간.
멈춰버린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왜 살고 있는지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점점 피폐해져 가는 것도 개의치 않고 계속 생각했다.
때문에 밤이 되면 잠에 들지 못하였다. 생각해야 했다. 왜 살고 있는지 알아내야 비로소 슬픈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깊은 새벽이면 침대에 등을 맞대고 앉아 고개를 위로 젖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반짝이들이 희미한 조명의 불빛에 일렁였다.
그런 별들은 아무리 손을 뻗어보아도 닿을 수 없을 하늘의 별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무망감에 휩싸인 나는 중얼거렸다. 이곳은 내 고향이 아니고 나는 인간이고 싶지 않다고. 그럼에도 나는 언제나 거친 눈보라를 묵묵히 헤쳐 나갔다.
어느 순간부터 전생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관심은 확신으로 이어졌다. 내가 이렇게 끝없이 슬프기만 한 데에는 이번생이 시작일리 없겠구나.
이런 내 마음의 소리를 들었던 불청객이 어느 날 빈 집에 불쑥 찾아왔다.
강인한 남성의 외모에 가까웠던 이는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현관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집 안의 기둥 앞에 우뚝 섰고...
쾅
그 행위에 내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하였다.
쾅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쾅
숨이 턱 막혀 주먹을 쥐어 가슴을 쿵쿵 내리쳤다.
쾅
무엇을 해야 그를 멈출 수 있을까. 잔뜩 찡그린 얼굴로 눈물을 쏟아냈다.
쾅
이윽고 불청객의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그는 광인이었다.
쾅
그가 누군지 몰랐더라면 이렇게 울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기둥에 박자를 맞춰가며 이마를 부딪히는 그를 보고 벌벌 떨었으리라.
쾅
뚜렷한 기억이 없을지라도 광기란 곧 앎인 법이다. 그는...
쾅
먼 옛날의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투사였다. 평화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내었다. 죽음조차 용맹함과 지혜까지 갖춘 그와 그의 의지를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죽으면 또 태어나고 또 죽으면 다시 태어났다. 그는 세상의 기둥이었다.
쾅
광인의 뒤로 번쩍였던 황금빛 태양은 끝내 저물어갔고, 하늘은 불타올랐다. 이마에서 흐른 피는 눈썹을 지나 눈을 붉게 물들였다.
쾅
눈물과도 같은 선혈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쾅
불현듯 광인은 사라져 있었다.
내 안에 고여있던 광기와 마주한 뒤 내게는 오기가 생겼다. 기필코 이 고통의 시작을 알아내 뿌리째 뽑아내고야 말겠다고.
그때부터 전생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퍼즐 조각 같은 단편적인 기억들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팝콘처럼 튀어나오곤 했다.
하루는 동생과 함께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러 갔다. 첫 장면으로 붉은 머리의 마녀가 화재가 난 건물을 탈출하는 중이었다.
그 순간 두 눈이 꼭 감기며 마치 그때로 되돌아간 듯 선명한 광경이 펼쳐졌다.
매서운 눈으로 불길한 것을 노려보며 두려움에 떠는 광장의 사람들.
중세 시대의 내가 화형에 처해지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또 어느 날은 한 드라마의 OST인 Serenade라는 곡을 듣게 되었다.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붉은 머리.
어렸던 내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장가를 불러주던 중세 시대의 엄마가 생각났다.
이처럼 전생을 기억해 내는 과정은 머리가 알아채기도 전에 온몸으로 제 생명을 분출하여 경험의 진실성에 대한 일말의 의구심도 허락하지 않았다.
퍼즐 조각들을 차츰차츰 모으자 큰 그림은 제스스로 완성되었다.
엄마는 언젠가 나를 두고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렸었다. 나는 그런 엄마를 찾기 위해 여행길에 올랐었다.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지식을 자연스럽게 습득하며 배워나갔다.
어느덧 나는 집 떠난 엄마처럼 마녀가 되어있었다. 자연을 경배하며 약초로 사람을 치유하고 신비주의 학문을 사랑했으며 영적 능력에 눈을 떴다. 배운 것을 사람들과 공유하였고 제자마저 두었다.
그러다 뜻밖의 장소에서 이미 죽은 엄마의 흔적을 발견하였다. 엄마는 사악한 마녀로 몰려 죽었다. 여행의 목적을 잃어버렸던 나는 잠시 절망했으나 곧바로 털고 일어섰다.
어느 날 우연히 옛 제자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총명했던 그를 기억하는 것과 달리 내가 가르쳐준 지식들을 이용하여 악마 숭배주의 단체를 만들어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나는 절망하였다. 사람들을 돕기 위해 가르쳐줬던 보석 같은 지식들이 사람을 해치기 위해 사용되고 있었다. 아이들이 죽고 순진한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는 것에는 내 책임이 컸다.
얼마 뒤, 유럽을 지배하던 종교 세력이 들이닥쳐 지금껏 내가 만들어 모아둔 자료들을 모두 불태우거나 압수해 갔다. 갑작스러운 그들의 방문에 나는 악마 숭배주의 단체가 어디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일들의 연속에도 나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좌절하였어도 앞으로 다가올 일에 비하면 지금까지의 절망은 새발의 피였다.
시간이 지나 나는 아이를 가졌다. 그런데 다른 지역에 잠시 볼 일이 생겨 친했던 이웃에게 갓난아기를 맡겼다.
며칠 뒤 나는 마을에 돌아왔고 이웃집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연 이웃은 빈 손이었다. 나는 이웃에게 물었다.
아기는 어디에 있냐고.
그녀는 나의 옛 제자라는 사람이 찾아와 대신 봐주겠다면서 아기를 데려갔다고 했다.
안색이 창백해진 나는 그 길로 정신없이 제자가 있는 곳까지 달려갔다. 그 사이 해가 저물며 주변이 금세 어두워졌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정면에 보이는 건물 대신 무언가에 이끌려 대각선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동물용 물통이 있었다.
불빛하나 없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두 손을 물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얼음장 같은 물에 잠겨 있던 식어버린 갓난아기를 건져 올렸다. 부북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찢겨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내 영혼이었다.
아. 이전까지 경험해 본 고통이란 결코 고통이 아니고 내 착각일 뿐이었구나. 고문을 받아도 사실은 그저 간지럼에 지나지 않는 장난일 뿐이었고, 사람들이 죽어나가서 괴로운 것도 실없는 불평일 뿐이었어.
그날부터 증오의 화살은 나를 겨냥했다. 나는 처참히 무너져 버렸다. 그러곤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살아갈 의지를 잃어 급속도로 쇠약해진 나는 머지않아 화형에 처해 죽었다. 이후 몇 백 년 동안 남자로만 태어났다. 여자로 태어났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일찍 죽었다. 나는 엄마가 될 자격이 없었다.
내가 언제 어디서 누구로 살든 한결같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육체는 영혼의 상처를 감당하지 못했다.
이번생에 다다라서야 중세 시대에서 시작된 굴레를 끝내기로 마음먹고 마주하였다.
삼촌을 잃은 상실의 아픔은 전생을 비추는 거울이자 끝없이 굴러가는 운명의 수레바퀴를 상징했다.
굴레를 끝내는 방법은 단순했다. 억압되어 있던 감정이 다 가실 때까지 엉엉 울다가 또 울어 내면을 정화한 뒤, 과거와는 다른 선택을 하면 되었다.
과거의 나는 아기를 잃게 만든 나를 미워했으니 될 때까지 나를 용서해야 했다.
나는 이제 붉은 마녀도 아니고 슬픈 아이도 아니다.
설령 같은 일이 이번생에 반복된다 할지라도 이번에는 무너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무너지지 않는 것보다 어떤 일을 겪더라도 다시 일어설 줄 아는 것이 진정한 힘이라는 걸 배우기 위해
이 모든 것을 겪어낸 것이리라.
다만, 자식 잃은 슬픔은 극복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