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 어느 겨울 날의 기억
차가운 저녁, 슈퍼 미닫이문이 열리며 쏟아지는 온기는 눅눅한 라면 냄새와 섞여 있었다. 여덟 살배기 아이는 습관처럼 계산대 옆 유리 진열장 속 호빵을 훔쳐봤다.
봉긋하게 부풀어 하얀 김을 내뿜는 야채호빵은 만져서는 안 될 보석 같았고 아이는 유리벽에 지문을 남기며 조심스레 아빠의 눈치를 살폈다. 평소라면 '안 돼'라는 말이 칼같이 돌아왔을 터였다.
아빠는 낡은 지갑을 열어 천 원짜리 몇 장과 짤랑거리는 동전을 세다 말고 아이의 시선이 머문 호빵을 무심하게 쳐다봤다. "오늘은 네 거야" 툭 던져진 그 한마디에 아이의 표정은 너무도 환했다.
사소한 허락 하나가 불러온 파동은 생각보다 컸다.
아이는 300원짜리 호빵 하나를 보물처럼 받쳐 들고 입가를 핥으며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표정을 지었다. 아빠는 그런 아이의 뒤통수를 툭 치며 말없이 슈퍼를 나섰다.
300원짜리 간식에 온 우주가 담기던 찰나 아빠의 주머니 속에서 남은 동전들이 힘없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독 시린 겨울 어느 오후, 비닐 봉투 속에서 호빵의 온기가 사그라지기 전에 서둘러 정류장으로 향하던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