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진아, 어제 나간 사람들 아직 안 돌아왔어. 어디로 간 거지?”
“글쎄, 몰라”
“아~배도 너무 고프고 미치겠어.”
“진식아, 조금만 참자. 무조건 참고, 엄마가 해주는 지슬밥 먹으러 가야지.”
“······”
진식이와 영진이는 지난겨울 산에서 만났다. 산 생활이 너무 힘들어 더 못 견디고 선무 전단을 보고 하산했다. 군인들이 목숨을 보장해 준다고 해서 내려왔더니, 절간 고구마창고에서 며칠 동안 있는지 모른다.
진식이 엄마는 지난 11월 마을에 들이닥친 토벌대들에게 죽었다. 토벌대는 집에 들어와 엄마를 마당으로 끌어내더니 바로 총을 쐈다.
진식이 아버지는 진식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이제 진식이는 혼자가 되었다. 그래서 영진이가 지슬밥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할 말이 없어 입 다물고 있었다.
“너희들은 어디서 왔어?”
옆에 수염이 덥수룩한 아저씨가 묻는다.
“남원요. 남원 한남요. 아저씨는요?”
영진이가 처음 보는 아저씨 물음에 답했다. 여기 생활은 처음 보던 자주 보던, 나이가 많든 적든 아무 상관 없었다. 서로서로 의지하며 지내야 하므로 모두가 친척처럼 잘 지냈다.
“아저씨는 언제 올라갔어요?”
“나? 난 좀 일찍 올라갔어. 난 표선 가시리에 사는데 누가 11월쯤 마을에 군인들이 덮친다고 했어. 그래서 10월 중순인가 그때 올라갔지.”
영진이는 아저씨가 궁금했는지 이것저것 물어봤다.
“아저씨는 산에 가서 어디서 지냈어요?”
”난 사라오름에 있었어. 가족들하고 다 같이 있었는데······“
아저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것도 없는 바닥만 긁고 있었다. 사실 아저씨 가족은 군인들을 보고 도망치다 산에서 이미 죽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창고 생활보다 더 힘들었다.
창고 안 사람들은 언제 불려 나갈지 몰라 항상 초조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고문으로 너무 힘들어서 빨리 불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을 15년밖에 살지 않은 영진이와 진식이는 이런 상황이 너무 두렵기만 하다. 이 아이들은 아직 죽음이 뭔지 모른다.
| 절간 고구마창고에서에서 일어난 일을 소설로 구성 |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아래,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거침없다. 물줄기는 떠난 그들의 한 맺힌 가슴을 뚫어주는 듯하다. 물줄기가 바위에 닿으며 울리는 외침은 절규가 되어서 들린다. 삶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순간, 그들도 육지 마지막 끝에 서 있다. 더 이상 디딜 수 없는 발은 허공에 뜨며, 몸도 같이 허공에 뜬다. 그들은 깊은 바다로 흘러갔지만, 그들의 눈물은 물줄기가 되어 마르지 않고 쏟아진다.
잡혀 온 주민으로 점점 가득 찬 각종 창고
정방폭포는 천지연폭포, 천제연폭포와 함께 제주 3대 폭포로 지정되어 있다. 천혜의 비경을 자랑하는 정방폭포는 서귀포를 대표하는 관광지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이 바다로 바로 들어가는 곳은 정방폭포가 국내에서 유일하다. 정방폭포는 1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으며, 큰 낙차로 인해 물보라가 그치지 않는다. 마치 뜨거운 도심 그늘막에서 뿜어주는 물보라를 연상케 한다.
폭포수도 어느 하나 빠지지 않지만, 폭포에서 들려주는 폭포수 소리 또한 일품이다. 또 폭포 양옆 수직으로 솟아오른 주상절리는 사람들 시선을 사로잡는다. 정방폭포는 서귀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관광지다.
서귀포항이 있는 서귀리(현 송산동)는 산남(한라산 남쪽) 지역 중심지였다. 남제주군청, 서귀면사무소, 서귀포경찰서가 있어 제주읍 관덕정과 함께 행정 중심지였다. 각종 행정 시설이 모여있는 서귀리는 토벌대 주둔지이기도 했다. 토벌대는 행정 시설을 통해 각종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고, 주민 동향을 살필 수 있었다. 그리고 서귀포경찰서가 있어 토벌에 필요한 작전 협조가 잘 이뤄졌다.
서귀리 정방폭포는 일제 강점기부터 운영했던 전분 공장이 있었다. 따라서 전분을 만드는 재료를 보관하는 농회창고, 감자창고, 절간 고구마창고 등 큰 창고들이 많았다.
1948년 10월 17일 소개령(疏開令)이 중산간마을에 내려졌다. 일부 소개령을 따르지 않은 주민은 한라산이나 마을 인근 오름, 궤(굴) 등으로 도망 다녔다. 혹독한 한라산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그나마 덜 추운 곳을 찾아 옮겨 다니다 잡혀 오거나, 먹을거리를 찾아 마을에 잠시 내려왔다가 잡히면 농회창고로 끌려왔다. 농회창고는 잡혀 온 주민으로 항상 가득 차 있었다.
농회창고로 끌려온 주민은 토벌대에 취조를 받았다. 말이 취조이지 혹독한 고문과 모진 구타가 매일 자행됐다. 고문에는 남녀가 따로 없었다. 초토화작전 이후 소개령에 따르지 않다가 잡혀 온 주민 중 여성은 산에서부터 옷을 벗겨 이송하기도 했다. 취조가 끝나면 즉결 처형자로 분류됐다. 즉결 처형자는 정방폭포나, 소낭머리 또는 인근 절벽에서 총살됐다.
1949년 3월 ‘선무공작’으로 하산한 산남 지역 주민이 농회창고에 수감됐다. 서귀리 주민뿐만 아니라 남원면, 표선면, 중문면, 안덕면과 멀리는 대정면에서도 잡혀 왔다. 산남 지역은 성산읍을 제외하고 모두 정방폭포 창고로 잡혀 왔다.
선무공작으로 하산한 주민은 제주읍(현 제주시)과 서귀포읍(현 서귀포시) 두 군데로 나뉘어 수용됐다. 제주읍은 주정공장 수용소, 농업학교, 일도리 공회당 등에 수감됐고, 서귀포읍은 농회창고와 감자창고, 단추공장에 수감 됐다. 단추공장은 일제 강점기 소라껍데기를 이용해 단추를 만들었던 공장이었다. 수감자는 배고픔에 하루하루를 버티기 너무 힘들었다. 낡은 깡통에 죽을 주면 서로 조금씩 나눠 먹었다. 그 와중에 주민은 계속 죽었다. 이미 부상을 당해 들어온 사람도 있었고, 고문으로 죽는 사람도 있었고, 굶어 죽는 사람도 있었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밟은 땅, 정방폭포와 소낭머리
정방폭포와 소낭머리를 잇는 절벽은 산남 지역 최대 학살터였다. 지금 정방폭포와 소낭머리는 나무와 풀이 우거져 사람이 들어갈 수 없다. 하지만 4·3 당시 창고 건물 몇 채가 전부였고 대부분 벌판이었다. 벌판 끝은 수십 미터 높이를 가진 폭포가 있었다. 토벌대가 이곳을 학살터로 선택한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시신을 쉽게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절벽에서 총을 쏘면 절벽 아래 바다로 떨어져 눈앞에 시신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한국전쟁 발발 후 예비검속으로 끌려온 주민도 이곳에서 학살됐다. 서귀리 주민은 매일 같이 총소리를 듣고 살았고 하루하루가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1948년 11월 7일 서귀리는 무장대에 대대적인 습격을 받았다. 무장대는 서귀포 중심가를 습격해 민가 80여 채를 방화하고 발전소를 습격했다. 다행히 토벌대의 신속한 행동으로 관공서는 방화를 피했지만, 발전소에서 토벌대와 무장대 간의 교전이 일어났다. 무장대는 경찰 1명, 주민 7명을 살해하고 도망갔다. 양측의 교전으로 토벌대 1명이 부상 입고 무장대 2명이 죽었다. 이 사건은 토벌대를 자극하는 사건이 되었다.
토벌대는 도망가는 무장대를 쫓기 시작했다. 토벌대는 서귀리에 인접해 있는 서홍리(현 서홍동), 동홍리(현 동홍동), 토평리(현 토평동) 등 서귀포 중산간 마을을 수색했다. 그 과정에서 죄 없는 주민이 대거 토벌대에 끌려왔다. 토벌대의 분풀이식 체포였다. 체포된 주민은 그 자리에서 학살되거나 끌려왔다. 끌려온 주민은 농회창고, 단추공장 등에서 고문과 구타를 당한 후 정방폭포와 소낭머리에서 학살됐다. 무장대 습격이 없었다면 학살도 없었다. 이 일만 보더라도 토벌대와 무장대 사이에서 죄 없는 주민이 얼마나 많이 희생되었는지 알 수 있다.
1948년 12월 14일 남원면에 뒤늦게 소개령이 내려졌다. 11월 13일 초토화 작전으로 소개령이 내려진 것을 보면, 남원면은 한 달이나 늦게 소개령이 내려졌다. 소개한 지 3~4일이 지난 후 토벌대는 마을 주민을 한곳에 불러 모았다. 그중에서 40여 명을 남원지서에 구금했다. 다음 날, 지서에 구금된 주민을 보고 두려웠던지, 주민 30여 명이 스스로 찾아와 자수했다.
토벌대가 마을에서 40여 명을 붙잡았고, 그것을 본 주민 30여 명이 스스로 자수했다. 바늘이 여러 개 달린 낚싯줄을 물에 넣어보니, 생각지 않게 여기저기서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홀치기 낚시를 빗대 이 사건을 ‘홀치기 사건’이라고 한다. 남원지서에 구금된 70여 명은 정방폭포로 끌려와 학살됐다.
정방폭포와 소낭머리에서 가족이 희생된 많은 유족은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이유는 토벌대가 시신 수습을 허락하지 않았다. 유족은 1년이 지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어느 날 현장에 도착해보니 시신이 부패하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시신들이 겹겹이 쌓여있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일부는 바다에 떠내려간 시신들도 있었다.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유족은 비석을 세워 혼을 달랬다. 그리고 일부 유족은 희생자 옷, 물품을 넣고 봉분을 만들어 ‘헛묘’를 조성했다. 산남 지역에서 가장 많이 희생된 정방폭포에서 11월 한 달 동안 10회 이상 학살이 있었다. 그리고 희생된 주민은 240여 명이다.
예비검속자들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거쳤던 절간 고구마창고
절간 고구마창고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군경에 의해 예비검속으로 많은 주민을 수감했던 곳이다. 예비검속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요시찰인(要視察人)’들이 북한으로 넘어가거나, 북한에 협조할 것을 염려했다. 요시찰인은 사상이나 보안의 문제가 있어 국가가 감시해야 할 사람이다. 주로 보도연맹원, 좌익세력, 4·3으로 조사를 받았던 주민이었다.
서귀포경찰서는 1950년 6월부터 8월까지 서귀면, 남원면, 중문면에 거주하는 요시찰인을 예비검속 했다. 예비검속은 경찰이 검속하고 군이 학살했다. 즉, 경찰이 잡아 오면 해병대가 총살했다. 하지만 서귀포는 경찰 외에 일반인들도 예비검속에 가담했다. 경찰서나 경찰지서, 출장소에서 잔심부름하는 급사가 가담했다. 심지어 리사무소 직원이나 매일 얼굴을 보며 살던 마을 이장도 가담했다. 집으로 찾아온 가족이 리사무소 직원을 따라나섰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예비검속된 주민은 절간 고구마창고에 구금됐다.
예비검속자들 취조 내용은 주로 4.3 당시 남로당에 가담했는지, 토벌대를 방해할 목적으로 도로를 차단했는지, 통신 방해를 위해 전신주를 훼손했는지, 무장대에게 쌀을 줬는지 등이었다. 그냥 책상에 앉아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 취조가 아닌, 혹독한 고문과 구타의 연속인 취조였다. 한국전쟁 발발 후 예비검속이 일어났으니 이미 지난 과거를 다시 취조하는 셈이었다.
그와 달리 아무 근거 없이 개인적인 감정으로 억울하게 예비검속된 주민도 상당수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사건은 서귀면장이 예비검속되어 희생된 사건이었다. 강성모 서귀면장은 주민을 대표해 해병대 부당함에 맞서다 검속됐다. 서귀포에 주둔하고 있던 해병대는 주민과 마찬가지로 식량이 넉넉지 않았다. 해병대 관계자는 부대원들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어느 날 면장을 불러, 소 몇 마리와 많은 고사리 등 식량을 내놓으라고 했다. 면장은 반대 의사를 전하며 주민에게 민폐를 그만 끼치라고 했다. 해병대 요구에 따르지 않은 대가는 학살이었다. 그 후로 강성모 면장은 ‘고사리 면장’으로 불렸다.
절간 고구마창고에 구금된 사람들은 아침과 저녁, 하루 두 번 식사가 제공됐다. 그마저도 가족이 넣어주는 음식으로 제공됐다. 창고는 면적에 비해 월등히 많은 사람이 구금되어 있어 환경이 매우 나빴다. 병에 걸려 죽는 사람, 이미 부상으로 수감된 사람, 젖먹이 갓난아이, 노인 등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수감되어 있었다. 가족이 주기적으로 사식과 옷을 넣어주던 어느 날은 창고가 텅 비어 수감자들이 없다고 돌아가라고도 했다. 그때는 이미 학살당한 후였다.
절간 고구마는 고구마를 적당한 두께로 잘라 햇빛에 말린 것이다. 절간 고구마는 주민의 소중한 겨울 식량이었다. 한때 가을에 수확한 먹거리들로 가득 찼던 창고는 주민 구금시설과 고문 장소로 이용됐다.
작가 생각
정방폭포에 주차하고 계단으로 내려갔을 때, 첫 느낌은 웅장함 그 자체였다. 시원하게 내리꽂는 폭포수는 과연 일품이었다. 내가 정방폭포를 좋아하는 이유도 폭포수 때문이다. 나는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진을 찍어 가족에게 보내고, 지인에게도 보냈다. 오늘따라 날씨가 너무 좋아 유난히 파란 하늘이었다.
4·3 유적지는 봐도 봐도 분노스럽다. 내가 만약 당시에 절간 고구마창고에서 수감 되어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왕 죽을 거 경찰과 시원하게 맞짱 한번 뜨고 죽었을까? 아니면 끝까지 잘못 없다고 항변했을까? 그 순간은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모를 것 같다. 인간의 잔혹함 앞에 한없이 무기력해지는 그 순간, 절망만이 찾아왔을 것이다.
4·3이 한창이던 때 이곳은 산남 지역 최대 학살터였다. 그들은 토벌대에 왜 잡혔고, 왜 죽으로 온 것인지 분노할 힘마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모진 고문과 구타를 견디지 못해 빨리 죽여주길 기다렸는지 모른다. 총을 맞으면 더 이상 힘들지 않을까? 절벽 아래로 떨어지면 아프지 않을까? 손이 묶인 채 힘없이 걸어가면서 온갖 생각이 다 들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오랫동안 하다 보니 주차장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너무 힘들었다. 중간에 포토존이 한군데 있길래 들러 잠시 쉬었다. 사진을 찍을 생각은 없었고 다시 한번 정방폭포 높이를 쳐다봤다. 절벽 끝에 서 있는 것도 무섭지만 아래로 떨어질 것을 생각하면 공포감은 배가 됐을 것이다. 나는 ‘그날을 잊지 않겠다, 정방폭포!’라고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기며 다음 유적지 큰넓궤로 차를 돌렸다.
[ 정방폭포 학살터 유적지 정보 ]
주소 l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 278
문의 l 정방폭포 관리사무소 064-733-1530
기타 l 운영시간 9:00~17:30
주차장 있음
입장료 있음
[ 소낭머리 학살터 유적지 정보 ]
주소 l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귀동 94-1
문의 l 제주특별자치도청 4·3 지원과 064-710-8452
기타 l 주차장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