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무리가 뛰어오고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팔에 뭔가를 든 것이 보였다. 매끄럽지 못한 울퉁불퉁한 몽둥이였다. 몽둥이를 든 팔근육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저기에 맞으면 즉사할 것 같았다. 마당에서 놀고 있는 나는 어찌할지를 몰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그들은 군복을 입었지만, 이름표도, 계급장도 없었다. 점점 가까워졌다. 눈에는 살기가 느껴졌다. 분명 살기였다.
이들은 동네에서 깡패라고 불리던 서북청년회였다. 깡패들은 난폭하고 잔인하기로 소문났다. 얼마 전 옆집 삼촌도 학교로 끌려갔다가 아직 못 돌아왔다.
깡패들은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마당에 있는 장독을 발로차 깨버리고, 잡히는 것들은 모조리 몽둥이로 내리치고 차버렸다. 그리고 소리쳤다.
“김상만, 어디 있어! 당장 나와!”
삼촌을 찾고 있었다. 한 명이 신발을 신은 채 툇마루로 뛰어올라 문을 벌컥 열었다. 방 안에 있던 삼촌은 순식간에 끌려 나와 마당으로 던져지듯 굴렀다. 그러자 마당에 기다리던 깡패들이 삼촌을 몽둥이로 사정없이 내려치고 있었다.
키가 크고 항상 깔끔하던 삼촌 모습은 점점 없어졌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코와 입에서는 피가 흠뻑 나와 바닥이 흥건히 젖었다. 깡패들은 삼촌의 머리를 감싸고 있는 손, 잔뜩 웅크려 있는 등, 바둥거리는 다리 등 어느 한군데 빠지지 않고 마구 매질했다. 매질로 힘을 뺄 때로 다 빼놓더니, 겨우 일으켜 끌고 갔다.
끌려가는 이유와 어디로 가는지 아무 말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알려주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모두 동국민학교로 끌려갔다. 마을에 깡패들이 온 후로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삼촌 소식은 며칠 동안 들리지 않았다.
어느 날 마을 주민 모두 터진목으로 모였다. 깡패들이 부른 것이었다.
조금 있으니 일출봉 쪽으로 사람들이 줄줄이 묶여 오고 있었다. 한 대여섯 명 정도로 보였다. 몰골이 말이 아니고 옷차림도 형편없었다. 그 안에서 키가 장대만큼 큰 사람이 보였다. 삼촌이었다. 중학생 제민이는 삼촌을 한눈에 찾았다.
“삼······”
제민이는 삼촌을 부르려고 하자 엄마가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해!”
엄마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제민에게 말했다. 제민이는 반가웠지만, 반가워하거나 안길 수 없었다. 모른척해야 했다. 이유는 없었고 그냥 그래야만 했다.
“엄마, 삼촌이 이상해. 옷도 이상하고 수염도 안 깎았어.”
제민는 아무것도 모른 채 엄마에게 보이는 그대로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엄마는 무슨 일이 있었고, 무슨 일이 있을지도 알고 있었다. 그저 그때가 되면 제민이 눈만 가리려고 준비 중이었다.
| 성산에서 일어난 일을 소설로 구성 |
제주 동쪽 끝. 탁 트인 바다 위에 웅장하게 앉아 있는 일출봉. 푸른 바다 위로 솟아오르는 붉은 태양이 잠시 일출봉에 담긴다. 모든 것을 불태울 것 같은 뜨거운 태양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기도한다. 70여 년 전 그들도 기도했다. 내일은 제발 해가 뜨지 말라고. 해가 뜨면 누군가 또 죽어야 한다. 평범했던 마을은 삽시간에 학살터가 됐다. 터진목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파도는 변함없다. 그날 떠올랐던 태양은 오늘도 떠오른다.
낯선 사람들에 지배당한 성산 마을
성산 앞바다에서 어둠을 밀어내며 솟아오르는 일출을 보면 장관이 따로 없다. 역광이 된 일출봉은 어떻게 찍어도 한 편의 작품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성산에 아름다운 장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4·3의 잔혹함 중 서북청년회 공포는 성산에서 유독 심했다. 성산은 서북청년회로 구성이 된 이른바 ‘특별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서북청년회가 주둔하고부터 마을에서 비명이 들리는 날이 잦았다. 서북청년회의 잔혹함은 치가 떨릴 정도였다. 한번 끌려가면 몇 달째 못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족의 생사를 알 수 없는 막막함을 여러 사람이 느꼈다.
성산동(東)국민학교(현 성산초등학교)에 주둔했던 특별중대는 성산면뿐만 아니라 구좌면, 표선면을 관할했다. 성산동국민학교 건너 감자창고는 세 개 면에서 끌고 온 주민을 수감하던 곳이었다. 그 안에서 이뤄진 혹독한 고문과 무자비한 구타는 죽기 전, 진을 빼놓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아는 것이 있으면 그럴듯하게 이야기하겠지만, 그들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어 고통만 받고 있었다. 억울하게 끌려온 주민은 이 상황이 빨리 끝나기만 기다렸다. 다음 차례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어쩌면 고문과 구타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감자창고에서 이뤄진 혹독한 고문과 모진 구타가 끝나면 성산 입구 ‘터진목’으로 끌고 갔다.
터진목과 우뭇개동산은 4·3 당시 성산 학살터였다. 터진목은 ‘터진 길목’이라는 의미로 성산 입구 항아리 병목처럼 좁은 곳이다. 이곳은 1940년 초까지만 해도 밀물과 썰물로 물길이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하던 곳이었다. 이처럼 성산으로 들어오는 길은 언제나 열려 있지 않았다. 1940년대에 주민과 당국이 돌을 쌓고 흙을 메워 도로를 만들어 지금처럼 드나들게 됐다.
우뭇개동산은 일출봉 매표소 왼쪽에 있는 잔디광장이다. 우뭇개동산 아래는 이국적인 풍경을 가진 ‘우뭇개 해안’이 있다. 검은 해안이 인상적이며, 성산 일출봉을 찾는 많은 관광객이 빠지지 않고 들리는 곳이다. 우뭇개 해안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성산 일출봉 핫스폿 중 한 곳이다.
서북청년회는 터진목 해변으로 끌고 온 주민에게 총알도 아깝다며, 죽창과 대검으로 찔러 죽이기도 했다. 끌려온 주민은 내 앞에서 이웃 주민이 죽창과 대검에 찔리며, 피를 뿜어내는 잔혹한 장면을 목격해야만 했다. 곧 죽을 운명이지만 눈앞에서 쓰러지는 모습은 더욱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차마 두 눈 뜨고 쳐다보지 못했다. 겁에 질릴 대로 질린 일부 주민은 서북청년회에게 제발 총으로 죽여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서북청년회 만행은 주민에게 상당한 공포를 줬다.
학살 빌미를 만들기 위한 다이너마이트
1948년 12월 29일 서북청년회는 성산 오조리 주민을 갑자기 마을 공회당 앞으로 불러 모았다. 모인 주민에게 다이너마이트를 하나 집어 들고 사용법을 아는 주민은 손을 들라고 했다. 20여 명이 손을 들었다. 주민은 서북청년회에 협조하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손을 들었다. 그렇게 해야 목숨을 지킬 수 있고 덜 괴롭힐 것 같았다.
주민 몇몇은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해야 하는데 서북청년회가 정식 군인이 아니라서 사용법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영문도 모른 채 손든 주민은 다이너마이트 사용에 자신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서북청년회는 주민 생각과 완전히 달랐다. 손을 든 20여 명의 주민은 성산동국민학교 서북청년회 본부로 끌려갔다. 성산동국민학교는 아주 모질고 혹독하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1949년 1월 2일 다이너마이트 때문에 끌려온 주민 20여 명은 우뭇개동산에서 학살당했다. 더 잔인한 것은 마을 주민 1,000여 명을 학살 현장에 데려와 직접 보라고 시킨 것이다. 도저히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짓이었다. 주민에게 잔인함을 직접 보여주는 것은 하나의 경고였다. 누구나, 어제든지, 지시를 거부하면 이렇게 된다는 근거 없는 권력의 횡포였다.
그럼, 서북청년회가 들고 있던 다이너마이트는 어디서 난 것일까? 사실 다이너마이트는 경찰 외곽 조직 ‘민보단’에서 운영하던 것이었다. 민보단은 무장대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조를 이뤄 야간 보초를 섰다. 첫 근무에 투입되는 근무자는 본부에 들러 다이너마이트를 받아 근무에 투입됐다. 동틀 무렵 근무를 서는 마지막 근무조는 들고 있던 다이너마이트를 본부에 반납하고 집으로 가야 했다.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다이너마이트를 다룰 줄 아는 주민은 몇몇뿐이었다. 다이너마이트는 보초 근무에 투입되면 초소장들만 들고 있었다. 던지기 약으로 불리던 다이너마이트는 시간 계산을 잘 못 하면 오히려 나를 공격할 수 있는 아주 위험한 폭약이었다. 그래서 초소장들이 다뤘다.
다섯 군데 초소의 초소장들은 모두 어업에 종사하는 선주(船主)들이었다. 4·3이 일어나기 전 다이너마이트가 고기잡이에 쓰이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다. 다이너마이트는 일본군이 패전 후 돌아가면서 남겨 놓고 간 것이었다. 이를 어민들이 물고기 잡이용으로 썼다. 때로는 사용법을 잘 몰라 어민이 죽거나 다치기도 했다. 나중에는 어장이 심각하게 훼손되므로 불법으로 간주해 경찰과 어업조합 지시로 사용하지 않았다. 다이너마이트는 어업용으로 사용하고 남은 것을 민보단이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이너마이트는 2연대로 교체되기 전 9연대가 있을 때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9연대는 다이너마이트를 보초 근무 시 경비용으로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서북청년회는 전임 9연대로부터 인계받은 것이 없었으며, 자신들을 죽이기 위해서 가지고 있다고 모함했다. 그래서 주민을 모아 이렇다 저렇다 설명 없이 다이너마이트 사용법을 물어본 것이다. 어쩌면 다이너마이트는 주민을 학살하기 위한 명분일지 모른다.
북에서 도망 와 남에서 활기 찾은 서북청년회
1945년 8월 24일. 38도선 이북의 소련군정은 미군정보다 빠르게 시작됐다. 소련군정이 들어선 북한은 국내에서 정부 역할을 했던 건국준비위원회를 해체했다. 그 후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로 이름을 바꿔 김일성을 위원장에 앉혔다. 소련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친일파 척결, 대지주들의 일정 면적 이상 토지 몰수 및 농민 무상 분배, 소작제 폐지, 개신교 박해 등 사회 전 분야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먼저 위원회는 몰수한 토지를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는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농민들은 갑자기 땅이 생겨 좋았다. 반면 땅을 빼앗긴 지주들의 반대는 만만치 않았다. 토지개혁은 친일파를 청산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됐다. 당시 많은 지주가 친일파였기 때문에 토지개혁으로 자연스레 친일파 재산을 몰수하는 효과도 불러왔다.
이처럼 토지개혁에 불만을 품은 지주들과 친일파로서 청산 대상이 된 자들, 소련군정의 탄압받던 기독교인들은 모든 재산을 그대로 두고 남한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소련군정과 달리 미군정은 친일파 척결이라는 국민 기대와 달리, 친일파를 그대로 등용했다. 북한 개혁으로 남한으로 내려온 이들에게 남한은 기회의 땅이었다.
1946년 11월 30일 서울에서 서북청년회가 결성됐다. 북한 개혁으로 남한에 내려와 거주하는 평안도 청년이 중심이 됐다. 청년이 만든 평안청년회, 대한혁신청년회, 북선청년회 등 일곱 개 단체가 통합해 ‘서북청년회’의 이름으로 결성됐다. 서북청년회는 반공을 앞세워 남한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미군정 비호 아래 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을 잡아 고문과 구타를 하고 학살하는 등 백색테러를 자행했다. 미군정 날개를 단 서북청년회는 물불 가리지 않는 만행을 저지르며,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공포스러운 단체가 됐다.
서북청년회는 1947년 3·10 총파업 후 미군정 지시로 응원 경찰에 편입되어 제주로 내려왔다. 자세한 상황을 모르던 서북청년회는 파업에 참여한 주민을 체포하고 고문했다. 고문받던 주민이 죽기도 했다. 주민이 고문으로 죽었음에도 그들에게 아무도 책임을 묻지 않자, 만행은 습관처럼 자행됐다. 서북청년회가 저지른 각종 만행은 4·3을 일으키는 원인이기도 했다. 제주에 첫발을 디딘 서북청년회는 부족한 국가 공권력을 채우며, 자기들만의 권력으로 세상을 휘젓고 다녔다. 미군정과 이승만의 비호로 무소불위 권력을 휘둘렀다. 서북청년회 행동은 사태를 악화시키고 제주 민심을 자극했다.
1947년 11월 2일 서북청년회 제주도본부가 결성돼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제주도 단장은 제주를 ‘조선의 작은 모스크바’로 정하며 본격적인 빨갱이 사냥에 나섰다. 서북청년회는 보통 청년이 만든 하나의 청년 단체에 불과하다. 하지만 제주로 내려간 서북청년회는 달랐다. 반공정신으로 똘똘 뭉친 이들은 민간단체로써, 국가가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는 비공식적인 권력으로 자리 잡았다.
서북청년회는 군인과 경찰처럼 급여를 받지 못했다. 이런 서북청년회가 생계를 유지하려면 어떻게 했을까? 그들은 민가에 들어가 돈이나 음식을 약탈하거나, 엿을 팔고, 생활용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주민 중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강제로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생계를 유지했다. 무급으로 활동하는 그들은 무전취식은 기본이었다. 심지어 관공서에 자신들 의식주를 해결하라는 요구를 하고, 수용되지 않자 공무원을 학살하기도 했다.
일개 청년 단체에 불과한 서북청년회는 왜 이렇게 됐을까. 그들은 3·10 총파업 때 제주에 내려와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그때 제대로 된 처벌을 받았더라면 감히 이런 야만적인 행동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안하무인이 된 것은 미군정이나 이승만 대통령 묵인과 비호 없이는 불가능했다. 서북청년회가 저지른 만행은 미군정과 이승만 대통령이 저지른 만행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된 안하무인 서북청년회
서북청년회가 저지른 만행은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비윤리적인 경우가 많았다. 이유 없는 연행과 남녀를 가리지 않는 끔찍한 고문, 혹독한 구타 그리고 학살로 이어지는 비윤리적인 행동을 서슴없이 자행했다. 이들은 자신들 요구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빨갱이로 몰았다. 빨갱이로 몰리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고문과 구타를 했다.
서북청년회의 여성에 대한 범죄는 악명 높았다. 강간, 성고문, 유흥에 동원 후 학살 등, 여성을 상대로 한 각종 범죄는 인간으로서 상상하기 힘든 일들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조금의 죄책감과 죄의식은 느끼지 않았다. 한편, 괴롭힘이 너무 심해 마지못해 자청하여 서북청년회 단원과 결혼한 경우도 있었다. 내 가족을 지키려 내 한 몸 희생하는 경우였다. 한 명의 희생으로 가족 모두를 지키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어느 가족을 지정해 마음에 드는 여성이 있으면 그 여성만 살려두고, 나머지 가족을 학살해 여자를 데리고 살았다. 원수와 결혼해 같은 이불을 덮고 산다는 것은 매우 비참하고 끔찍한 일이었다. 그 손에 희생된 가족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강제 결혼한 부부들은 4·3이 끝나고 세월이 한참 지나도 부부가 같이 외출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서북청년회는 주민에게 태극기나 이승만 대통령 사진을 강매했다. 주민에게 이승만 대통령은 증오 대상이기도 했지만, 하루하루 먹고살기 힘든 상황에 대통령 사진이 꼭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서북청년회는 이를 이용했다. 주민의 구매 거부는 이들의 앙심을 품는 빌미가 됐다. 앙심을 품고 있던 서북청년회는 언젠가 털끝만 한 문제라도 생기면, 묵은 감정부터 끌어올렸다.
묵은 감정은 사건으로 엮기 좋은 재료였다. 이렇게 엮이면 빨갱이가 되어 창고로 끌려가 구타와 고문을 견뎌야 했다. 서북청년회는 어떠한 경우라도 실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행동이 그들만의 합법이었다. 실수로 죽이든 증거가 있어 죽이든 빨갱이로 몰면 그만이었다. 이런 과정들은 그들만의 시스템화가 되어버렸다.
때로는 돈을 원해서 일부러 잡아가기도 했다. 살림에 여유가 있는 집은 토벌대에 가족이 잡혀가면 상납해서 풀려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서북청년회도 이를 노렸다. 말도 안 되게도 그들에게는 뇌물조차 합법이었다. 그들 입에서 나오는 말이 법이었고, 행동이 정의였고, 구타와 고문이 재판이자 형벌이었다.
서북청년회는 자금 모금을 위해 돈이 되는 일은 모두 했다. 돈만 된다면 학살, 방화, 협박 등 물불 가리지 않고 모두 했다. 제주에서 일어나는 서북청년회 만행이 얼마나 심각했으면, 미군 방첩대가 경고해 사과까지 하는 일이 벌어졌다. 서북청년회가 내세운 반공사상은 온데간데없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통제되지 않는 폭력 집단이 되어버렸다.
4개월간 피비린내 가득했던 성산
성산에서 청년 60여 명이 학살되는 일이 발생했다. 4·3이 일어나기 전 1948년 2월 성산에서도 남한 단독 정부 수립 반대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졌다. 시위 후폭풍은 거셌다. 경찰은 시위에 참여했던 주민 검거에 열을 올려 하루가 멀다고 많은 청년을 검거했다. 이 무렵 성산 청년 60여 명도 경찰에 검거됐다. 검거 후 조사를 마친 청년은 남로당을 탈퇴하고, 우익단체 대동청년단에 가입한다는 성명서에 도장을 찍고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청년은 그때 찍은 도장이 화를 부를지 전혀 몰랐다. 경찰에서 풀려날 때 제출한 남로당 탈퇴 명단이 결국 문제가 됐다.
8개월쯤 지난 10월 25일, 성산에서도 포고령으로 토벌 작전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토벌대는 남로당 탈퇴 명단을 입수하여 명단에 적힌 청년을 하나둘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좌익 단체 탈퇴 후 우익 단체에 가입한 청년의 전향은 크게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서북청년회는 전향 따위는 관심 없었다. 그들이 눈여겨 본 것은 전향이 아닌 남로당 가입 이력이었다. 검거된 청년은 검거 이틀만인 10월 27일 터진목에서 학살됐다.
1948년 11월 6일. 수산리 마을에 토벌대가 들이닥쳤다. 토벌대는 마을 주민을 수산국민학교(현 수산초등학교)로 모두 모았다. 토벌대는 모여있는 주민을 향해 며칠 전 죽은 19세 청년을 거명하며 아느냐고 물었다. 앳되어 보이는 청년이 영문도 모른 채 손을 들고 자신의 형이라고 했다. 토벌대는 그 자리에서 손을 든 청년에게 총으로 사살했다. 청년의 죽음도 마음 아프지만 더 마음 아픈 것은 바로 옆에 있던 엄마가 아들 죽음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듬해 1949년 1월 9일 성산서(西)국민학교에서 그림이나 글을 똑같이 여러 장 찍어 낼 때 쓰는 등사판이 없어졌다. 이를 알게 된 서북청년회는 무장대 삐라 제작에 협조하기 위해 빼돌렸다고 모함했다. 이 사건으로 교직원 21명이 끌려갔다. 끌려간 교사들에게도 혹독한 고문과 모진 구타가 여지없이 자행됐다. 교직원들은 1월 9일과 13일, 2월 1일과 5일 네 차례에 걸쳐 터진목에서 학살됐다.
연인 관계였던 교사의 가슴 아픈 일도 있었다. 어느 학교 교사는 함께 끌려온 자기 약혼녀 덕분에 목숨을 유지한 경우도 있었다. 끌려온 교사는 이유도 모른 채, 운 좋게 한 달 만에 지옥에서 풀려났다. 풀려난 후 먼저 약혼녀를 찾아갔다. 하지만 약혼녀를 만날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다.
알고 보니 약혼녀는 약혼남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자신을 겁탈하려던 서북청년회 간부와 결혼했다. 약혼녀는 사랑했던 약혼남을 지키려 자신을 희생해, 원치 않는 결혼을 했다. 그것을 알게 된 약혼남도 가슴이 미어졌다. 약혼남은 차라리 그때 죽었더라면 이런 고통은 느끼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자책했다.
1949년 1월 13일 고성리와 난산리 주민 서른세 명이 터진목에서 보복 학살을 당했다. 그들은 서북청년회가 팔던 태극기나 이승만 대통령 사진을 구매하지 않았다. 주민은 빠듯한 살림에 태극기나 사진을 살 형편이 안 됐다. 형편이 된다 해도 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자신의 가족을 죽이고 주민을 못살게 구는 서북청년회를 도와줄 이유가 없었고, 이들을 비호하는 이승만 대통령 사진을 살 이유는 더욱더 없었다. 그리고 태극기를 구매하지 않았으니 여지없이 빨갱이로 몰아 학살했다.
같은 날 고성리 청년 28명이 다른 일로 터진목에서 학살당했다. 마을의 한 청년은 4·3이 발발하기 전 목포형무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4.3이 한창이던 때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예사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고 한때 수형자 신분이었던 자신은, 조용히 집에서 지내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서북청년회는 청년이 가만히 집에 숨어지낸다고 판단했고 이를 불순하게 여겼다.
청년은 수형자 신분이었던 자신이 마을에 돌아다니면 어떤 일을 도모하고, 선동하며 다닌다고 할까 봐 그냥 조용히 지냈다. 살고 싶어서 그랬다. 하지만 결과는 학살이었다. 문제는 그가 죽고 난 후부터였다. 마을 청년 28명에게 앞서 죽은 청년이 집에 숨어 있는 것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았다며 트집 잡아 학살했다. 성산 마을 주민은 서북청년회 때문에 하루하루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언제 깨질지 모를 얼음판 위를 걷는 상황이었다.
2월 1일, 터진목에서 도피자 가족 46명이 학살당했다. 당시 제주 대부분 청년은 토벌대나 서북청년회를 피해 산으로 도망가거나 궤(굴), 곶자왈(숲 덤불)로 숨어 지냈다. 일부는 생계 수단으로, 육지로 가거나 일본으로 밀항해서 마을을 떠났다. 그마저도 형편이 안 되면 집안 마루 밑에 숨어지냈다.
서북청년회는 숨은 가족을 찾기 위해 호구 조사를 했다. 호구 조사는 주민을 피 말리게 했다. 갓난아이가 호적에 올라가 있으면, 그 아이까지 포함해 호적과 대조하며 일일이 머릿수를 셌다. 보이지 않는 가족은 나머지 가족 모두를 학살하게 하는 빌미가 됐다. 가족 중 한 명이 보이지 않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됐다.
서북청년회에게 한 번 끌려가 고문당하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게 나을지 모른다. 고문 방식으로 거꾸로 매달려 뜨거운 물을 코에 붓거나 고춧가루를 탄 물을 들이부었다. 손톱과 발톱에 못질해 어느 한군데 말끔한 곳이 없었으며, 불에 달궈진 쇠로 온몸을 지져 자백받아 학살하기도 했다. 서북청년회의 고문은 일제가 저질렀던 고문만큼이나 잔혹했다.
1948년 10월 27일부터 이듬해 2월 27일까지 4개월 동안 무려 30여 차례, 213명이 학살됐다. 그럴 때마다 10여 명, 20여 명은 물론이고, 작게는 한 명씩, 많게는 46명씩 학살했다. 학살 전 하나의 과정으로 이뤄지는 감자창고 고문으로, 성산 주민은 하루도 쉬지 않고 비명을 들었다. 해만 뜨면 끔찍한 일이 벌어져, 해가 안 뜨길 바라기도 했다. 조용했던 마을은 졸지에 피비린내 진동하는 학살터가 됐다.
작가 생각
4·3 유적지 여행 2일 차를 맞았다. 어제 무거웠던 마음과 달리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숙소 창으로 다가가 커튼을 열었더니 햇살이 강렬했다. 역시 성산답다. 오랜만에 제주 아침이어서 그런지, 잠을 푹 자서 그런지 기분이 좋았다. 짐을 싸서 커피를 사러 카페에 들렀다. 평소 커피 향을 좋아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커피 향이 좋았다. 아마 기분 탓일 거다. 성산일출봉에 도착하니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관광객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성산일출봉을 찍을 때, 사람 한 명 나오지 않게 찍은 것은 처음이었다.
성산을 여행하면서 앞서 봤던 유적지의 토벌대를 잠시 잊었다. 서북청년회 만행이 너무 끔찍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살던 곳에서 많은 불만을 안고 쫓기듯 내려왔으면 열심히 살면 됐다. 하지만 이들은 권력자 비호 아래 하나의 권력이 된 듯, 온갖 횡포를 부리고 만행을 저질렀다. 군경이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도 분노가 차오르는데, 민간인이 민간인을 살해하면 당연히 살인죄로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결과는 매우 아쉽다.
성산에서 나가기 전 터진목에 다시 들렀다. 그리고 먼바다를 보며 어디까지 쓸려갔을지 모를 그들에게 다시 한번 기도를 했다. 그곳에서 서북청년회를 만나면 똑같이 당하지 말라고. 다음은 유적지는 정방폭포다. 나는 시원하게 내리꽂는 정방폭포 폭포수를 너무 좋아한다. 그래서 조금 기대는 됐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다. 그곳에서는 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걱정이다.
[ 성산 터진목 해변 유적지 정보 ]
주소 l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224-1
문의 l 제주특별자치도청 4·3 지원과 064-710-8452
기타 l 주차장 있음
[ 성산 우뭇개 동산 유적지 정보 ]
주소 l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성산리 104-2
문의 l 성산일출봉 관리사무소 064-783-0959
기타 l 주차장 있음
입장료 없음
[ 성산 서청 특별중대 주둔지 유적지 정보 ]
주소 l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성산리 179-4
문의 l 제주특별자치도청 4·3 지원과 064-710-8452
기타 l 주차장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