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는 서로가 마을을 지키는 보초가 되어 경비를 섰다. 경비는 혼자가 아닌 네다섯 명이 섰다. 마을에 청년은 없고 노인과 여자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은지 엄마, 일어나. 지금 나가야 해.”
“네, 알겠어요. 곧 일어날게요.”
“아니야, 지금 일어나야 해. 시간 맞춰 안 나가면 안 순경이 지랄한단 말이야!”
단호했다. 보초 근무 교대를 위해 깨우는 경순 엄마 한마디는 단호했다. 보초 투입에 조금이라도 늦거나, 보초 서다가 졸다 걸리면 느닷없는 몽둥이찜질이 있기 때문이다.
은지 엄마는 낮 동안 했던 고된 밭일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럴 만도 한 게 새벽 2시면 한창 깊은 잠을 자고 있을 때다. 은지 엄마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성안 주민 모두가 같은 처지였다.
“온몸이 너무 아파 죽겠어요. 머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온몸이 너무 아파요.”
“다 그래. 조금만 참자. 나도 오늘 밭에 돌 옮긴다고 무리했는지 허리가 아파.”
은지 엄마는 경순 엄마 위로가 큰 힘이 됐다.
은지 엄마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막상 나가보니 하늘이 너무 예뻤다. 오늘따라 유난히 별이 밝고 많이 보였다. 최근 들어 이런 별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아이~참, 언제까지 이래야 해!”
근무를 마치고 망루에서 내려오는 민철 엄마가 구시렁거리며 내려온다. 민철 엄마는 성안에서도 입이 거칠기로 소문나 있다. 보통 넘어갈 일도 참견해 꼭 따지고 넘어갔다.
“밤새 있어도 쥐새끼 한 마리 안 보이는 구만, 보초는 무슨 보초야!”
“조용히 해, 오늘 안 순경 당직 서는 날이래!.”
겨우 일어나 교대하는 은지 엄마가 손으로 입을 막는다.
“이거 놔! 들으라면 들으라지, 뭐 죽기밖에 더 하겠어!”
민철 엄마는 역시 소문대로 거리낌 없었다.
은지 엄마가 망루에 오르자 유난히 반짝이던 별들이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선흘 하늘 전체가 별로 덮여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하늘을 너무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홀릴 정도다. 요즘처럼 힘들 때면 하늘만 보고 살고 싶다.
“누구야!”
순찰하던 안 순경 목소리가 갑자기 들렸다.
“5호 집 은지 엄마예요”
은지 엄마는 보초를 똑바로 서고 있지 않은 것을 본인도 느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빨갱이 새끼들이 하늘에서 떨어져? 왜 하늘만 쳐다보고 있어!”
“미안해요, 똑바로 설게요.”
막냇동생뻘 되는 안 순경은 성안 주민에게 악독하기로 소문났다. 밥을 차리면 항상 신경 써서 차려야 했고, 반찬도 매일 달라야 했다. 성안 생활하는 주민이 고된 것은 파견 나온 경찰 끼니를 책임져야 하는 것도 한몫했다.
| 낙선동 4·3성에서 일어난 일을 소설로 구성 |
햇살은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바람도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다. 바람을 따라가다 보면 오랜 세월 마을을 지키던 성벽이 나를 기다린다.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돌 하나하나 쌓을 때 그들의 애환이 느껴진다. 서로를 지키려 밤낮 없이 고생했던 흔적들이 돌담 사이에 묻어있다. 찾는 이들은 많이 없지만, 햇살과 바람만이 쉬지 않고 성을 드나든다. 성(城)안 초가는 모두 사라지고 콘크리트가 자리 잡았지만, 웅장했던 성벽만은 그대로다.
소개령으로 대이동을 시작한 중산간마을 주민
1948년 10월 17일 9연대장 송요찬은 제주 전역에 ‘포고령(布告令)’을 내렸다. 포고령 내용은 제주 해안에서 5km 이상 지역에 통행금지를 명령하면서, 이를 어길 시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총살에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다시 말해, 제주 전체 바닷가에서 한라산 방향으로 5km까지는 통행이 되고, 5km 넘는 지역에 다니다 발각되면 무조건 총살한다는 이야기다. 포고령은 중산간마을에 대한 소개령으로 이어졌다.
소개령은 물품이나 시설물 또는 사람이 대상이며, 한곳에 모아져 있는 것들을 옮김으로써 아군 피해를 줄일 수 있다. 또, 적군에게 넘어가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미리 이동시킴으로써, 적군에게 도움 되지 않게 한다. 즉, 한곳에 모인 주민이나 물자들을 분산하는 것이다. 이를 ‘소개(疏開)’라고 하고 이것을 명령하는 것을 ‘소개령(疏開令)’이라 한다.
소개령에 따라 중산간마을 주민은 해안마을로 강제 이주했다. 대부분 청년은 소개령을 거부하고 한라산으로 숨거나 인근 궤(굴)로 숨어 도피 생활을 했다. 토벌대 계획대로라면 중산간마을에는 아무도 없고 마을은 비어 있어야 했다. 포고령은 9연대장 송요찬 입에서 전파되었지만, 그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포고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군 통수권자 이승만 대통령뿐이었다.
중산간마을 주민을 해안마을로 이주시킨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4·3 당시 무장대 근거지는 주로 한라산이었다. 무장대는 한라산과 가까운 중산간마을에 자주 나타났다. 산 생활하면서 식량이 필요하면 마을로 내려와 약탈해서 올라갔다. 이런 과정에서 자신들 요구에 비협조적인 주민을 죽이기도 했다. 결국 토벌대는 중산간마을을 모두 불태워, 무장대가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소개령은 무장대가 중산간마을로 내려오는 것을 막기 위한 작전이었다.
모든 주민이 소개령을 따랐던 것은 아니다. 일부 주민은 소개령을 거부한 채 마을에 남아 있다가 토벌대에 학살당했다. 키우던 가축과 집, 논과 밭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다. 한편,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 일부 마을에 소개령이 전달되지 않거나, 전달되기 전 토벌대가 들이닥쳐 억울하게 학살당하기도 했다. 중산간마을 주민은 이런 잔혹한 모습을 보고 놀라, 해안마을이 아닌 한라산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이듬해 3월 ‘선무공작’으로 하산했다.
희생자 수를 급증시킨 잔혹한 초토화작전
1948년 11월 13일 중산간마을에 ‘초토화작전’이 전개됐다. 초토화작전은 물자, 사람, 시설 등 닥치는 대로 제거하는 작전이었다. 말 그대로 싹 쓸어버려, 초토화하는 작전이었다. 한라산은 지형이 거칠고 궤나 오름이 많아 무장대 소탕이 쉽지 않았다. 초토화작전은 토벌 성과가 미흡해지자 내린 결정이었다. 포고령 발표 한 달여 만에 9연대장 송요찬은 무자비한 작전을 감행했다.
초토화작전은 ‘삼진(三盡) 작전’으로 불린다. 삼진은 ‘죽여 없애고’, ‘태워 없애고’, ‘굶겨 없앤다’라는 의미다. 죽여 없애는 것은 무장대를 죽여 없애고, 무장대에 동조했거나 협조한 주민을 죽여 없애고, 무장대에 동조하거나 협조할 가능성이 있는 주민을 죽여 없애는 것이다. 가족 중 한 명이 무장대에 합류한 경우, 나머지 가족은 의심만으로 몰살당했다. 무장대에 동조나 협조했다는 증거나 근거 없이 학살당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태워 없애는 것은 무장대 근거지를 태워 없애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죽여 없애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장대에 동조했거나 협조한 주민이 살고 있는 집 또한 태워 없앴다. 그리고 들판에 자란 식량이 있으면 그마저도 무장대 식량이 될 수 있어 모두 태워 없앴다.
굶겨 없애는 것은 무장대를 고립시켜 굶겨 없애는 것이다. 무장대는 한라산에서 식량 수급이 원활하지 않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마을에 내려와 식량을 약탈해 갔다. 초토화작전 기간에 중산간마을을 모두 불태웠기 때문에 무장대는 점점 고립되어 가고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무장대와 주민을 분리해 놓음으로써 무장대를 굶겨 없앨 수 있었다. 삼진 작전 주목적은 닥치는 대로 없앤다는 것이다.
주민은 없고 무장대만 남아있는 중산간마을은 ‘적성(敵性) 구역’이 됐다. 초토화작전은 적성 구역에 대한 강경 진압 작전이었다. 작전에 앞서 10월 5일 제주 출신에서 육지 출신 제주경찰청장 교체, 경찰청장 교체로 인한 서북청년회 대거 입도,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 설치, 17일에 있었던 9연대장 송요찬 포고령은 초토화작전을 펼치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초토화작전은 4·3 기간 중 가장 많은 인명, 물적 피해를 만들었다. 마을마다 희생이 있었지만, 초토화작전이 시작되면서 전체 희생자가 급증했다. 희생자 연령대도 크게 변했다. 초토화작전이 전개되기 전 대부분 마을은 청년이 학살 대상이었다. 하지만 초토화작전이 전개된 후부터는 서너 살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인 학살이 있었다. 희생자 수는 초토화작전 전과 후가 확연히 차이가 난다.
9연대장 송요찬은 제주에서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살리고 죽이고를 결정하고, 주고 빼앗을 수 있는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있었다. 제주도민 목숨은 송요찬 한마디에 왔다 갔다 했다. 1948년 12월 29일 2연대와 교체를 앞둔 시점, 성과 올리기에 급급했던 9연대는 주민 학살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과도한 충성을 보였다. 당시 송요찬 말이 곧 법이었고, 9연대의 모든 행위는 그들만 인정하는 정당방위였다. 극악무도했던 초토화작전은 이듬해 3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전개됐다.
마을보다 동백동산 궤에서 집중적으로 학살된 선흘리
단일 사건으로 최대 희생자가 발생한 조천읍 북촌리. 북촌리에서 한라산 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선흘리’라는 마을이 나온다. 선흘리는 조천읍 10개 마을 중 한 곳이며 중산간마을이다. 선흘리는 조천읍에서 규모가 가장 큰 마을이다. 선흘리는 여느 중산간 마을처럼 농업과 축산업을 주업으로 삼았다. 선흘리는 본 동네 ‘윗선흘’과 낙선동으로 알려진 아래 동네 ‘알선흘’로 나뉜다.
소개령이 내려진 1948년 10월 중순부터 토벌대가 선흘국민학교(현 선흘초등학교)에 주둔하고 있었다. 10월 31일 토벌대는 선흘마을에 들이닥쳐 소개령을 거부해 남아 있는 주민을 학살했다. 이 사건으로 마을 청년은 인근 곶자왈(숲 덤불)이나 궤(굴)로 모두 숨었다. 마을은 노인이나 여성들 위주로 남았다.
마을 어른들은 자식 같은 청년이 토벌대를 피해 은신 생활을 하자 먹을 것이 걱정됐다. 어느 날 마을 주민 5명이 몰래 모여 청년에게 먹일 음식을 만드느라, 늦은 밤까지 불을 켜고 있었다. 토벌대는 마을에 불이 켜진 집에 들이닥쳤다. 음식을 만드는 모습을 보자 무장대와 내통한다며, 주민을 그 자리에서 총살하고 집을 불태웠다. 이 소식이 마을에 퍼지자 많은 주민이 기겁해 선흘곳 궤를 찾아 은신 생활에 들어갔다.
선흘리에 있는 선흘곶은 ‘동백동산’으로 불렸다. 수십만 평인 동백동산은 토벌대를 피해 숨기에 최고 조건이다. 선흘곶은 우거진 가시덤불로 인해 접근이 어려웠고, 자연 굴은 겨울 추위를 피할 수 있도록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1948년 11월 21일 토벌대는 텅 빈 선흘리 마을에 불을 질렀다. 토벌대는 마을에 숨어서 은신 생활을 하던 주민에게 소개령을 내렸다. 해안마을에 연고가 있는 사람들은 내려가고, 내려가지 않은 주민은 다시 은신 생활을 이어갔다. 숨어있던 주민을 찾아 그 자리에서 죽이지 않고, 순순히 살려서 해안마을로 이주시킨 토벌대가 의심스럽다.
11월 23일 소개 이틀 만에 학살이 시작됐다. 앞서 소개된 주민 중 20대 젊은 여성 다섯 명을 함덕해수욕장으로 끌고 가 총살했다. 그리고 다음 날 토벌대는 마을에 올라가 마을 수색에 나섰다.
11월 25일 궤에 숨어지내던 주민이 처음으로 토벌대에 발각됐다. 선흘곶에 있던 ‘도틀굴’이었다. 토벌대는 그 자리에서 주민 22명을 총살하고 1명을 살려두었다. 한 명을 살려둔 이유는 무엇일까? 토벌대의 꿍꿍이가 있었다. 다음 날 토벌대는 도틀굴에서 살려둔 생존 주민을 앞세워 마을 주민이 숨어 있는 다른 궤를 찾도록 했다. 생존 주민은 토벌대가 보는 앞에서 마을 주민이 숨어 있던 궤를 찾아냈다. ‘목시물굴’이었다.
목시물굴은 선흘리 주민 중 가장 많은 200여 명이 숨어 있었다. 토벌대는 주민을 발견하자 아기를 업은 여성과 노인을 함덕 대대본부로 끌고 가고 나머지 주민 20여 명은 학살 후 휘발유를 뿌려 시신을 태웠다. 대대본부로 끌려온 주민은 고문과 구타를 당하며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북촌리 ‘엉물’에서 총살했다. 토벌대는 목시물굴에서 찾은 주민 중 또 한 명을 죽이지 않고 살려뒀다. 주민은 다시 숨은 궤를 찾는 데 앞장서야만 했다.
11월 27일 토벌대는 다시 수색에 나섰다. 목시물굴에서 살려둔 주민을 앞세워 ‘밴뱅디굴’을 찾아냈다. 토벌대는 그 자리에서 주민 14명을 총살했다. 목시물굴에서 생존한 주민은 원치 않게 토벌대 앞잡이가 됐다.
선흘리 학살은 초토화작전 중 일반적인 주민 학살 방법과 달랐다. 현장에서 모두 죽였던 토벌대는 굴마다 한 명씩 살려둔 주민 때문에, 큰 힘 들이지 않고 쉽게 은신처를 찾을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연 사흘째 숨어 있던 궤가 발견됐다. 본의 아니게 살았던 주민은 자신도 하나뿐인 목숨을 유지하려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었다. 평소 가족같이 지내던 주민을 모두 죽이려는 의도는 분명히 없었을 것이다.
다시 희망을 꿈꾸게 하는 재건 마을
1949년 5월 15일 목적을 달성한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는 해체됐다. 그리고 악명을 떨친 서북청년회도 철수했고, 육지에서 파견 나온 응원경찰대도 철수했다. 이로써 제주도는 진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 무렵 제주 전역 소개민 정착 사업이 시작됐다.
소개령 후 초토화작전을 잘 넘긴 주민은 해안마을에서 6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지옥 같은 삶을 살았다. 살던 곳으로 돌아간 이들은 집을 새로 지으며, 마을을 재건하여 점차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정착 사업은 마을 전체가 소각된 곳부터 재건이 시작됐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집을 짓기 위한 재료 공급이 쉽지 않았다. 당시 웬만한 집 주재료는 나무였다. 나무는 한라산 인근과 오름 인근에 많이 있었다. 제주 전역에 2만여 채 집을 재건하려면 빠른 속도로 나무를 공급해야 했다. 짧은 시간에 많은 벌목이 쉽지 않았다.
벌목도 문제였지만 벌목된 나무를 옮기는 것도 문제였다. 한라산 인근이나 오름 인근에서 벌목된 나무를 한꺼번에 옮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요즘처럼 벌목 장비가 좋은 것도 아니었고, 수송 장비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적절한 공급이 되지 않는 나무를 대체하기 위해, 함석이나 짚풀을 사용했다. 이처럼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집을 다시 지어 만든 마을을 ‘재건 마을’이라고 한다.
재건 마을은 꼭 원래 마을이 있던 위치에 만든 것은 아니었다. 같은 곳에 마을을 재건할 경우 무장대 공격이나 주민이 무장대에 협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토벌대는 재건 마을을 무장대 공격으로부터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임의 위치에 만들었다. 마을은 집만 만들어 생활하지 않았다. 무장대 공격을 방어할 목적으로, 마을을 에워싸는 성벽도 쌓았다. 이것을 ‘4·3성’이라 하고 제주도 전역에 걸쳐 축성됐다. 그리고 성으로 둘러싸인 마을을 ‘전략촌(戰略村)’이라 한다.
사실 전략촌은 무장대 공격을 방어하기보다는 주민 감시용이었다. 전략촌에 성을 쌓음으로써 성안에 주민을 가둘 수 있었고, 가둬진 주민을 무장대와 접촉을 차단한 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전략촌은 주민을 위한 시설이기보다 토벌대를 위한 시설이었다. 토벌대는 주민 목숨에는 원래 관심이 없었다. 단지 주민을 가둬 효율적으로 감시·통제를 해 자신들이 편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누구를 위해 지은 것인지 모르는 4·3성
임의 위치에 재건되는 전략촌 특성상 선흘리 주민도 원 마을로 돌아가지 못하고, 새로운 곳에 전략촌을 지어 생활했다. 조금이라도 해안마을 인근에 지으려는 토벌대 지시로 선흘리 본동 아래쪽인 알선흘 ‘뱅듸왓(넓은 밭)’에 자리 잡았다. 뱅듸왓은 선흘곶 서쪽 옆 사방이 탁 트인 허허벌판이며 지대가 높다. 정면으로는 해안마을과 함덕해수욕장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선흘곶이 한눈에 보인다. 이곳은 선흘곶에 숨어있다가 나오는 무장대 접근을 감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대가 높아 사방을 감시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조건을 가진 곳이다. 이곳을 ‘낙선동 4·3성’이라고 한다.
전략촌은 허가받은 주민만 들어와 살 수 있었다. 이주했던 소개지에서 많은 주민이 학살당했다. 그중에는 도피자 가족이 되어 학살당했거나, 무장대와 소통을 했거나, 한때 무장대였던 주민은 모두 학살당했다. 학살을 피한 나름 신분이 검증된 주민이 돌아와 전략촌을 만들었다.
주민이 성을 쌓고 전략촌에서 생활하자 무장대는 식량 조달이나, 정보 습득이 점점 어려워졌다. 전략촌 외 모든 마을이 없어졌고, 들판에 식량이 될 만한 것들도 겨울이 지나면서 모두 사라졌다. 성을 쌓고 주민을 가두는 것은 무장대에 대한 새로운 토벌작전이었다.
성을 쌓는 과정은 가혹했다. 해안마을로 이주해 함덕 수용소에서 생활하던 선흘리 주민과 조천면 주민이 동원됐다. 그들은 1개월간 함께 성을 쌓았다. 수용소 생활하던 주민은 매일 축성지로 출퇴근했다. 아침이 되면 수용소에서 작업장으로 올라가 돌을 나르고, 모아둔 돌을 쌓는 등 경찰 감시하에 축성 작업을 했다. 작업이 끝난 저녁이 되면 다시 수용소로 내려가 수용소 생활을 이어갔다.
작업에 동원되는 주민은 청년의 부재로 남녀노소 구분 없었다. 심지어 초등학생도 동원됐다. 축성 작업에 사용된 돌은 모두 인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담(집담)이나 밭담(밭담), 산담(무덤담) 돌을 이용했다. 돌이 모자랄 경우 집에 있는 돌절구나 주춧돌을 이용했다. 주민은 돌을 나르는 도구가 마땅치 않아, 주로 지게나 등짐을 져 날랐다. 작업에 동원된 주민은 하나같이 어깨나 등이 까져 쓰라린 고통을 느꼈다.
낙선동 4·3성 축성 작업은 토벌대 주둔소를 쌓는 작업보다 훨씬 힘들었다. 성 규모가 주둔소 규모보다 월등히 컸기 때문이다. 낙성동 4·3성은 가로 150m, 세로 100m, 전체 500m에 달하는 규모의 직사각형 모양이다. 높이 3m 성벽 바깥쪽 바닥에는 너비 2m, 깊이 2m 구덩이를 파, 가시덤불을 가득 넣은 해자도 만들었다.
지금 성벽은 ‘ㄱ’자 모양으로 일부만 남아있다. ㄱ자 시작 지점이 정문초소이고 반대쪽 끝부분에 서 있으면 지대가 높아 조망이 뛰어남을 알 수 있다. 북쪽으로 멀지 않은 함덕해수욕장이 한눈에 보이고, 동쪽으로 동백동산이 한눈에 펼쳐져 있다. 성벽 주변에 있는 나무는 모두 ‘시계(視界)’를 위해 베어냈다. 쌓아진 성벽 위로는 큰 돌을 올려두어 마치 사람 머리처럼 위장하기도 했다.
낙선동 4·3성은 당시 축성된 성 가운데 원형 보존이 가장 잘 되어 있다. 성벽 일부는 주택이 생기면서 허물어지고, 일부는 과수원 경계 표시를 위해 옮겨져 다시 쌓았다. 하지만 성벽 일부를 전체적으로 복원하는 데 무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제주도청은 2007년 현재 4·3성 모습으로 복원했다. 복원 당시는 집이 12채 있었지만, 제주도청에 매각하고 주민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 현재 4·3성에 있는 주택 중 6가구는 4·3 때부터 조상들이 살았던 것을 이어 살고 있다.
수용소와 다를 바 없었던 성안 생활
1949년 4월이 되자 축성 작업이 완료됐다. 성안 주민은 수용소 생활과 다를 바 없었다. 해안마을 이주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주민은 가건물 ‘함바집’을 여러 채 지어 집단 생활했다. 함바집 주민은 스스로 돌과 흙을 구해서 벽을 쌓은 다음, 군데군데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만들어 얹은 것이 전부였다. 벽은 없었고 벽을 대체할 칸막이는 억새를 엮어 천장에 매단 것뿐이다. 취사를 할 수 있는 정해진 부엌이 없어 아무 바닥에서나 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생활 보호는 꿈도 꾸지 못했다. 함바집 한 채마다 다섯 세대가 살았다.
화장실 이용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성안에는 성벽 곳곳에 붙은 15개 화장실이 있었다. 성담에 낮은 칸막이 형식으로 돌을 쌓아, 사람이 들어갈 수 있게 했다. 바닥에는 넓고 긴 디딤돌 두 개를 놓아 발판이 되어, 쪼그려 앉아 볼일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을 ‘통시’라고 한다.
정해진 통시 개수에 비해 주민이 많아 통시는 항상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비가 많이 오는 날은 통시가 넘치기 일쑤였고, 역한 냄새는 성안을 가득 채웠다. 인분을 먹여 돼지를 키우는 제주 특성상 통시 아래에 돼지를 키우기도 했다.
집보다 더 큰 문제는 끼니 해결이었다. 4·3성 주민은 주로 밭농사를 지었다. 조, 콩, 보리 등 잡곡을 많이 지었고, 이를 이용해 죽을 끓여 먹었으며 간간이 고구마로 죽을 끓여 먹었다. 이마저도 풍족하지 못해 하루 세 끼를 찾아 먹는 것은 사치스럽기까지 했다. 보통 한 끼였고, 두 끼를 먹으면 다행이었다. 성안 주민은 하루 한 끼 먹기도 힘든 상황에서 파견 경찰 끼니까지 차려줘야 했다.
성안에는 경찰지서가 있었다. 성안을 감시·통제하고 경비를 감독하기 위해 파견된, 경찰들이 사용했다. 경찰지서는 66㎡ 크기이며 정문에서 30m가량 떨어져 있었다. 삼양 지서에서 파견된 경찰은 주민이 성 밖으로 나갈 때 통행증을 발급해줘, 정문초소를 거쳐 나갈 수 있게했다. 그마저도 야간에는 일체 통행금지였다.
성안 주민은 야간에 보초 근무도 서야 했다. 무장대가 성을 급습하기도 했고 성 인근까지 접근해 주민을 향해 연설도 했다. 무장대는 토벌대도, 주민도, 그 누구도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주민은 무장대 때문에 학살당한 끔찍한 기억들이 있기 때문에 피하고 싶었다.
성안 모서리마다 경비 망루가 4개 있다. 주민은 돌아가며 2층 구조 경비 망루에서 철창이나 죽창을 들고 보초를 섰다. 보초는 하룻밤에 5명씩 배치되어, 1명이 경비 망루에 올라 일정 시간 동안 성 주변을 감시했다. 나머지 4명은 망루 아래 보초대기소에서 대기하며 차례를 기다렸다.
1949년 봄 어느 날, 토벌대가 민보단을 앞세워 한라산으로 무장대를 토벌하러 갔다. 토벌대는 민보단 도움으로 토벌에 성공하여 내려왔다. 군은 큰 성과를 내거나 의미 있는 작전에 성공하면 성과를 알리기 위해, 비석이나 기념식수를 하는 전통이 있다. 이날도 마찬가지로 토벌 성과를 기념하기 위해 한라산에서 퐁낭(팽나무) 한그루를 캐서 정문 옆에 심었다.
이듬해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학살을 피해 살아남은 청년은 애국심을 증명하기 위해 자원입대했다. 그래서 성안은 남자 보기가 힘들었다. 경찰은 당장 보초 근무가 문제였다. 어쩔 수 없이 연령대를 낮춰 16세 이상 소녀가 동원됐다. 16세 이상 소녀도 많지 않았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성안 노인들을 동원했다. 그래서 보초 업무는 16세 이상 여성과 노인 몫이 됐다.
4·3성은 처음 축성할 때 성벽에 구멍을 내어 밖을 볼 수 있게 했다. 이 구멍을 ‘총안’이라 한다. 총안은 외부로 내다보거나 무기를 밖으로 겨눌 수 있어 무장대 접근을 확인하고 방어할 수 있었다. 총안은 각 모서리에 있는 경비 망루와 경비 망루 사이에 있다. 성벽마다 두 개씩 있으며 모두 8개 총안이 있다. 총안은 사람 키보다 높은 2m 높이며, 총안에 오르려면 계단을 이용해 올랐다.
전략촌 생활은 강제성을 띠는 수용소보다 환경이 조금 나아졌는지 모른다. 하지만 단체로 생활하는 것은 수용소나 다를 바 없었다. 전략촌이 만들어질 당시 50여 세대가 살았다. 이후 점점 늘어나 250여 세대가 살았다. 1954년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되고 4·3이 종료됐다. 당시 낙선동 4·3성 주민은 본 마을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모두가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생활하는 주민도 있었다.
작가 생각
한 사람을 위한 과도한 충성으로 얼마나 많은 주민이 죽었는지 모른다. 부대 성과 올리기에 혈안이 되어, 사람 목숨이 보잘것없게 됐다. 주민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누굴 믿고 살아야 했나. 군경은 그들 존재 이유를 어디에 뒀을까. 국민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군인과 경찰에게 제주도민은 그저 부대 성과 희생양일 뿐이었다. 초토화작전은 무능한 정부가 사태를 힘으로 해결하려는 단편적이 예다. 어떤 일이든 대화로 해결해야 마땅하다.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낙선동 4·3성을 둘러봤다. 무엇보다 성곽 크기에서 압도되었다. 지금은 두 면 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네 면을 모두 쌓으려면 얼마나 고생했을까 느껴졌다. 마을에 청년은 거의 없고 노인과 여자, 아이가 전부였다. 특히 아이들이 축성 작업에 동원됐다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얼마나 고생했을까? 집에 있는 두 딸이 생각났다. ‘우리 딸이 이 작업에 동원됐다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었겠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퐁낭 아래 시원한 그늘이 보였다. 시간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냥 지나치면 이동하는 내내 계속 생각이 날 것 같았다. 퐁낭 아래에서 잠쉬 앉아 쉬었다. 지나온 유적지를 떠올리며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음 유적지는 검색하면서 내가 가장 마음 아파했던 ‘다랑쉬굴’이었다. 다랑쉬굴에서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며 이동했다.
[ 낙선동 4·3성 유적지 정보 ]
주소 l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2720
문의 l 낙선동 4·3성 064-783-4373
기타 l 관람료 무료
주차장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