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마을이 석유 냄새로 진동한다. 하늘은 연기로 덮여 어느 한 곳 빼꼼한 데가 없다. 누구 집 할 것 없이 온 마을이 모두 타고 있어 하늘이 불타는 것 같다. 그야말로 화광충천이다. 이런 하늘을 본 적도 없지만, 하늘이 화내는 것 같아 너무 무섭다. 사람들은 주저앉아 땅을 치며 통곡하고 있다. 옷, 살림 도구, 심지어는 집에 가둬 놓은 돼지마저 불에 타고 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재승이 집에 군인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불쏘시개에 불을 붙이고 있다.
“안 돼! 안 돼! 도대체 왜 이래 이놈들아!”
재승이 할머니가 집에 불붙이러 들어온 군인들을 막는다. 하지만 군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붕에 불을 붙였다. 할머니는 마당에 있는 아무 돌을 집어 들고 군인에게 때리려 달려들었다. 군인들은 할머니를 밀치며 말한다.
“죽고 싶어!”
마침, 바닷가에 있다가 마을에 연기 나는 것을 보고 급히 뛰어온 재승이가 군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왜 이래! 할머니 왜 밀어!”
재승이는 할머니가 쓰러지는 것을 보자 눈이 뒤집히는 듯했다. 그런 재승이를 보며 군인들이 눈으로 쏘아붙이고 있다.
“너, 나중에 보자. 내가 너 똑똑히 봐뒀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불길이 점점 꺼지자, 군인들이 다시 집마다 돌아다니고 있다. 모두 초등학교로 모이라고 했다. 재승이도 할머니를 모시고 가니 이미 많은 동네 사람이 모여있었다. 어느새 온 마을 사람들이 모였고 책임자 같은 군인이 사람들 앞에 나서며 말한다.
“지금 부르는 사람은 앞으로 나와!”
이름을 들어보니 재승이 또래에 청년이 대부분이다.
“고재승!”
재승이는 자기 이름이 불리자 조금 전 집에서 군인과 대치하던 생각이 났다. 앞으로 나갔다. 언뜻 보니 10여 명 되어 보인다. 청년끼리 한 줄로 세워 손목에 새끼줄을 묶었다. 인솔 군인이 앞을 이끌고 좌우로 2명씩 붙고, 뒤에도 10여 명 되는 군인들이 청년을 어디로 데리고 갔다.
“재승아! 어디 가냐!”
“할머니! 금방 올게, 기다려!”
할머니가 재승이를 큰 소리를 부르자, 재승이도 순간 할머니를 쳐다보며 안심시킨다.
청년이 학교 밖으로 나간 지 벌써 서너 시간이 지났다. 재승이 할머니뿐만 아니라 조금 전 끌려간 청년의 가족들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 곤을동에서 일어난 일을 소설로 구성 |
제주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고 별도봉이 든든히 지켜주던 곤을동 마을. 그저 멜 후리면서 소박하게 살아가던 마을은 삽시간에 사라졌다. 그날을 떠올리며 바다를 바라보니, 유난히 바람이 세차게 분다. 바람은 떠나간 이들의 한숨인 듯, 내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흔적만 남은 마을, 돌담 사이를 비집고 들풀이 자라나 생명을 불어넣는다. 총성과 불길이 뒤섞여 숨 쉬는 생명을 괴롭히던 이곳은, 햇살이 내리쬐어 모든 상처를 다독이듯 따스하다.
제주 앞바다를 보며 소박하게 살았던 곤을동 마을
곤을동은 어촌 작은 마을이다. 곤을은 ‘항상 물이 고여있는 땅’이라는 의미다. 마을은 한라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인 ‘화북천’을 경계로 세 마을로 나뉜다. 제주 앞바다에서 곤을동을 바라볼 때 우측 마을 터만 남은 곳을 ‘안곤을’, 왼쪽으로 하천을 건너 주택 한 채만 덩그러니 있는 곳을 ‘가운데곤을(셋곤을)’, 다시 왼쪽으로 작은 다리를 건너면 ‘밧곤을(동곤을)’이라고 불렀다. 마을은 안곤을이 22가구, 가운데곤을이 17가구, 밧곤을이 28가구가 있었으며 전체 67가구가 있었다. 해안마을치고는 작은 규모이며 멜(멸치)을 후리며 농사를 짓던 아주 소박하며 부러울 것 없는 마을이었다.
곤을동을 세 군데로 나눈 화북천은 건천(乾川)이다. 평소에는 물이 흐르지 않아 말라 있고, 비가 내리면 상류부터 큰물이 급하게 내려와 바다로 빠져나갔다. 큰물이 내려가면 밧곤을에 쌓여 있는 자갈과 모래가 바다로 휩쓸려 갔다. 그러면서 바닥이 패여 저절로 물길을 만들었다. 다시 파도가 자갈을 밀고 오면 자연스레 둑이 만들어졌다. 파도가 치면서 바닷물이 둑 안으로 들어올 때 멜도 같이 들어오고, 파도가 나갈 때는 멜이 따라가지 못해 둑 안에 갇혀 있었다. 그래서 곤을동 주민은 멜을 쉽게 잡을 수 있었고, 그것을 팔아 생계에 도움이 됐다. 주민은 멜 후리는 것 외에 농사도 지었다. 마을 안쪽 밭에 보리, 조, 콩, 고구마, 팥, 메밀 등을 지었다. 곤을동은 제주 전형적인 자연마을이며, 농사와 어업을 병행하는 반농반어(半農半漁)를 하며 살았다.
마을 주민이 식수로 사용했던 물이 따로 있다. 용천수라 불리는 ‘안드렁물’과 ‘덕수물’이다. 안드렁물은 안곤을에 있고 마을에서 별도봉 쪽으로 더 들어가야 나온다. 안드렁물은 안곤을에서도 더 깊게 들어가 있다 보니, 평소에는 가운데곤을 주민과 밧곤을 주민은 이용하지 않았다. 가끔 가운데곤을 주민이 집안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안드렁물을 길러 사용했다.
안드렁물은 위, 가운데, 아래 세 단계로 나눠진다. 위에 있는 물은 먹는 물로 사용했고 가운데 있는 물은 허드렛물, 아래에 있는 물은 빨래할 때 사용했다. 지금도 물이 흐르고 있지만, 사용하지 않는다. 덕수물은 가운데곤을에 있어 가운데곤을 주민과 밧곤을 주민이 이용했다. 지금은 바닷물이 모래를 밀고 와 흔적조차 없어졌다.
새해부터 조용한 마을에 들이닥친 공포
1949년 1월 4일 조용한 곤을동에 공포가 시작되었다. 해가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해에 대한 기대도 컸던 날이었다. 기대는 얼마 가지 못해 제주 여느 마을처럼 공포스러운 하루가 되었다. 앞으로의 시련을 알리는 듯, 제주 앞바다에서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마을 전체를 감싸고 있었고 파도 소리는 서글프게 들려왔다. 오후 3시쯤이 되자 갑자기 2연대 병력 중 1개 소대로 구성된 토벌대 40여 명이 마을로 들이닥쳤다.
토벌대는 집마다 돌며 주민을 모두 집 밖으로 나오게 했다. 모인 주민 가운데 청년 10여 명을 불러 별도봉 바닷가로 이유 없이 끌고 갔다. 곧이어 바닷가 쪽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가족이 끌려갔지만, 바닷가로 달려가지 못했다. 토벌대가 꼼짝 못 하도록 막고 있었다. 주민이 모두 집 밖으로 나오자, 토벌대는 집마다 돌며 불을 질렀다. 밧곤을을 제외하고 안곤을 22가구, 가운데곤을 17가구 모두 불탔다. 그리고 남은 주민을 줄줄이 묶어 화북국민학교(현 화북초등학교)로 끌고 가 구금했다.
1월 5일 주민은 영문도 모른 채 학교에서 하루를 보냈다. 지금 주민이 걱정하는 것은 한둘이 아니다. 불에 타 돌아갈 수 없는 집도 걱정이고, 토벌대에 끌려가면 죽는다는 흉흉한 소문을 들었기에 생사도 걱정됐다. 그리고 어느 집은 어제 토벌대에 끌려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가족도 걱정됐다. 그런 와중에 토벌대는 학교에 남아 있던 청년 중 13명을 불렀다. 토벌대는 청년을 ‘모살불’이라는 해안에서 총살했다. 그리고 곤을동에서 마지막 남은 밧곤을 28가구마저 모두 불태웠다.
세 마을이 모두 불타자, 살아남은 주민은 살 곳을 찾아 옆 마을 화북리로 건너갔다. 곤을동 주민은 터전을 잃고 화북리로 건너갔지만, 거기서도 생활하기는 힘들었다. 인근에 친척 집이 있으면 걱정을 덜기는 했지만, 더부살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를 알게 된 화북리 서부락 주민이 그들을 가엽게 여겨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던 땅을 내놓았다. 땅에는 아기 무덤이 많았는데 모두 이장하고 움막을 지어 생활하기 시작했다. 어려운 시국임에도 화북리에서 제주 공동체의 따뜻한 면을 느낄 수 있었다. 화북리 서부락에 터전을 잡은 주민은 아직 대를 이어 살고 있다.
병사의 말 한마디에 잿더미가 된 곤을동
토벌대의 곤을동 작전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곤을동은 해안마을임에도 왜 마을 전체가 불탔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4·3 당시 마을 전체가 전소되는 것은 주로 중산간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곤을동이 삽시간에 불바다가 된 데는 이유가 있다. 곤을동에 첫 학살이 있던 1월 4일이었다. 서북청년회로 이뤄진 2연대 정보처 소속 군인들이 작전을 마치고 귀대하고 있었다. 곤을동 윗쪽 일주도로를 지나고 있던 2연대 군인들은 횃선거리(현 화북남문 정류소) 인근에서 무장대에 기습당했다.
무장대는 2연대가 이곳을 통해 귀대한다는 정보를 미리 습득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로 가운데 차량 이동을 방해하려고 돌을 쌓아 놓고 매복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2연대 군인들은 이를 보자 모두 차에서 내려 돌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매복해 있던 무장대는 정신없이 작업 중이던 군인들을 기습했다.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2연대 군인들은 1명을 제외하고 모두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곤을동이 잿더미가 된 이유는 운 좋게 살아났던 생존 군인 증언 때문이었다. 생존 군인은 동료들을 기습했던 무장대 행방을 목격했다. 이후 상부에 보고하기를 ’무장대들은 기습을 마치고 모두 곤을동으로 도주했다‘라고 보고했다. 2연대 1개 소대 병력은 오후 3시쯤, 곤을동에 들이닥쳤다. 분노에 휩싸인 군인들은 동료의 보복을 시작했다.
무장대가 곤을동으로 갔으면 모두 곤을동 주민이었을까? 곤을동을 통해 별도봉으로, 사라봉으로 갔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존 군인은 무장대가 해안가로 이동해 다른 곳으로 갔던 것인지, 진짜 곤을동이 마지막 목적지였는지 알 수 없었다. 군인을 기습한 무장대가 마을로 들어간 것이 사실이라면 조사를 통해 사건을 처리하는 것이 정상이다. 다짜고짜 주민을 끄집어내 학살하고 집을 불태우는 만행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생존 군인의 확인되지 않은 말 한마디는 동료의 복수를 마을 주민에게 해달라는 말과 같았다.
잃어버린 마을에 대한 의미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되면서 4·3도 끝나게 되었다. 그동안 출입이 통제됐던 중산간마을도 출입이 허용됐다. 소개되어 해안마을에 거주하던 주민도 이 무렵 원마을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이들은 오랜만에 돌아오니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동안 돌보지 못한 밭을 개간하고 집을 짓는 등 시간을, 1948년 10월 17일 소개령 이전으로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마을이 그렇지는 않았다. 지나간 일을 떠올리면 너무 잔혹했다. 집이 불타고, 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기억들은 마을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게 했다. 오죽하면 고향으로 돌아가길 거부했겠나 싶다. 적응하기 나름이듯, 해안마을에 정착해 살던 주민도 있었다. 소개지에 정착해 원마을로 복귀하지 않아 아무도 살지 않는 마을을 ‘잃어버린 마을’이라 한다.
곤을동은 4·3이 끝나고도 마을 복구는 이뤄지지 않았다. 인근 마을 북촌리도 해안마을로서 토벌대에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하지만 이들은 4·3이 끝나고 마을을 재건해 원래의 삶으로 돌아갔다. 작고 소박했던 곤을동을 덮친 토벌대는 돌아가고 싶은 그들의 기억마저 빼앗아 갔다. 결국 곤을동은 마을 터만 남아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여기서 잃어버린 마을의 ‘잃어버린’이란 단어를 한번 따질 필요가 있다. 잃어버린다는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을 실수로 잃어버린 것을 말한다. 그리고 ‘빼앗긴’은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을 강제로 누군가에게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럼, 토벌대가 만든 잃어버린 마을은 ‘잃어버린 마을’일까, ‘빼앗긴 마을’일까. 나는 분명히 빼앗긴 마을이 맞다고 확신한다. 4·3 당시 모든 잃어버린 마을은 주민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토벌대가 강제로 빼앗은 마을이다. 이는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것이다.
작가 생각
잃어버린 곤을동을 본 나는 해안마을, 중산간마을 가리지 않던 토벌대에 분노를 느꼈다. 최소한의 규칙도 없는 토벌대는 병사의 확실치 않은 말 한마디로 소박했던 마을을 없애버렸다. 분명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본의 아니게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러 마을 돌담 앞에 서서 제주 앞바다를 바라봤다. 흥분한 마음을 잠시 잊은 채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이 내 눈앞에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바다는 곤을동의 아픔을 위로해 주듯 잔잔한 파도를 쳐줬다. 다음 코스는 여기서 멀지 않은 북촌리다. 북촌리는 어마어마한 피해가 있었다는데 어떤 곳인지 궁금하다. 북촌리 투어를 마치면 분노 데미지가 풀로 찰 것 같다.
[ 곤을동 유적지 정보 ]
주소 l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일동 4429
문의 l 제주특별자치도청 4·3 지원과 064-710-8452
기타 l 주차장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