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과 침묵 사이에 있는 관덕정

by 예지리파파
250527 (1).JPG


최근들어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였던 적이 없었다. 3년 전 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학교 운동장은 산지항 앞바다처럼 넓어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따라 운동장이 이렇게 작았었나 싶다.

영식이는 며칠 전부터 재민이를 졸라댔다. 영식이는 학교 운동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니까 구경하러 가자며 재민이를 조른 것이다.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따라왔던 재민이는 운동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모여있었다.

행사를 마친 사람들은 서문통으로 나가면서 시위한다고 했다. 재민이는 그냥 집으로 가려고 했지만 영식이가 한사코 붙잡는다.

“재민아, 이왕 나온 거 저 사람들 따라가 보자.”

“우리 그냥 집에 가자.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오랜만에 서문통도 구경하고 한번 가보자”

“아이참. 그럼, 서문통만 보고 바로 집에 간다. 알겠지?”

“그래, 그러자”

재민이가 영식에게 약속하며 못 이긴 척 따라간다. 하지만 둘은 오랜만에 서문통에 나와 기분이 좋다. 서문통을 걷는 내내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구경하고 있다.

갑자기 영식이가 손가락으로 뒤쪽을 가리키며 말한다.

“재민아, 저기 봐. 사람들이 갑자기 몰려와.”

재민이가 뒤를 쳐다보자 고함을 치면서 앞만 보고 빠르게 오는 무리가 무섭게 다가왔다. 재민이는 무리를 보고 잔뜩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영식아, 그냥 집에 가자. 무서워!”

“돌아가려고 해도 사람들이 너무 밀고 와서 못가!”

재민이와 영식이는 어쩌다 군중의 선두 그룹에 끼어있었다. 둘은 학교에 들어갈 때 늦게 들어간 탓에 교문 근처에 있었다. 행사를 마치고 나올 때는 어쩌다 선두 그룹이 되어버렸다.

군중으로부터 밀려오다 보니 멀지 않은 거리에 관덕정의 우람한 지붕이 보였다. 그리고 우측에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솟아 있는 경찰서 망루가 보였다. 군중은 경찰서를 향해 소리치며 빠른 걸음으로 가고 있었다.

영식이는 순간 망루에 있는 경찰의 행동을 보게 되었다. 망루에 꼿꼿이 서 있던 경찰 2명이 갑자기 상체를 숙이더니 얼굴을 총에 바짝 붙였다.

영식이가 망루를 향해 손가락으로 가르치며 재민이를 보고 말한다.

“재민아, 저기 망루 봐봐. 경찰이 좀 이상한 것 같아.”

망루를 본 재민이도 이상하게 느껴 말한다.

“저놈들 뭐야, 왜 조준하고 있지. 쏘려고 하는 거야? 아!”

영식이가 재민이 뒤통수를 시원하게 한 대 치고 웃으며 말한다.

“야이 미친놈아! 경찰이 왜 사람을 향해 총을 쏴!”

그때였다.

‘탕탕탕!’

“아~악, 아~악!”

모여있던 군중은 총소리에 놀라 모두 비명을 질렀다. 끓는 기름에 물이 튀듯 순식간에 흩어졌다.

선두 그룹에 끼어있던 둘은 아무 건물 뒤로 숨었다. 재민이는 몸을 숨긴 다음 숨죽이고 눈만 깜빡이며 식산은행 앞으로 가는 무리를 봤다. 무리가 모두 지나갔을 무렵 사람이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겁에 질려 가지 못했다.


| 관덕정에서 일어난 일을 소설로 구성 |



구름 한 점 없는 제주, 하늘은 유난히 파랬다. 푸른 하늘을 지붕 삼아 관덕정에 잠시 걸터앉아 있다 보면, 제주에서 일어난 역사 속 사건들이 떠오른다. 관덕정은 제주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모든 일을 겪은 곳이다. 오래된 기와와 지붕을 바라보면 제주 역사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500년 넘도록 제주를 지켜온 관덕정은 이름 그대로 덕을 바라보지만, 제주의 아픔도 함께 느낄 수 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중심을 잡고 묵묵히 서 있는 관덕정은 제주도민의 심장과 같다.

제주 역사의 산증인 관덕정


관덕정은 조선 세종 30년, 1448년 제주목 관아 앞에 지어졌다. 활쏘기와 무예 연습을 하는 군사 훈련장으로 지어졌으며,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제주목 관아 대부분 건물이 일제강점기 동안 철거되었다. 하지만 관덕정은 일제가 관청으로 사용하려는 계획으로 철거를 면할 수 있었다. 1924년 일제에 의해 수리되는 과정에서 지붕과 처마가 일부 변형되었다.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은 일제가 변형시킨 관덕정의 원래 모습을 되찾으려 했다. 2003년 해체하여 3년간 보수공사를 마치고 원래의 관덕정으로 돌려놓았다.

관덕정은 제주 중심지였다. 관덕정은 원도심으로써 정치와 행정, 교통과 문화 중심지였다.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이 제주를 방문하면 이곳에서 연설했고, 도민들은 관덕정 광장을 가득 메우기도 했다. 제주목 관아에서 모든 행정이 이뤄졌고, 사방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관덕정이 교통 중심지인 이유를 말해준다. 축제, 관공서 행사, 공식 집회 등이 이곳에서 열렸다. 관덕정은 제주도민이 함께하는 문화 교류 장이자 세상 이야기를 듣는 곳이었다. 역사의 큰 파도가 칠 때마다 그 중심에는 관덕정이 있었다.


4·3을 일으킨 3·1절 발포사건


1947년 3월 1일, 제주북국민학교(현 제주북초등학교)에서 제28주년 3·1절 기념 대회가 열렸다. 3·1절 기념 대회는 전국에서 일어난 운동이다. 서울은 우익과 좌익으로 나뉘어 서울운동장과 남산공원에서 기념대회를 열었다. 제주는 서울과 달리 좌익 세력인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하여 하나의 대회로 개최됐다. 이번 대회는 해방 후 미군정에 더 이상 기대 할 수 없었던 도민들 3만여 명이 모인 큰 행사였다.


참가자들은 국민 기대를 저버린 미군정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친일 경찰 고용, 해방이 되어도 끊지 못한 공출제로 미군정에 대한 불만은 나날이 높아졌다.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미군정 정책과 해방이 되었음에도 전혀 개선되지 않고 계속해서 힘든 삶도 불만을 높이는 데 한몫했다.


도민이 느끼는 불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미군정은 6만여 명의 귀국 동포들로 인한 실업난에도 불구하고 ‘도제(道制)’를 실시하였다. 전라남도 부속 섬인 제주도(濟州島)를 독립적 행정구역 제주도(濟州道)로 승격시켰다. 이는 늘어난 세금과 전라남도 지원이 중단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미군정이 했던 여러 정책은 제주도민에게 불만만 가중했다.


제주도민은 해방 후에도 나아지지 않는 삶의 원인은 여전한 외부 세력의 간섭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3·1운동 정신을 계승하여 외부 세력이 아닌 우리 민족끼리 나라를 세우려고 했다. 3·1절 기념 대회는 단독 정부 수립 움직임을 감지한 도민이, 조국 분단을 막으려는 국민적 저항 운동이 되기도 했다. 그들에게 3·1절 기념 대회는 전반적으로 잘못되어 가는 세상을 바로 잡으려는 자발적인 대회였다.


오후 2시 무렵 기념 대회가 끝난 후 군중은 가두시위를 이어갔다. 군중은 제주북국민학교를 나와 두 갈래로 나뉘었다. 미군정청과 제주 경찰서가 있는 관덕정 방면 서문통 대열과 제주 경찰감찰청이 있는 북신작로 방면 동문통 대열이 있었다. 서문통을 향해 가두시위를 하던 행렬에서 문제가 생겼다. 군중을 구경하고 있던 아이가 마침 그 앞을 지나던 기마경찰이 타고 있던 말에 치이는 사고가 일어났다.


기마경찰은 아이를 친 것을 모르는지 아무 구호 조치 경찰서로 향하고 있었다. 놀란 아이 엄마는 경찰을 향해 고함을 쳤다. 하지만 엄마의 외침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를 본 군중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기마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기마경찰은 흥분한 군중을 보고 놀라 경찰서를 향해 서둘러 갔다. 군중은 일제히 기마경찰을 뒤쫓아 경찰서로 향하며 항의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다쳤다면 그 즉시 말에서 내려, 아이를 위한 구호 조치를 해야 할 것이 마땅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실수 후 그에 따른 후속 조치를 한다면, 큰 문제는 막을 수 있다. 실수와 동시에 진심이 담긴 사과 한마디는 기본이다. 기마경찰이 일으킨 실수는 누구 책임, 누구 잘못을 따지기 전, 기본만 지켰더라면 현장에서 해프닝으로 끝났을 일이다. 기마경찰은 스스로 저지른 실수로 인해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을 일을 만들어 버렸다. 아이를 친 기마경찰은 한국전쟁 외 단일 사건으로 가장 큰 규모의 희생자가 나온, ‘제주 4·3’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군중이 관덕정 앞 경찰서에 다다를 때쯤이었다. 갑자기 경찰서 망루에서 총소리가 났다. 경찰서로 접근하는 군중을 향해 경찰이 발포한 것이다. 총소리에 놀란 군중은 모두 놀라 도망치기 바빴다. 도망치는 군중 사이로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관덕정 앞 광장은 순식간에 피 튀기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경찰은 시위를 마친 군중이 경찰서를 향해 공격해 온다고 판단해서 발포했다.

경찰서로 몰려간 군중은 그저 아이를 친 기마경찰의 사과를 요구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기마경찰을 만나기는커녕 무자비한 총탄 세례만 받았다. 경찰 발포로 민간인 6명이 그 자리에서 죽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 사망자는 경찰서 건너 식산은행 앞과 도립병원으로 들어가는 골목 모퉁이에 쓰러졌다. 사망자 중에는 15세 학생과 아기를 업고 있던 21세 여성도 있었다. 이 사건을 ‘3·1절 발포사건’이라고 한다. 3·1절 발포사건은 7년 7개월간 이어진 제주 4·3이 시작되는 계기가 됐다.


사망자와 중상자들은 가까이 있는 도립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송된 사망자의 부검이 시행되었다. 부검 결과는 똑같았다. 모두 등 뒤에 총을 맞아 사망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총소리에 놀란 시위대가 혼비백산하며 도망가다 총알이 등 뒤에 박힌 것이다.


같은 날 경찰 발포는 한 번 더 있었다. 두 번째 경찰 발포는 도립병원에서 일어났다. 전날 교통사고를 당한 응원 경찰이 도립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는 낯선 환경이 두려웠는지, 동료 경찰 2명의 경호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조금 전 관덕정 쪽에서 총성이 울리는 것을 듣고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피 흘리는 사람들이 병원으로 업혀 들어오고 있었다. 동료 경찰을 경호하고 있던 경찰(충남 공주경찰서 이문규)은 그 모습을 보고 매우 놀랐다. 그리고 메고 있던 소총으로 주민을 향해 쏘기 시작했다. 이 발포로 2명이 중상을 입었다.


왜 경찰은 비무장인 군중에게 발포했을까? 기마경찰을 향한 항의에 대한 보복이었을까? 관덕정 앞에 경계를 서고 있는 무장 응원 경찰은 군중과 대화로 해결이 되지 않았을까? 해산 목적이었다면 공포탄으로 위협사격만 가했어도 인명피해는 없었을 것이다. 도대체 도망가는 주민을 향해 왜 총을 쐈는지 궁금하다. 어찌 됐든 경찰은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다. 하지만 경찰은 변명의 여지가 없음에도 정당방위를 주장하고 있었다.


전국 비상 경계령과 응원 경찰 제주 파견


3·1절 기념 대회를 앞두고 미군정은 전국 경찰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비상경계령이 내려졌지만, 육지와 달리 제주는 경찰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3·1절 기념 대회가 열리는 것을 미리 알고 있던 미군정은 이를 해결하고자 육지에서 ‘응원(應援) 경찰’을 보냈다. 3·1절 발포사건이 있기 일주일 전 2월 23일, 충남·충북 경찰 100명으로 구성된 응원 경찰대가 제주로 파견되었다. 하지만 발포사건 후 100명의 응원 경찰로는 사태를 수습하기 역부족이었다. 심각해진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경찰력이 더 필요했다.


경찰은 제주와 가까운 전남 경찰청에 추가 파견을 요청했다. 요청에 응해 같은 날 저녁 목포 경찰 100명으로 구성된 응원 경찰이 추가로 제주에 들어왔다. 제주 공동체 문화를 모르는 응원 경찰은 제주 민심과 반대로 움직였다. 탄압의 중심에 응원 경찰이 있었고 기마경찰을 뒤쫓아 오던 군중을 향해 망루에서 발포한 경찰도 응원 경찰이었다. 결국 응원 경찰 투입은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


제주 경찰은 일제 강점기부터 많지 않았다. 전체 제주 경찰은 101명에 불과했으나 해방 후 1947년 2월 330명으로 늘어났다. 1947년 4월은 500여 명까지 늘어났으며, 4·3 이후는 2,000명이 되기도 했다. 해방 후 미군정은 어수선했던 국내 치안을 군보다 경찰에 더 의존했다. 미군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경찰은 해방 이후 막강한 힘을 가졌다.


미군정에서 근무하던 제주 경찰은 특이하게도 경찰 간부를 친일 경찰로 구성했다. 이들은 친일 활동 기간 동안 몸에 밴 나쁜 습관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처럼 미군정의 친일 경찰 고용은 미군정에 대한 불만을 유발하는 데 한몫했다.


도민 기대를 저버린 미군합동조사단


3월 8일 미군정과 주조선미육군사령부 합동조사단(단장 카스티어 대령)이 제주에 파견되었다. 3·1절 발포사건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합동조사단은 10일 스타우트 제주 군정장관과 박경훈 제주도지사와 함께 발포현장을 찾았다. 현장에서 일어난 일을 목격한 사람을 찾아 증언을 들으며 조사를 시작했다. 이 소식이 제주도민에게도 알려졌다.


제주도민은 미흡한 대처를 하던 경찰에 기대를 버리고 합동조사단에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민심을 의식했는지 합동조사단 조사가 시작되자 꿈쩍하지 않던 경찰도 움직였다. 제주 경찰감찰청장은 도립병원에서 있었던 발포는 무사려한 발포로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러나 도민이 기다리고 있던 관덕정에서 일어났던 발포사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많은 제주도민이 실망한 가운데 아직 합동조사단 공식 발표는 없었다.

3월 13일 합동조사단은 아무 발표 없이 제주를 떠났다. 이들의 조사 결과 발표를 떠안은 제주 군정장관도 이른 시일 내에 진상조사를 발표하겠다고 했으나 감감무소식이었다. 도대체 합동조사단이 제주에 방문한 이유는 무엇일까. 감정이 격해져 있는 제주도민을 달래기 위한 행동이었을까? 아니면 명분을 쌓기 위한 행동이었을까? 이들의 방문 결과는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던 제주도민에게 허탈감만 안겨줬다.

경찰의 미흡한 대처로 일어난 민·관 총파업


3월 10일 제주도민과 관공서, 각종 단체가 합동해 유례없는 민·관 총파업에 들어갔다. 제주도청 직원들의 자발적인 파업으로 시작된 이번 파업은, 3·1절 발포사건에 대한 불만이 담겨있었다. 경찰 사과와 책임자 처벌이 없었던 경찰의 미흡한 대처에 대한 항의성 파업이었다. 파업은 제주도청을 비롯해 제주 각 관공서, 학교, 은행, 전화국, 운수업체 등이 참가했고 자영업자, 교사, 학생 등 누구 할 것 없이 파업에 동참했다.


심지어 현직 경찰관이 파업에 동참했다. 모슬포, 중문, 애월 지서에서 근무하는 제주 출신 경찰관들은 현 상황에 불복해, 사직서를 제출하고 파업에 동참했다. 그들은 ‘봉사 정신으로 살아왔으나 이번 발포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희생은 사라졌다’라고 했다. 부당한 명령을 복종할 수 없어 직장을 떠난다고 하며, 경찰관 66명이 파업에 동참했다. 파업에 경찰관이 동참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제주읍에서 시작된 파업은 삽시간에 제주 전역으로 퍼졌다. 이 민·관 총파업을 ‘3·10 총파업’이라고 한다. 3·10 총파업은 166개 기관·단체에서 41,000여 명이 참가했다.


한편, 총파업이 있던 날 희생자 유족을 위한 활동도 있었다. 지역 신문사인 ‘제주신보’ 주도로 3·1절 발포사건 유족을 위한 모금 운동을 벌였다. 신문사는 3월 10일 자사 신문에 ‘3·1사건 희생자 유가족 조위금 모집’이라는 신문 광고를 냈다. 희생자들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고 고통받고 있는 유족을 돕자는 취지였다. 모금 운동은 신문을 통해 제주 전역으로 알려졌다.


직장, 학교, 시장 등에서 조위금이 모여졌고, 단체별로 많은 조위금이 모여졌다. 모금 운동은 좌우 진영 구분 없이 이루어졌다. 3·1절 발포사건을 부정하던 강인수 제주 경찰감찰청장도 모금 운동에 동참했다. 그뿐 아니라 군중을 향해 발포한 응원 경찰 동료들도 모금 운동에 동참했다. 소속은 같지만, 생각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예다.


총파업에 대한 검거 열풍과 물러나는 도지사


3·10 총파업에 대해 최경진 미군정 경무부 차장의 놀라운 발언이 있었다. 최경진은 원래 제주도민 90%가 좌익 색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대부분의 제주도민을 좌익으로 몰았다. 이 발언은 사태를 수습해야 하고 발포에 대한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해야 할, 경무부 차장 발표라고 믿기 어려웠다. 제주도민 전체를 좌익으로 규정하는, 경찰 2인자 최경진 발언은 제주도민을 자극하는 위험한 발언이었다.


합동조사단이 떠난 다음 날 3월 14일, 조병옥 미군정 경무부장이 시찰차 제주로 내려왔다. 그는 미군정으로부터 3·10 총파업을 뒤처리하라는 명령을 하달받았다. 조병옥은 도착 즉시 제주도민에게 포고문을 발표했다. 그의 포고문은 실망이었고, 제주도민 감정을 더 부추기는 계기가 됐다.


앞서 벌어졌던 3·1절 발포사건에 대한 경찰 총책임자로서 사과나 유감 내용은 전혀 없었다.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앞으로 경찰 지시를 잘 따라 질서를 어지럽히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는 것이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가 말한 만전 대책이었다. 그것은 제주도민을 자극할 추가 파견 응원 경찰이었다. 다음 날 목포항을 출발한 전남 경찰 122명과 전북 경찰 100명으로 구성된 응원 경찰대가 제주에 파견되었다.

3월 15일 응원 경찰 파견으로 경찰력이 늘어나자, 조병옥은 파업 주동자들을 검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본색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경찰은 3·1절 기념행사를 주도한 남로당 제주도당 간부들을 검거했다. 이를 시작으로 총파업 중이던 각 직장 간부들을 차례로 검거하기 시작했다. 명령 이틀 만에 200여 명을 잡아들였다. 검거는 계속되었다. 3월 말 300여 명, 4월경에는 500여 명이 붙잡혔다. 사람들로 가득 찬 좁은 유치장은 앉을 곳이 없어 서서 수감생활을 했다.


경찰은 구금자 조사를 위해 응원 경찰로 구성된 ‘특별수사과’를 만들었다. 특별수사과에는 검거자들이 늘면서 당시 육지 유명 수사요원들이 가담했다. 구금자 조사 과정은 살벌했다. 유명 수사요원들은 1946년 10월에 있었던 ‘대구 사건’으로 이미 이름을 떨쳤기 때문에 구금자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특별수사과 경찰들은 파업 주동자와 배후를 말하라며 구금자들을 고문하고 구타했다.


경찰에 의해 검거된 구금자들은 공무원, 교사, 경찰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놀라운 점은 임관호 제주도 산업국장을 비롯한 제주도청 간부 10여 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검거 배경은 파업이 시작된 제주도청 직원들이 파업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그를 추대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그는 4·3이 한참이던 1948년 5월 28일 제주도지사로 부임하게 된다.


본격적인 연행이 시작되자 경기 경찰청 소속 경찰 99명으로 구성된 응원 경찰대가 추가로 파견되었다. 제주에 총 4차례에 걸쳐 들어온 응원 경찰은 421명으로 늘었다. 늘어난 응원 경찰로 제주 경찰 입지는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다. 이럴만한 결정적인 이유는 3·10 총파업에 제주 경찰이 동참하면서다. 아무래도 응원 경찰로서는 파업 동참자들과 같은 출신인 제주 경찰들이 불편한 존재였을 것이다. 이렇듯 일부 제주 경찰의 3·10 총파업 참가는 제주 경찰이 응원 경찰들에게 더욱 의심받는 계기가 되었다.


3·10 총파업에 대해 미군정의 해결 의지는 강경했다. 그들이 내세운 해결책은 대화가 아닌 강경 진압이었다. 미군정은 총파업 이후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회를 제주에 대거 보내, 파업 세력들을 강경 진압하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응원 경찰의 강한 도민 탄압과 조사 과정에서 특별수사과의 구타와 고문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미군정이 선택했던 강경 진압은 미군정과 제주 좌파 세력 간의 대립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3월 20일 제주 시찰 6일 만에 조병옥은, 제주 미군정청에서 3·1절 발포사건에 대한 담화를 발표했다. 발포사건 책임자 처벌보다 정당성을 강조한 발표문이었다. 두 차례 발포에 대한 평가도 달랐다. 도립병원에서 생긴 발포는 경찰관의 무사려한 행동으로 실수를 인정했다. 하지만 관덕정 앞 광장에서 일어난 발포는 치안유지를 위한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다. 끝까지 제주도민을 무시하고 강경책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자세다.


경찰처럼 정당방위를 주장하지 않고 사건에 책임을 지는 공직자도 있었다. 박경훈 제주도지사는 이번 사건으로 직을 내려놓았다. 그는 경찰을 통제해야 할 의무가 있는 도지사로서 책임을 통감한다며, 제주 군정장관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도지사 사퇴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격해지는 민심 수습보다는, 도민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자세로 일관했다. 민간인 사상자를 만든 경찰은 좌우 진영 구분 없이 모두 하나같이 비판받았다.




작가 생각


3·1절 기념대회 때 기마경찰이 아이를 치지 않았더라면 상황은 달라졌다. 혹시 쳤더라도 후속 조치가 있었더라면, 같은 민족을 학살하는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마경찰 행동은 실수라고 하지만, 너무나 큰 일을 불러왔다. 기본적인 사과 한마디였으면 끔찍한 동족상잔인 4·3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따라서 기마경찰의 미흡했던 대처는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내가 난생 처음 본 관덕정은 양옆으로 뻗은 처마 때문에 위용 있어 보였다. 검은 광장 위에 든든하게 앉아 있는 모습은 과히 제주 심장다운 모습이었다. 제주 모든 역사는 관덕정에서 이뤄졌다. 오랜 세월동안 겪었던 많은 고통도 있었지만, 지금은 편안한 모습으로 보였다. 난 세월의 흔적이 있는 기둥에 잠시 기대어 광장을 보며 생각했다. 더 이상 광장은 피가 아닌 축제의 장으로 열리길 바랐다. 난 기댄 몸을 일으키며 내가 뭐라도 되는 양 기둥을 괜히 한번 쓰다듬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 관덕정 유적지 정보 ]

주소 l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이동 983-1

문의 l 제주목 관아 매표소 064-710-6718

기타 l 주차장 없음

이전 04화고요해서 더 슬픈 도령마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