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무공작의 달콤함이 묻어있는 주정공장 수용소

by 예지리파파
250705 (3).JPG


“이봐, 김 선장.”

“네, 중대장님!”

“오늘 밤 10시에 출항할 거니까 준비해.”

“네? 10시에요? 아침에 육지에 도착해야 합니까?”

“아니야. 그냥 준비해!”

“네.”

산지항에서 화물선을 운항하던 김 선장이 점심을 먹고 쉬고 있었다. 담배를 한 대 물자 해병대 대대장이 다가와 명령을 내렸다. 김 선장은 갑작스러운 야간 출항이 이례적이라서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그냥 비밀스러운 일이 육지에 있겠거니 생각했다.

김 선장은 집에서 쪽잠을 자고 저녁도 먹지 않은 채, 일찍 나와 배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멀리서 트럭 여러 대의 거친 엔진음이 점점 가까이 들리기 시작했다.

“트럭이 몇 대야? 트럭을 육지로 옮기려나 본데······.”

라이트를 켠 트럭들이 줄지어 산지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점점 가까이 올수록 화물칸에 실린 것이 사람으로 보였다. 자세히 보니 아무리 못해도 한 트럭에 50명은 되어 보였다.

“어! 저건 사람인데. 웬 사람들이 저렇게 많이 탔지.”

김 선장은 트럭을 보고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을 육지로 이송하는 것으로 알고 할 일을 했다.

트럭이 항에 도착하자 군인들은 화물칸 사람들을 한 명씩 배로 옮겨 태웠다. 그들은 손이 뒤로 묶인 채 어설프게 움직였다. 모두 옮겨 태우자, 군인들은 돌이 실려있던 트럭에 올라 돌을 배로 옮기기 시작했다. 돌은 언뜻 봐도 10kg 정도는 되어 보였다. 군인들이 들기에 무거운 수준은 아니었다. 돌을 모두 옮기자, 군인들도 배에 탔다. 군인들은 선수, 선미, 우현과 좌현으로 흩어져 경계를 서고 있었다.

출항 한 시간쯤이 지나자, 대대장은 김 선장에게 배를 세우게 했다. 그리고 갑자기 호루라기를 불었다. 군인들은 그 신호가 뭔지 아는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대대장의 지시를 받은 군인들은 배에 실어놓은 돌을 사람들 앞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옮겨진 돌을 사람마다 발목에 새끼줄로 묶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본 김 선장은 놀랐다. 돌을 왜 사람 발목에 묶는지 아무리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대장이 다시 신호를 주자 군인들은 일제히 배에 탄 사람들을 잡고 바다로 밀기 시작했다. 김 선장은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너무 놀라 본능적으로 대대장을 힘껏 불렀다.

“대대장님!”

대대장은 간섭하지 말라는 듯 김 선장을 돌아보며 날 선 투로 말했다.

“닥쳐! 이새끼야!”

돌아오는 것은 매서운 눈빛으로 보내는 감정 섞인 욕지거리뿐이었다. 김 선장은 바다로 뛰어들어 사람들을 건져주고 싶지만, 어수선한 시국에 집에 있는 아이들이 생각났다.

아직 바다로 떠밀리지 않은 사람들은 군인들의 행동을 온몸으로 저항하며 고함을 질렀다. 갑판은 사람들 비명으로 아비규환이 되었다. 출항 때 500여 명을 태웠는데 갑판이 텅 비기까지 한 시간이 걸리지 않은 듯하다. 대대장이 돌아가자고 김 선장을 보고 말했다.

“출발해!”

“······”

아무 말 없이 김 선장은 배를 다시 산지항으로 돌렸다. 그는 조금 전 본 광경으로 손이 떨리고 눈에는 눈물이 쉼 없이 흐르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어둠이 한참인 항으로 돌아왔다. 항에 정박해 배에서 군인들이 내리고 대대장이 김 선장을 불러 담배를 건네며 한마디 했다.

“수고했어. 오늘 있었던 일은 비밀이야. 저 새끼들 어떻게 되는지 봤지!”


| 주정공장 수용소에서 일어난 일을 소설로 구성 |




끝이 보이지 않는 푸른 바다가 펼쳐진 제주항. 섬에 드나드는 배와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쁘게 어우러져, 항구는 활력이 넘친다. 섬에 도착한 이들의 웃음과 설렘 가득한 표정은 여행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분주한 제주항을 지나 조금만 걸음을 옮기면, 낮게 드러난 주정공장 터가 보인다. 그곳은 한때 억울한 사람들이 갇혀 생사를 알 수 없었던 곳이었다. 제주항의 활기와 대비되는 이곳에서,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순간을 마주한다.


일제의 원료 생산지였던 주정공장


제주 주정공장은 일제강점기 1943년에 완공되었다. 경제 수탈에 앞장섰던 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알코올 생산을 위해 만든 대규모 주정공장이었다. 주정은 술에 들어가는 주원료이며, 곡물로 만들어서 마실 수 있는 알코올이다. 당시 주정공장에서 생산되던 주정은 고구마를 원료로 하여 농도 95% 알코올을 생산했다. 이곳에서 생산된 주정은 일본으로 가져가거나 일본군 항공기 연료로 사용되었다.


주정공장은 해방 후에도 계속해서 가동되었다. 당시로써는 국내 산업 여건이 매우 열악했기 때문에 자원이 많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1970년대 말까지 생산한 알코올은 여러 분야에 큰 도움이 되었다. 주정공장은 제주도민 손이 거치지 않은 곳이 없다. 일제가 제주도민을 강제로 동원해 건물을 지었고, 내부 시설을 구축했으며, 생산과 운반 등 많은 노동을 시켰던 곳이다.


주정 원료 고구마를 저장하기 위해서 큰 창고가 필요했다. 산지항(현 제주항) 앞 넓은 터에 여러 동으로 지은 창고는 제주에서 손꼽히는 크기였다. 하지만 이곳은 한때 제주도민에게 엄청난 공포를 주는 곳이기도 했다. 창고는 4·3이 발발하고 도민을 구금하기 위한 장소로 쓰였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한번 예비검속된 도민을 구금하는 장소로 쓰였다.


살기 위해 산으로 도망간 중산간마을 주민들


1948년 10월 17일 송요찬 9연대장은 제주에 포고령을 내렸다. 포고령은 ‘해안선에서부터 5km 밖 지점을 통행하는 자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총살하겠다’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즉, 바닷가에서 한라산 쪽 5km까지는 통행이 되고 그 안쪽으로 통행하다 보이면, 즉시 총살한다는 뜻이다. 포고령과 함께 ‘소개령(疏開令)’이 내려졌다. 소개는 한곳에 집중된 물자나 사람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을 말한다.


토벌대는 주민이 떠난 중산간마을 집을 무장대가 사용 못 하도록 모두 불 질렀다. 그러다 마을에 남아있던 주민이 발견되면 무장대로 간주해 이유 없이 끌고 가거나, 그 자리에서 총살했다. 무장대를 향해 전개된 작전 여파는 중산간마을 주민에게 많은 피해를 끼쳤다. 이 작전으로 제주 전역 중산간마을이 모두 불탔고, 4·3 전체 희생자 중 대부분이 이 무렵에 발생했다. 이 작전을 ‘초토화작전’이라고 한다.


초토화작전으로 궁지에 몰린 것은 무장대뿐만 아니었다. 중산간마을 주민은 소개령으로, 모두 해안마을로 이주해야 해 걱정이 많았다. 생계를 모두 버리고 가자니 막막했고, 남아 있으려니 무장대로 간주해 토벌대 손에 죽을 것 같았다. 강제 이주를 거부한 주민은 어쩔 수 없었다. 학살을 일삼는 공포의 대상인 토벌대를 피하는 길은 한라산으로 도망가는 것뿐이었다. 한라산은 무장대가 주로 숨어 지내고 있는 곳이다. 주민은 그런 사실을 알고도, 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입산했다. 당장 죽을 수는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주민은 낙엽이 지고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서글픈 계절에 집을 떠나 산으로 들어갔다. 남자들은 무게가 나가는 무쇠솥을 지게에 지고, 그리고 공간이 남으면 가을에 수확한 감자, 고구마 등 식량을 얹어 갔다. 여자들은 아이들을 안고, 업고, 그리고 간단한 살림살이를 들고, 이고, 지고 갔다. 등에 업힌, 가슴에 안긴, 손을 잡은 아이들은 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배고파 보채고, 다리 아파 보채고, 계속 보채기만 했다. 이들이 걱정하는 것은 무섭게 쫓아오는 토벌대뿐만 아니라 다가오는 한라산의 매서운 추위도 걱정이었다.


입산한 주민을 하산시키기 위한 선무공작


1949년 3월 2일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유재흥 대령)가 창설되었다. 창설 목적은 세력이 약해진 무장대를 조기 제거해, 5·10 재선거를 무사히 치르기 위해서였다. 무장대 조기 제거로 제주 사태를 정리하는 것은 정부의 미국 원조와도 관계가 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출범 초기 미국으로부터 무기와 경제 원조를 받기 원했다. 하지만 정리되지 않은 4·3은 이승만 정부에게 도움 되지 않았다. 그때 필요했던 것이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다. 시국 안정을 위해서라도 사령부는 조기 성과를 내야만 했다.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권한은 막강했다. 제주에 주둔하고 있던 2연대와 제주 경찰,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회를 통합 지휘했다. 사령부는 총 2기로 나눠 활동했다. 1기는 창설부터 3월 말까지 제주 주둔 2연대장 함병선 중령이 지휘했다. 3월 말 유재흥 사령관이 부임해 3월 말부터 5월 15일까지 2기를 지휘했다.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2기부터 입산자와 무장대에 대한 진압 작전이 변경되었다. 유재흥 사령관은 전임 함병선 사령관의 잔혹했던 작전을 즉시 바꿨다. 그는 체포되어 온 포로를 직접 심문했으며 전투 요원이 아니면 음식과 담배를 주며 석방했다. 폭력보다는 대화로 해결하려는 유화책이었다. 이런 방법은 사령부에 큰 도움이 되었다. 석방된 포로는 무장대 은신처를 알려주고, 무기 은닉처를 알려주며, 동료들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는 입산자들에게 본격적인 ‘선무(宣撫)공작’을 펼쳤다. 사령부는 서북청년회 횡포를 막으면서 과거 일은 묻지 않을테니, 안심하고 산에서 내려오라는 전단을 살포했다. 그 결과 매일 몇백 명씩 내려와 선무공작은 성공적인 작전이었다. 선무공작이 시작되고 짧은 기간에 하산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4월 중순 3,500여 명이 하산했고, 5월 중순에는 6,000여 명이 자발적으로 산에서 내려왔다. 성공적인 선무공작은 토벌대 관점에서 시간과 병력을 아끼고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었다.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었다.


선무공작은 초토화작전으로 중산간마을이 이미 초토화되었고, 무장대 세력도 많이 약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3월 말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유재흥 사령관이 제주에 처음 내려왔을 때다. 그가 도착했을 때는 해안선 위로는 이미 다 타버려 없어졌다. 그리고 한라산에 피난민 2만여 명과 무장대 230여 명이 있다고 보고 받았다. 무장대 중 남로당원은 극히 적었고,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휩쓸려 들어간 주민이 많았다. 이렇듯 4·3 발발 1년이 지난 1949년 3월은 무장대 세력이 많이 약해진 때였다.


선무공작을 통해 주민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많은 주민이 들뜬 마음으로 하산하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하산자들은 집이 아닌 각 지역 경찰서나 군부대에서 조사를 받으러 갔다. 조사를 마치면 죄가 없었으므로 집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집이 아닌 제주 각지 수용소에 구금되었다.


산북(한라산 북쪽) 지방에서 하산한 주민은 제주읍 주정공장, 농업학교, 일도리 공회당, 용담리 수용소 등에 분산 구금되었다. 산남(한라산 남쪽) 지방에서 하산한 주민은 서귀포읍 정방폭포 감자공장, 단추공장, 농회창고, 천지연 폭포 부근 창고 등으로 구금되었다. 산북 지방에서 하산한 1만여 명의 주민은 조사 명목으로 ‘제주 주정공장 수용소’에 구금되었다.


체포되어 내려왔거나 자발적으로 내려왔거나를 따지지 않았다. 여자와 어린이, 노인 대부분은 피난민으로 분류되었고, 남자들은 피난민 지위가 부여되기 전 철저한 교육이 이뤄졌다. 수용소에 구금되어 있던 주민은 선무공작의 달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은 날이 갈수록 점점 집으로 갈 수 있는 희망이 사라지고 있었다.


약속과 달리 왜 이런 구금 생활을 했는지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해체에 답이 있다. 5·10 재선거가 무사히 실시되고 유재흥 사령관은 5월 13일 제주를 떠났다. 그가 떠난 것은 임무를 마친 사령부가 5월 15일자로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유재흥 사령관은 선무공작으로 하산 시 죄를 묻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그가 떠나면서 약속은 무효가 되었다. 수용소에 있는 주민은 속은 기분이 들었다. 점점 갈수록 수용소 생활은 힘들어지고 하루가 멀다고 고문과 구타가 이어졌다. 용공 혐의를 받은 수많은 구금자가 총살되거나 전국 형무소로 수감되었다.


없던 죄도 생기는 수용소 생활


주정공장에 구금된 수용자들은 힘든 생활을 이어갔다. 죄를 묻지 않겠다는 약속과 달리 산에 올랐다는 이유만으로 혹독한 고문과 모진 구타를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구금 기간 동안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있었고, 수용소의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목숨을 잃는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 석방되지 못한 임산부가 수용소 안에서 출산하는 때도 있었다. 규칙적이지 못한 식사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겪는 고통이었다. 이처럼 일제가 저지른 만행과 다를 것 없는 일들이 주정공장 수용소에서 일어났다. 이 일은 국민 재산과 생명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군인과 경찰에 의해 일어났다.


수시로 이뤄진 고문은 무장대와 관련된 억지 자백을 받기 위해서였다.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엄청난 고문과 구타가 있었다. 주민은 경찰이 묻는 말에 대답을 못 했다. 왜냐하면 산에서 한 것이라고는 숨어 지내는 것이 전부였는데, 무장대와 연관성을 질문하니 할 말이 없었다. 경찰 질문에 원하는 대답이 없으면, 돌아오는 것은 고문과 구타였다. 억지 자백을 받은 구금자는 이유도, 죄명도 모른 채 군사재판으로 넘겨졌다.


실체 없는 허구 재판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 민간인을 위한 군사재판이 열렸다. 4·3 당시 군인이나 군 종사자를 군사재판에 세우는 일은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민간인을 일반재판이 아닌 군사재판에 세우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민간인을 상대로 군사재판이 열린 이유는 계엄령 때문이다.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내렸다. 이날을 기점으로 그전까지 미결수로 수감되어 재판받거나, 계엄령 이후 체포된 사람들은 모두 군사재판으로 넘겨졌다.


먼저, 12월에 열린 재판은 지난 10월 17일 내려진 소개령에 관련된 주민이 대상이었다. 이날 재판은 소개령을 거부해 입산했던 주민이나, 무장대로 활동하다 산에서 체포된 사람들 재판이었다. 재판은 12월 한 달간 12차례 열렸다. 재판 결과 871명 모두 ‘내란죄’로 유죄 판결받았다. 그중 사형 판결은 100명이 받았고 무기징역 판결은 102명이 받았다.


수감자들은 각각 목포, 마포, 서대문, 대구, 인천, 전주형무소에 분산 수감되어 형을 시작해, 다른 형무소 이감을 반복했다. 19세 이하 소년 수감자 166명은 인천형무소에 지정되어 수감 되었고, 여성 수감자 48명은 전주형무소에 지정되어 수감되었다. 사형 집행은 1949년 2월 27일 제주읍 화북리 근처에서 이뤄졌다.


이듬해 7월에 열린 재판은 선무공작으로 하산한 주민 재판이었다. 재판은 6월 23일부터 7월 7일까지 열렸으며, 총 10차례 재판이 열렸다. 재판 결과 1,659명 모두 ‘적에 대한 구원 통신 연락 및 간첩죄’로 유죄 판결받았다.


사형을 선고받은 345명 중 249명은 10월 2일 오전 9시 정뜨르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에서 총살되었다. 사형 집행은 별도 심문 과정 없이 집행됐다. 큰 호 앞에 눈을 가린 사형수를 세우면 군인들이 총을 쏴 호 안으로 떨어지게 했다. 나머지 수감자들은 전국 각지 수용소로 수감되었다. 19세 이하 소년 수감자 194명은 인천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여성 수감자 84명은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수감자들은 수감생활 하루하루가 여러모로 힘든 날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추위와 배고픔, 왜 여기 끌려왔는지 알지 못하는 억울함과 분노가 힘들게 했다. 어수선한 시국에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매일 눈물을 흘리며 지냈다. 열악했던 형무소 시설 또한 수감자를 괴롭혔다. 부산형무소는 1실 면적이 3~4평 정도인데 42명을 수용했다. 4.3사건 수형인은 일반 수용자와 다르게 노역, 운동이 금지되었다. 일과가 그냥 갇혀 있는 것이 전부였고 제주 사람들은 사상범으로 분류되었다.


식사는 깡통에 나온 게 전부였고 여름에는 많은 수감자들이 질병에 걸려 죽었다. 인천형무소는 1실 면적이 2평 정도인데 그나마 부산형무소보다 적은 15~16명이 수용되었다. 그뿐 아니라 형무소에서 아플 경우 수감자들은 적절한 의료행위를 받지 못하기도 했다. 10대 소년들이 수감되어 있는 인천형무소에서는 이질과 설사병으로 많이 죽었다.


수감자들은 가족과 소식조차 마음대로 주고받지 못했다. 형무소 내 기본 품목 지급도 부족했다. 계절별로 바뀌는 옷도 지급되지 않았으며, 기본 위생용품 또한 지급되지 않았다. 수감자들은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 계절 옷과 내복 상하의, 양잿물과 손수건, 돈을 보내달라고 했다. 그리고 수감자는 편지를 마음대로 쓸 수 없어, 밖에 있는 가족들이 편지를 써 소식을 전해달라고 했다.


수감자 중 일부는 석방되기도 했다. 그들이 겪은 군사재판 과정을 보면 절차에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수감자들을 재판에 넘기기 위해서 혐의를 입증해 재판에 회부하여야 함에도, 혐의를 입증할 증거, 소송 기록이 없었다. 여러 가지를 종합해 보면 법이 정한 최소한의 절차가 무시된 실체가 없는 허구 재판이었다. 혐의가 없음에도 구금자는 경찰 추정만으로 죄목을 명시해 재판에 넘겨졌다. 따라서 이렇게 열린 군사재판은 정상적인 재판이라고 볼 수 없는 불법적인 재판이었다.


한국전쟁 발발과 예비검속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예비검속(豫備檢束)법’을 시행했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범죄를 저지를 것 같을 경우, 미리 검거하여 범죄를 예방한다는 취지다. 이 법으로 경찰은 국민보도연맹 가입자와 4·3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사람들을 다시 잡아들였다. 예비검속에 대해서는 뒤에 ‘새벽 2시와 5시, 두 번의 총성이 울린 섯알오름’에서 자세한 소개가 있다.


예비검속으로 잡혀 온 주민은 다시 주정 공장으로 끌려왔다. 이들은 경찰 심사로 A, B, C, D 네 등급으로 나뉘었다. D급은 금방이라도 적에게 협조할 것 같은 가장 위험한 자, C급은 그것보다는 위험도가 조금 낮은 자, B급은 적에게 협조하거나 이로운 행동을 할 여지가 비교적 적은 자, A급은 전혀 그렇지 않거나 애매한 자로 분류된다. 하지만 등급에 대한 근거는 없다. 예비검속자들 중 과거 좌익 단체에 가입하지 않았거나, 4·3 당시 무장대 활동이 전혀 없는 주민도 끌려왔다. 경찰과 사이가 좋지 않거나 주민 간 원한 관계가 있어 신고당하면 여지없이 끌려왔다. 이렇듯 예비검속법은 근거 없는 악법이었다.


1950년 8월 4일 예비검속자 첫 학살이 있었다. 밤 9시경 제주경찰서, 제주 주정공장 두 곳에 수용되어 있던 수감자 500여 명을 제주항으로 끌고 갔다. 부두에 도착하니 해군 경비정 한 척이 보였다. 수감자들은 토벌대 지시로 배에 올라탔다. 제주 앞바다를 출항해 한 시간 정도 나가 수감자들 다리에 돌을 묶어 바다에 던져 수장시켰다. 밤 9시경에 출항했던 경비정은 두 시간이 지났을 때쯤 빈 배로 돌아왔다.


8월 19일 밤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두 번째 학살이 있었다. 제주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던 예비검속자 수백 명은 정뜨르비행장으로 갔다. 그들은 미리 대기하던 군인들이 있었고 그곳에서 총살되어 암매장되었다.


토벌대는 왜 비행장에서 학살 후 암매장했을까? 정뜨르비행장은 일제강점기 때 만든 제주 비행장 중 한 곳이다. 지리적으로 육지와 가장 가까워 나중에 제주 관문이 될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비행장이 확장되면 발굴이 쉽지 않음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시신 수습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던 것은 아닌지 의심된다.



작가 생각


주정공장 수용소를 관람하고 나니 가슴이 답답했다. 그리고 선무공작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봤다. 선무공작은 어쩌면 서로에게 피 묻히지 않고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는지 모른다. 끝까지 초심을 잃지 않았다면 말이다. 결과적으로 선무공작은 회유책에 불과했고, 도민은 수용소에 수감되어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호의를 진심으로 받아들여 산에서 내려왔지만, 호의를 베푼 사람은 육지로 떠났다. 그리고 뒤를 이은 사람들은 호의를 저버리고 돌변했다. 만일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해체되지 않고 유재흥 사령관이 계속 머물렀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당시는 도대체 누굴 믿어야 했을지 모르는 세상이었다. 경찰도, 군인도, 정부도 모두 야바위꾼이었다. 달콤함에 넘어간 수용소에 구금된 주민은 진짜 억울했을 것 같다. 목숨을 지켜준다고 해서 내려왔는데 목적지가 수용소면 속은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나도 역사관 전시 자료를 관람하는 내내 그 기분이 들었다. 속이 답답해 사이다가 생각날 정도였다.


맑은 공기를 마시러 밖으로 나왔다. 역사관 마당에 유난히 큰 눈물 형상 조형물이 눈에 띈다. 손이 묶인 채 끌려가는 세 명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들이 서 있는 방향이 제주항 쪽인데, 수용소를 막 나서 형을 집행하러 가는 것을 형상화한 것일까. 이런 추측으로 마음이 먹먹해졌다. 이 멘탈로 다음 유적지 ‘곤을동’으로 갈 수 있을까 걱정됐다. 일단 차에 탔다. 그리고 창문 열고 바닷바람 쐬며 천천히 이동했다.




[ 주정공장수용소 4·3 역사관 유적지 정보 ]

주소 l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940-13

문의 l 주정공장수용소 4·3 역사관 064-725-4302

기타 l 운영시간 9:00~18:00(2·4주 월요일 휴관일)

관람료 무료

주차장 있음

keyword
이전 05화총성과 침묵 사이에 있는 관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