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빨리 한 잔 올리고 갑시다.”
“뭐가 그렇게 급해? 우리가 죄지었어?”
“몰라서 물어요? 야밤에 이렇게 모여있으면 또 의심받으니 그렇죠!”
“괜찮아, 이제 다 끝났어. 잔 올려놓고 우리도 좀 쉬고, 경태 가는 것도 보고 가야지.”
주위를 살피며 잔뜩 겁먹은 민철이를 정수가 안심시킨다. 둘을 포함해 마을 주민 10여 명이 학교 운동장에 몰래 들어와 있다. 작년 전쟁통에서 죽은 경태를 위로해 주려고 이장을 포함해 마을 주민 몇몇이 모여있다.
늘 말 없고 조용하던 경태는 마을에서 해결사 역할을 했다. 밭에 거름을 뿌릴 때면 몇 가마라도 인상 한번 구기지 않고 날라 주고, 담이 무너지면 모난 돌 깎으며, 내 집처럼 다시 쌓아주는 등 마을에 궂은일은 늘 경태가 해결하곤 했다. 항상 마을 일을 자기 일처럼 앞장서서 하던 정이 넘치고 수줍음이 많던 친구였다.
한동안 경태 죽음은 마을에서도 한참 동안 이야깃거리가 됐다. ‘하늘도 무심하다.’, ‘경태는 거기에서도 잘 살 거야.’, ‘경태 빈자리가 너무 클 것 같다.’ 등 모두가 경태를 위로했다.
어느 날 마을 퐁낭 아래 사람들이 모여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정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정수는 경태와 달리 욱하는 성격이다. 한번 큰소리를 내면 아무도 못 말릴 정도다. 정수 아버지조차 말리기 힘들었다.
어디서 술이 잔뜩 취해 신발을 질질 끌며 정수가 나타났다. 정수는 퐁낭 아래 앉아 있는 이장을 발견했다.
“이장님! 애는 갔어도 상여는 메야지 않겠어요?”
“시신이 없는데 무슨 상여야······”
이장이 애매한 반응을 보이자 정수가 한마디로 이장 입을 다물게 했다.
“애가 없으면 어때요, 경태 옷이 있는데······”
“······”
이장이 할 말을 잃었다. 사실 정수가 한 말이 가당치 않은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때는 시신이 어디 있는지 몰라 소지품이나 옷가지로 헛묘를 만들기도 했었다.
이장도 그렇게 싫지만은 않은 눈치다. 워낙 마을에 경태 손길이 안 뻗은 곳이 없고, 본인도 경태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정수는 같이 입대한 친구 죽음이 편치 않았다. 정수는 어릴 적부터 옆집에 살며 말 없던 경태가 친구들에게 맞고 있으면 해결사 역할을 해줬다. 그런 단짝 친구라서 더 마음이 무겁다. 정수는 경태 마지막 길을 친구답게 보내주고 싶어 마을 이장에게 부탁했다.
“내가 다······돈도, 사람도 알아서 모아볼게요!”
“정수야 그럼, 상여는 내가 준비해 볼게······”
마을 이장은 정수가 앞장서는 게 미안했다. 이장으로서 마을 일에 솔선수범해야 하지만 아직 그렇게 용기를 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마을이 전부 불타고, 젊은 청년이 죄다 죽고, 육지형무소로 끌려갔지만,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게다가 전쟁이 나 그나마 남아있던 젊은 청년마저도 전쟁 통에 동원됐다.
이런 일을 두 눈으로 봤던 이장은 더 이상 마을에 피해가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마음과 달리 마을을 위해 조용하게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경태를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다행히 옆 마을 장의사를 알고 있던 이장이 할 수 있는 것은 상여 준비 정도였다. 그것이 죽은 경태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도리였다.
| 북촌리에서 일어난 일을 소설로 구성 |
총성과 비명, 애처로운 절규로 아비규환이 되었던 마을. 이제는 사람 냄새 풍기며 고요한 마을이 되어 포근함을 느끼게 한다. 그들이 떠나며 남긴 아쉬움은 남은 이들의 그리움이 되었다. 한날한시 눈물로 제사상을 차리는 북촌리는 고요함만이 그들을 위로하려 애쓴다. 너븐숭이를 스쳐 가는 바람은 그날의 비명을 담은 듯 날카롭게 지나간다. 매서운 바람조차 막아주려는 듯 검은 돌에 둘러싸인 애기무덤을 바라보면, 오늘따라 마음이 유난히 무겁다.
잦은 사건으로 토벌대에 주목받는 북촌리
제주시 조천읍 동쪽 끝에는 작고 아담한 북촌리가 있다. 일주도로와 가까워 찾아가기 쉽고 교통이 편리하다. 포구가 있어 바다로 나가기 편리하며, 포구 앞바다는 계절마다 다양한 해산물이 풍부하다. 작지만 매력적인 북촌리는 조용하기만 하다. 이런 매력을 아는 관광객들이 종종 마을을 찾는다.
북촌리는 일제강점기 동안 수많은 항일 운동가를 배출했다. 그 사실은 조천읍에 제주항일기념관이 증명해준다. 해방 후에는 인민위원회가 활발했고, 왕성한 주민 활동이 있었던 마을이다. 하지만 평화롭던 북촌리에 끔찍한 대학살이 일어났다. 북촌리는 중산간마을이 아닌 해안마을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피해가 있었다. 마을 전체가 불타는 것은 물론 인명피해 또한 제주 전체에서 두 번째로 많았다. 대학살이 있기 전 마을에는 주민과 경찰이 부딪혀 죽거나 다치는 일이 종종 있었다.
1947년 8월 13일 북촌리에서 ‘삐라 사건’이 발생했다. 제주 곳곳은 광복절을 앞두고 마을 돌담에 삐라를 많이 붙였다. 북촌리도 마찬가지였다. 삐라는 외세를 몰아내고 민족정신을 이어가자는 취지의 내용이었다. 경찰은 오전 11시쯤 순찰 도중 삐라를 붙이던 주민을 발견했다. 경찰이 나타나자, 주민은 모두 도주하기 시작했다. 도주자가 있으면 쫓아가서 잡아야 하는 것이 경찰의 정상적인 임무다. 하지만 경찰은 도주하는 주민을 향해 총을 쐈다. 경찰의 이런 행태 자체만 보더라도 생명의 소중함은 전혀 없었고, 강도 높은 탄압만 있던 때라는 것을 경찰 스스로 증명했다.
경찰 발포로 10대 소녀를 포함해 여자 2명과 남자 1명이 총상을 입었다. 경찰 발포에 흥분한 한 소녀는 마을 사이렌을 울려 주민을 모으기 시작했다. 소녀는 주민과 함께 경찰에 맞설 것을 다짐했다. 감정이 격해져 있던 주민은 때마침 마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찰 2명을 발견하고 집단 폭행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던 200여 명의 주민은 함덕 지서를 찾아가 항의했다.
함덕 지서 경찰관은 지서 지붕에 장착해 놓은 기관총으로, 몰려오는 주민을 향해 위협사격을 가해 해산시켰다. 이 사건으로 주민 40명이 경찰에 검거되었고, 일부는 검찰로 송치됐다. 북촌 삐라 사건은 마치 관덕정 3·1절 발포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다행히 북촌 지서 경찰의 절제된 행동으로 큰 희생을 막을 수 있었다. 북촌 삐라 사건처럼 주민과 경찰이 충돌하는 일은 제주 도내 몇 안 되는 사건이었다.
1948년 4월 21일 무장대가 북촌리 선거관리위원회를 습격했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로당이 5·10 선거를 방해할 목적으로 일으켰다. ‘단선(單選)·단정(單政) 반대’를 슬로건으로 건 무장대가 선거관리위원회를 습격해 선거 기록을 탈취하고 방화했다. 선거관리위원회 습격은 제주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선거일이 다가오자 전국이 혼란스러웠다. 미군정은 특히 제주 사태를 안정시켜 선거를 무사히 치르려고 많이 노력했다. 경찰로만 선거관리위원회를 지키기 힘들어지자 ‘향보단(鄕保團)’을 설치해 경찰을 돕게 했다.
1948년 6월 16일에는 우도에서 출발해 제주 읍내로 가던 배 한 척이, 폭풍으로 인해 북촌 포구에 기항했다. 배에는 경찰과 경찰 가족, 일반 주민 등 15명이 타고 있었다. 배가 포구에 닿기 전 경찰 1명이 바다 고기떼를 보고 총을 쐈다. 총소리를 듣고 무장대들이 포구로 몰려들었다. 포구에 배가 닿자, 무장대 3명은 배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선실에 있는 경찰 2명을 발견했다.
무장대는 경찰과 실랑이 끝에 총을 빼앗아 경찰을 쏘았다. 1명은 그 자리에서 죽고 1명은 상처를 입었다. 무장대는 배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하선시킨 후, 산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무장대에 끌려간 이들은 선흘곶 궤(굴)에서 생활하다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토벌대 작전으로 모두 풀려났다.
북촌리 주민은 3·1절 기념대회에 참여한 주민 명단이 밝혀지면서 수배를 받았다. 그리고 삐라를 붙이다가 경찰 발포가 있자 격분한 주민이 경찰지서로 항의하러 갔고, 무장대가 선거관리위원회 사무실을 습격했다. 기상악화로 기항했던 배에서 경찰이 무장대에 살해되었고, 민보단원 21명이 이유 없이 토벌대에게 학살됐다. 이런 사건들로 결국 북촌리는 토벌대에 주목받는 마을이 되었다.
감정 자제 실패로 만든 비극 시작
1949년 1월 17일 오전, 서북청년회로 구성된 2연대(연대장 함병선 중령) 3대대 병력이 구좌읍 월정부대 시찰을 마쳤다. 이들은 대대본부가 있는 함덕으로 복귀하기 위해 북촌리를 지나고 있었다. 무장대는 토벌대가 이동한다는 정보를 미리 알고 매복해 있었다. 병력이 북촌국민학교 서쪽 마가리 동산에 다다를 때쯤, 무장대 기습을 받고 군인 2명이 현장에서 죽었다. 이 소식은 북촌리 원로들에게 알려졌다. 원로들은 마을에서 군인들이 죽었는데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로들은 오랜 고민 끝에 시신을 대대본부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들것 옮겨 담은 시신을 원로 10명이 옮겼다.
대대본부로 옮겨진 시신을 보자 동료 군인들은 격분했다. 흥분한 군인들은 시신을 옮긴 원로 10명 중 경찰 가족 1명을 제외하고, 9명을 함덕리 고두물로 끌고 가 총살했다. 동료 군인들이 주민에게 분풀이한 이유는, 북촌 주민 중 무장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시신을 마을 아무 곳에 묻었더라면 원로들은 어땠을까? 아니면 시신을 보고도 못 본 척했더라면 희생되지 않았을까? 아쉽게도 원로들의 도의적인 책임은 마을에 큰 피해를 준 원인이 되었다.
오전 11시경 토벌대가 북촌리에 갑자기 나타났다. 군인들은 집마다 다니며 주민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북촌국민학교(현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모이게 했다. 학교 운동장에 모인 주민은 1,000여 명이 되었다. 토벌대는 주민이 집에서 나오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북촌리 4백여 채 집들이 순식간에 불 타버렸다. 마치 하늘이 타는 듯했다.
토벌대는 운동장에 모인 주민을 군경 가족과 일반 주민으로 나눴다. 긴 막대를 이용해 마치 OX 게임하듯이 이쪽저쪽 두 부류로 나눴다. 이유도 모른 채 나눠진 주민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왜 여기에 있고, 평소 친했던 주민은 왜 저쪽에 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우리를 갈라놓은 이 막대는 왜 있는지 두렵기도 했다. 공포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선별 작업이 끝나자, 토벌대 책임자가 주민 앞에 나섰다.
토벌대 책임자는 마을 민보단장을 앞으로 불러, 불려 나온 이유를 말했다. 그리고 1,000여 명의 주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느닷없이 총을 꺼내 쐈다. 조금 전 자신의 부하들이 무장대에 기습받은 것이 마을 보초를 잘못 선 민보단장 탓이라는 것이다.
이를 본 주민은 더 많은 공포에 휩싸였다. 그들은 벌벌 떨리는 온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민보단장을 죽인 총소리에 놀란 일부 주민은 눈치껏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있는 무리는 곧 죽는다는 것을 직감한 주민 일부는 군경 가족 무리에 들어가면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뛰었다. 하지만 토벌대는 무리를 이탈해 움직이는 주민을 향해 갑자기 총을 쐈다.
이 발포로 주민 몇몇이 희생됐다. 갓난아기를 안은 젊은 엄마가 총에 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아기는 엄마가 죽은 줄도 모른 채 목청껏 울기만 했다. 울어도 엄마가 반응이 없자, 아기는 본능적으로 쓰러져 있는 엄마에게 기어갔다. 그리고 엄마 품을 찾았다. 엄마가 두 팔 벌려 힘 있게 앉아주지 않자, 아기는 스스로 품에 안겼다. 그리고 덮고 있던 옷을 헤집고 젓을 찾았다. 아기에게 엄마의 젖은 안정감을 줬다. 아기는 엄마 체온이 식은 줄도 모른 채 있는 힘껏 젖을 빨았다.
주민을 공포로 몰아넣은 대학살
상황이 진정되자 토벌대는 일반 주민 무리에 있는 어린아이에게, 빨갱이 가족을 찾으라고 시켰다. 아이가 빨갱이에 대해 알 턱이 없다. 순진한 아이에게 말하면 그들이 찾던 빨갱이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이에게 향한 지시는 또 다른 학살을 일으킬 빌미가 아니었는지 의심스럽다. 토벌대는 아이에게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다. 그러자 모여있던 일반 주민을 남녀노소 구분 없이 4~50명씩 학교 밖으로 끌고 갔다. 토벌대는 그들을 당팟(신을 모시는 당집이 있던 밭), 옴팡밧(움푹 팬 밭), 너븐숭이(넓은 돌밭), 탯질(타작하던 곳) 등으로 끌고 갔다. 토벌대는 끌고간 주민을 집단 학살했다.
어느덧 오후 5시쯤이 되었다. 대대장은 사살 중지 명령을 내렸다. 학교에서 끌려 나온 300여 명이 죽고 나서야 학살은 멈췄다. 대대장 명령은 거기까지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명령은 다음날로 이어졌다. 대대장은 운동장에 남아 있던 주민을 해산시키고 내일 함덕에 있는 대대본부로 모두 모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병력을 철수시켰다.
1월 18일이 되었다. 주민 의견은 양쪽으로 갈라졌다. ‘토벌대 지시에 따라야 한다’와 ‘대대본부에 가면 모두 죽으니, 한라산으로 도망가야 한다’라는 부류로 나뉘었다. 주민은 어제 일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기 때문에 잔혹함을 잊지 못했다. 지시에 따르지 않았을 때 생기는 보복이 무섭기도 하고 지시대로 대대본부로 갔을 때, 그들에게 죽는 것도 무서웠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순간이다. 결론이 났다. 많은 주민이 토벌대 지시대로 함덕 대대본부로 갔다. 지시를 거부한 주민은 한라산으로 숨었다. 무시무시한 토벌대를 조금이라도 더 멀리 피하고 싶어서였다.
순순히 지시에 따랐던 선택은 큰 실수였다. 토벌대는 모인 주민 중 한 명을 지목해 앞으로 불렀다. 그리고 어제 아이에게 시키듯, 산으로 도망간 가족을 지목하라고 했다. 궁지에 몰리자, 살려고 그랬던지 그의 행동이 놀랍다. 산으로 간 가족도 지목했지만, 평소 개인적인 감정이 있던 가족을 지목했다. 손끝으로 지명된 주민 100여 명이 함덕해수욕장으로 끌려가 잔인하게 집단 학살됐다. 한편, 토벌대를 조금이나마 멀리하려고 한라산으로 도망갔던 주민은 어떻게 됐을까? 그들은 운 좋게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공포가 휩쓸고 간 북촌리는 이틀에 걸쳐 마을 주민 400여 명이 학살되는 전무후무한 일이 생겼다. 안타깝게도 북촌리는 4·3 기간 동안 한마을에서 일어난 단일 사건으로, 가장 많이 희생된 마을이라는 오명을 가졌다. 그리고 희생자 수로는 제주읍 노형리(현 노형동) 다음으로 많았다. 북촌리는 한날한시 섣달 열여드렛날, 음력으로 12월 18일이면 이집 저집 할 것 없이 마을 전체가 제사를 지낸다. 이 사건으로 북촌리의 많은 남자는 대학살에서 죽거나, 산에서 못 돌아와 한때 ‘무남촌(無男村)’이 되었다.
대학살 현장과 기념관
북촌국민학교에 모인 주민이 겁에 질려 떠밀리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토벌대는 학교를 중심으로 일부는 동쪽으로, 일부는 서쪽으로 40~50명씩 끌고 갔다. 운동장에서 1차로 끌려갔던 주민은 학교 동쪽 당팟에서 학살됐다. 당팟은 땅이 넓어 120여 명이 학살됐다.
2차 학살은 주민 70여 명이 서쪽으로 끌려 갔다. 주민이 학살된 곳은 옴팡밧, 너븐숭이, 탯질 등이다. 끌려온 주민은 죽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동쪽에서 나는 총성을 듣고서야 모두 죽겠다고 생각했다.
2009년 너븐숭이 일대에 ‘너븐숭이 4·3 기념관’이 개관했다. 당팟, 옴팡밧, 너븐숭이 등에서 있었던 학살을 추념하기 위해서다. 기념관은 4·3이 있기까지 과정이 잘 설명되어 있다. 토벌대로부터 목숨을 건진 주민 증언이 나오는 영상자료도 상영되고 있다. 기념관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의 위령 공원도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어린아이들 무덤인 ‘애기 무덤’이 군데군데 있다. 애기무덤 위 놓인 장난감을 보면 가슴이 먹먹했다.
위령 공간에 세워진 위령비에는 희생자 436명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기록된 명단을 살펴보면 누구의 ‘처’, 누구의 ‘자’, 누구의 ‘녀’, 누구의 ‘모’와 같이 가족을 의미하는 호칭들이 많다. 이는 가족 단위 희생이 많았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북촌 대학살은 가족 단위 희생이 많았고, 20세 이하 희생은 전체 희생자에 30%에 달했다. 또 전체 희생자 중 65%가 남성이었다. 이를 보면 토벌대 주 표적은 젊은 남성 즉, 청년이었다.
분노를 느끼게 하는 참모 회의
앞서 1월 17일 있었던 대대장 사격 중지 명령은 이유가 있었다. 인류애가 느껴지는 대대장의 자발적인 사격 중지 명령은 절대 아니었다. 학살이 있던 날 대대장은 주민이 모여있는 북촌국민학교로 구급차를 타고 빠르게 갔다. 대대장은 도착하자마자 군경 가족과 일반 주민을 선별하라는 명령부터 내렸다. 주민 선별을 마친 장교들을 불러 모아 그가 타고 온 구급차 안에서 참모 회의를 열었다.
선별해 놓은 주민을 어떻게 할지 7~8명의 장교가 대대장과 회의했다. 회의 중 참모들로부터 놀라운 발언들이 나왔다. 한 장교는 운동장 한군데에 모여 있는 주민을 향해, 높은 곳에서 박격포를 쏴서 몰살시키자고 했다. 대한민국 국민 중 군복무를 통해 박격포 파괴력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 발언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람 목숨의 소중한을 느끼지 못하는 발언이었다. 아무리 시국이 무법하다지만 어떻게 사람 목숨을 한낱 벌레 목숨처럼 여기는지, 또 이것이 대한민국 장교 입에서 나왔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장교 입에서 더 어처구니없는 발언이 나왔다. 입대한 사병들이 아직 적을 살상해 본 경험이 없으니, 경험을 쌓는 차 직접 사람을 쏴 보는 게 좋겠다고 했다. 대대장은 이 발언을 선택했다. 그는 일부 군인에게 40~50명씩 학교 밖으로 끌고 가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학살이 한창이던 중 구급차 안에 발만 동동 구르는 운전병도 있었다. 운전병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대대장에게 큰 용기를 내 애원했다. ‘지금 운동장에는 일가친척도 많고 같이 학교 다녔던 친구도 많다. 그러니 제발 그들을 살려달라’라고 애원했다. 대대장은 운전병 부탁을 듣고 그들을 빼줬다. 한 번 부탁이 먹힌 운전병은 계속해서 대대장에게 부탁했다. ‘지금 끌려 나가는 노인, 부녀자,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냐, 이들도 살려달라’라고 부탁했다.
돌아오는 대대장 대답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대대장은 저들을 살려주고 싶지만, 살려둘 때 어떻게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지 걱정이라고 했다. 그 말은 꼭 죽여야 되지는 않지만, 아침에 집마다 불을 질렀으니, 주민이 돌아가더라도 살 방법이 없어 죽이겠다는 것이다. 운전병은 이들이 풀려나면 옆 마을 함덕리에 이들 친척이 많다. 그곳에서 생계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제야 학살을 멈추는 사격 중지 명령이 내려졌다. 이 때는 이미 300여 명이 학살된 오후 5시쯤이었다.
대대장 결정이 있기까지 과정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넘어갔다면 사격 중지 명령을 내린 대대장은 상당히 인류애 넘치는 사람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가 가진 지위에서 내뱉는 말 한마디는 엄청난 무게를 가진다. 그의 생각과 말 한마디는 수백 명 군인을 움직이기 때문에 절대 가볍지 않다. 부대를 총괄하는 사람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북촌 대학살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했다.
명백한 제노사이드, 북촌 대학살
북촌 대학살은 집단학살을 뜻하는 ‘제노사이드’였다. 제노사이드는 1948년 12월 9일 국제연합기구인 UN에서 채택되었다. 집단 살해 방지 및 처벌에 관한 조약으로 특정 인종, 민족, 종교의 차이를 이유로 집단 살해하는 행위를 방지한다는 국제법이다. 제노사이드는 국제법상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남한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로 출범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UN에 가입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대한민국 자체를 국가로 인정하고, 외국 많은 나라로부터 국가로 인정받으려 했다면 국제법을 따라야 했다. 시국이 어수선하고 제노사이드 관련 협약이 시행 초기라도 말이다. 엄연한 국가로서 국가 공권력이 국민에게 향하는 대학살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 엄격히 사용해야 할 국가 공권력이 이처럼 가볍게 사용되었다면 정권에 대한 평가는 무능, 무치일 뿐이다.
4·3 동안 수많은 제주도민이 잔인하게 학살됐다. 군경 토벌대와 근거 없는 권력 서북청년회가 앞장서 학살했다. 학살 이유가 되는 근거나 증거, 그에 따른 정상적인 재판절차는 없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주민을 무분별하게 이유 없이 끌고 갔고, 토벌대나 서북청년회는 감정적으로 학살을 일삼았다. 특히 노인과 어린이 학살은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4·3 동안 집단학살은 인권유린이며, 북촌 대학살은 명백한 제노사이드였다.
마음 놓고 울지도 못했던 아이고 사건
1954년 1월 23일, 한국전쟁이 끝나고 4·3도 끝나갈 무렵이었다. 조용하던 북촌리에 주민 가슴을 다시 한번 놀라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마을 주민은 평소 친분이 있는 주민 한 명이 한국전쟁에서 전사하자 추도식을 열어줬다. 주민은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에서 빈 꽃상여를 메고 꽃놀이를 했다. 꽃놀이가 한창이던 때 누가 말했다. 마을이 불타고 많은 주민이 억울하게 학살당한 지 6주년이 되었으니 술을 올리고 묵념하자고 했다. 떠나보낸 사람을 마음속 깊이 새기며 묵념이 시작되자 한 명씩 흐느끼기 시작했다. 잔잔한 흐느낌이 모이자, 주민은 ‘아이고, 아이고’ 하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대성통곡이 되고 말았다. 떠나는 사람에게 눈물을 보이며 조촐한 행사를 마치고 주민은 해산했다.
며칠 뒤 경찰은 주민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 추도식을 올렸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북촌 파견소는 이 일을 제주경찰서로 보고했다. 경찰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주민도 놀라고, 보고 받은 경찰도 놀랐다. 모두 6년 전 있었던 학살 공포가 다시 올까 봐 겁이 났다. 온 제주가 이제 겨우 잠잠해졌는데 서로 이 일로 다시 시끄러워지길 원치 않았다.
운동장에 모인 주민은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경찰 조사를 받았다. 다행히 반성문 제출로 이 사건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먼저 간 영혼을 위해 술을 올리고, 잠시 통곡한 것은 조사받을 일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도리다. 결과적으로 양측 모두 인명피해가 나지 않아 다행일지 모르지만, 이 사건으로 마을 이장은 이장직을 내려놓게 되었다. 이 사건을 ‘아이고 사건’이라고 한다.
작가 생각
북촌 대학살을 돌아보면 너무 아쉬운 생각이 든다. 피해가 너무 컸기에 그렇다. 무장대 습격을 받아 부하를 잃은 대대장의 격앙된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 마음을 다른 방법을 찾아 풀었더라면, 무고한 생명과 삶의 터전은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북촌리는 해안마을이라 4·3 기간 중 큰 화를 입지 않고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한 명의 어리석은 판단이 너무나 큰 비극을 만들었다.
너븐숭이를 천천히 돌아봤다. 그리고 애기무덤을 자세히 봤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욕지거리 밖에 나오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험하고 나쁜 욕은 다 하고 싶었다. 도대체 아이는 왜 죽인 것인지 모르겠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한편, 북촌 주민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마을에 이렇게 잔혹한 일이 벌어졌는데 애써 참으며, 다시 마을로 돌아와 살았다는 것이 놀랍다.
마을 곳곳이 학살터였고 어느 땅을 파도 시신이 있었을 텐데 대단한 용기를 냈던 것 같다. 아마 주민 서로가 지나간 일을 피하지 않으려는 용기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냐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봤다. 다음 유적지는 스스로 성을 쌓아 가둬 지냈던 낙선동 4·3성이다. 창문을 열고 바람을 좀 맞고 싶은 기분이다.
[ 너븐숭이 4·3 기념관 유적지 정보 ]
주소 l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1599
문의 l 너븐숭이 4·3 위령성지 064-783-4303
기타 l 운영시간 9:00~18:00(2·4주 월요일 휴관일)
관람료 무료
주차장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