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놈이 물고 다니는 것이 뭐야?”
“어디서 큰놈 하나 물어 왔구먼···”
“누구 집에 소나 돼지 잡았는가?”
“이놈아! 지금 시국에 잡을 소나 돼지가 있긴 하겠어?”
“그럼, 저 개가 물고 다니는 사람 뼈 같은 거는 뭐야?”
“······”
두 청년이 쉬고 있다. 마을에서 유독 정이 깊기로 소문난 재덕이와 상필이다. 두 명은 팽나무 아래에서 담배에 불을 지펴 연기를 뿜으며 세월을 보내는 중이다. 앞집 담벼락에 바짝 붙어 가는 개 한 마리가 보인다. 두 살 아래 동생인 엄동이네 누렁이였다. 자세히 보니 살점 같은 것이 너덜너덜 붙어 있는 것 같은 큰 뼈 하나를 물고 있었다. 누렁이는 혹시 누구에게라도 빼앗길까 봐 앞만 보고 빠른 걸음으로 가고 있었다.
재덕이가 말했다.
“저 새끼, 횡재했네, 횡재했어···큰 놈 하나 물었구먼.”
옆에 있는 상필이가 거든다.
“부럽다, 부러워···고기 먹은 지가 언제냐···”
재덕이가 받아친다.
“고기는 웬걸, 비계라도 좀 마음껏 먹어봤으면 좋겠다. 안 그러냐?”
둘은 연신 연기를 내 뿜으며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그때 누렁이를 찾으며 누렁이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엄동이 엄마가 지나간다.
정 많은 상필이가 묻는다.
“어머니, 어디를 그렇게 급하게 가세요?”
엄동이 어머니가 상필이와 재덕이를 보고 묻는다.
“너희들 방금 누렁이 못 봤냐? 이놈이 소나무밭에 가더니 땅을 파서 뼈를 하나 물고 도망갔다는데, 아무리 봐도 사람 뼈를 물고 간 것 같아. 큰일이다.”
재덕이와 상필이가 놀라며 말한다.
“네? 그 게 사람 뼈라고요?!”
물고 있던 담배를 던지며 상필이가 묻는다.
“사람 뼈가 어디서 나왔어요?”
엄동이 어머니가 마치 자신이 본 것처럼 자세히 말한다.
“왜 있잖아, 3년 전에 말이야. 해 바뀌고 금방 도령마루 소나무밭에서 주정공장이라지 아마, 그때 군인들이 사람들 끌고 와서 다 죽였잖아. 그때 묻어 놓은 시신 같은데 이놈이 배가 고팠는지···환장할 노릇이다.”
둘은 조금 전 본 장면을 서로 확인이라도 하듯이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다. 부럽다고 한탄하던 조금 전 자신들 모습이 역겨워지고 있다. 이 시국에 큰 뼈 하나를 물고 가는 누렁이가 부러워 놀랐지만, 지금은 말도 안 되는 것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에 더 놀랐다.
그런데 엄동이네 누렁이가 처음은 아닌 것 같았다. 소나무밭에 누렁이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도령마루에서 일어난 일을 소설로 구성 |
찾는 이들의 발길이 뜸해 더 고요한 도령마루. 바람이 불면 바람만이 이곳을 찾아와 나무들을 흔든다. 나무들은 마치 70여 년 전의 기억을 떨쳐내려는 듯, 온 힘을 다해 흔들고 있다. 농사짓고 소 키우던 아주 평범한 마을 언덕은, 1948년의 총성과 함께 비극의 기억을 묻은 땅이 되었다. 푸른 제주 하늘 아래 고요함만이 남아 있는 도령마루. 바람은 지나지만 아픈 기억은 그대로 남아 있다. 도령마루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날 아픔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40여 년 만에 되찾은 이름
제주국제공항은 제주를 대표하는 관문이다. 공항에서 직선거리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도령마루’라는 곳이 있다. 그곳은 도령마루라는 이름보다 다른 이름으로 수십 년 동안 제주도민에게 불리던 곳이다. ‘비행장 옆 소나무밭’, ‘서 비행장’ 등으로 불렸고 ‘해태 동산’이라는 이름으로 최근까지 불렸다. 도령마루는 신제주 입구 교차로에서 도령로를 타고 연동으로 넘어가는 길 우측에 있다. 공항에서 올라오는 도로와 합류하는 지점 우측에 있으며, 지대가 낮아 도로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여러 이름에 의미가 있다. 비행장 옆 소나무밭은 소나무가 많이 있었고, 서 비행장은 지금 제주국제공항을 정뜨르 비행장 또는 서 비행장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럼, 해태 동산은 왜 그렇게 불렀을까? 해태 동산은 국내 유명 과자 기업과 관련이 있다. 기업 홍보를 위해 1970년대 초 도령마루에 해태상을 기증하면서부터 그렇게 불렀다. 해태 동산은 제주도민에게 원래 이름 도령마루보다 더 유명하고, 더 많이 알려져 있던 이름이었다.
2019년 4월 제주시가 4·3 71주년을 맞아 원래 이름으로 돌려 놓았다. 특정 업체 홍보보다 제주도민의 아픔이 묻혀 있는 곳이라는 점을 널리 알리기 위한 제주시의 노력이었다. 도령마루는 40여 년 만에 해태상을 철거하면서 원래 이름을 다시 찾았다.
도령마루는 옛날 양반집 도령들이 대정현(현 서귀포시 대정읍·안덕면)과 제주성(현 제주시)을 오가면서 쉬어가던 고개다. 오가며 힘들었던 몸을 잠시 멈추어 편안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으로, 설렘을 안고 기다려지는 장소였다. 하지만 한때는 피비린내 가득했던 ‘학살지’라는 오명을 얻어 무서워 근처에 가기도 꺼려지는 공포의 장소가 되었다.
이곳은 인류애를 느낄 수 없었고, 양심이 바짝 메마른 자들의 만행이 있었던 도내 여러 학살지 가운데 한 곳이다. 해태 의미는 옳고 그름과 착하고 악함을 판단하고 재난을 막아준다는 상상의 동물이다. 당시 기증했던 기업은 도령마루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해태를 두 마리씩이나 기증했을까?
조용한 마을에 들이닥친 공포
1948년 11월 3일 도령마루에서 첫 번째 집단 학살이 있었다. 이른 새벽 연동리에 9연대(연대장 송요찬 중령)로 구성된 토벌대 수십 명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마을에 숨어있는 무장대를 찾는다며 집마다 돌아다녔다. 총칼을 찬 무장대를 본 주민은 공포에 떨었다. 한참 동안 이뤄진 수색 결과 중장년 7명이 토벌대에게 끌려 나왔다. 당시 마을에 웬만한 청년은 이미 도망가고 없어 중장년이 잡혀 왔다. 인근 마을에서 발생한 청년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이 원인이었다.
토벌대에 끌려 나온 이들은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끌려갔다. 그들은 멀리 가지 못했다. 그들이 끌려간 곳은 마을에 있던 도령마루 소나무 숲이었다. 소나무 숲에 도착한 주민은 나무 한 그루당 한 명씩 묶였다. 그리고 곧 토벌대 총격이 시작되었다.
소나무 숲에 끌려가 희생된 주민은 가족 중 누군가가 무장대에 합류했거나, 무장대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끌려갔다. 또 아무 이유 없이 토벌대 자신들 생각으로, 무장대에 합류했을 것 같은 의심이 드는 사람이면 여지없이 끌고 갔다. 토벌대의 근거 없는 판단과 그에 따른 위험천만한 행동이 곧 법이었던 시절이었다.
무장대에 합류했거나 동조했던 가족이 있다면 당사자를 체포해 조사하여야 한다. 그리고 불법이 있다면, 재판을 거쳐 형을 내리고 그 형을 집행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절차는 어디에도 없었다. 전쟁 중도 아닌 상황 속에서 당사자도 아닌 가족을 끌고 가 총살한다는 것은 부당한 공권력을 집행하는 예시다.
하늘이 도운 탓일까, 토벌대에게 총을 맞은 청년 한 명이 죽지 않았다. 부상을 입은 그는 가족에 의해 집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의료 행위를 받지 못해 다음 날 사망했다. 한 청년 어머니는 아들이 토벌대에 의해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소나무 숲으로 달려갔다. 나무에 묶인 채 축 늘어져 있는 아들 모습을 본 어머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토벌대는 통곡하는 어머니 모습이 보이자, 어머니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토벌대 총에 부상 입은 어머니도 집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어머니도 열흘이 지나 숨을 거뒀다. 총살에서 살아나 부상입은 청년, 아들의 잔혹한 모습을 보고 통곡하던 어머니. 모두 병원으로 옮겨 적절한 치료를 받았다면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안타까운 희생이 아닐 수 없다.
연동리는 200가구에 못 미치는 규모를 가진 작은 마을이다. 해방 후 특별나게 유명한 인물도 없었고 4·3 발발 후 이름난 무장대도 없었다. 그래서 토벌대에 의한 주민들 피해도 적었고, 무장대 공격도 많지 않아서 비교적 피해가 적었던 마을이었다. 10월 17일 제주 전역 중산간 마을에 ‘소개령(疏開令)’이 내려져 대부분 주민이 해안 마을로 이동했다. 하지만 연동리는 중산간 마을이었음에도 소개령이 내려지지 않았다. 이렇듯 큰일 없었던 연동리는 첫 희생이 있던 11월 3일까지는, 토벌대에게 눈에 띄지 않았던 조용한 마을이었다.
소개령은 작전 중 아군 피해를 줄이거나, 적군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 물품들을 강제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한곳에 모아져 있는 것들을 옮김으로써 아군 피해를 줄일 수 있다. 또, 적군에게 넘어가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미리 이동시킴으로써 적군에게 도움이 되지 않게 한다. 이를 소개(疏開)라 하고 이를 명령하는 것을 소개령(疏開令)이라고 한다.
12월 12일 연동리 첫 방화가 발생했다. 토벌대는 연동리 외곽 마을 2곳을 방화했다. 토벌대가 벌인 연동리의 첫 초토화작전이었다. 주민은 인근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실제로 마을에 생기자 깜짝 놀랐다. 토벌대가 저지른 만행에 놀란 청년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산이나, 인근 궤(굴)로 도망치기에 바빴다. 피신한 주민은 숨어 지내다 토벌대에 의해 발각되면 그 자리에서 총살을 당했다.
무장대에 받은 자극을 주민에게 보복한 토벌대
이듬해 1월 8일 도령마루에서 또 집단 학살이 있었다. 지난 12월 29일 제주에 주둔하던 9연대가 육지로 빠져나가고 뒤를 이어 2연대(연대장 함병선 중령)가 들어왔다. 1월 3일 2연대로 구성된 토벌대는 새벽에 도남리(현 도남동)를 급습했다. 도남리는 알동네, 웃동네, 못동네, 섯동네와 같이 4개의 자연마을이 있고 100여 채의 집이 있었다. 주민 대부분은 농업과 축산업을 하며 살던 조그마한 동네였다.
마을을 급습한 토벌대는 집마다 돌아다니며 방화하기 시작했다. 마을은 불과 몇 분이 되지 않아 전소되었다. 놀란 상황을 접한 주민은 집 밖으로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토벌대는 주민을 마을 공회당으로 모이게 했다. 그중 20여 명이 토벌대에 끌려갔다. 그들은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끌려가 동양척식 주식회사라 불리던 ‘제주 주정공장’에 구금되었다. 이들 중에는 도남리 주민뿐만 아니라 오등리(현 오등동), 이호리(현 이호동)에서 소개되어 온 주민 6명도 있었다.
토벌대가 도남리를 급습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무장대는 9연대와 2연대 간의 교체기 동안 느슨한 틈을 타 토벌대를 자극했다. 2연대가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주둔지를 공격하였고, 1월 3일에는 제주도청이 불타는 일이 발생하였다. 조사 결과 내부 직원의 불만으로 인한 방화였음이 밝혀졌지만, 이런 사소한 일들이 2연대를 자극했다.
그 결과 토벌대는 도남리를 급습해, 마을을 방화하고 주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2연대의 뒤늦은 초토화작전이었다. 결국 2연대장은 지난 12월 31일 해제된 계엄령을 다시 선포해 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 무장대에게 자극받은 2연대는 보복으로 무고한 주민을 학살했다.
2연대는 마을 주민이 산으로 입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남쪽에서 북쪽으로, 한라산에서 해안쪽으로 몰아가며 작전을 전개했다. 이들은 집마다 불을 지르면서 포위망을 점점 좁히면서 주민을 압박했다. 주민은 도망칠 곳이 없자 토벌대 지시대로 따랐다. 지난 11월 13일 시행되었던 제주 전역 초토화작전에도 피해가 없었던 도남리 주민은 느닷없는 작전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1월 8일 제주 주정공장에 구금되어 있던 구금자 28명이 도령마루로 끌려갔다. 도착한 구금자는 소나무 한 그루당 한 명씩 묶여 토벌대 총에 숨을 거뒀다. 이날 있었던 학살은 도령마루에서 일어난 집단학살 중 가장 많은 희생자를 만들었다.
도령마루는 1948년 11월 3일부터 이듬해 3월까지 총 18회에 걸쳐 69명의 주민이 토벌대에 집단학살 당한 곳이다. 희생자 중 양민증이 없어서 끌려간 주민도 있었다. 보릿대에 숨어 있다가 지병인 천식으로 기침이 심해지자, 토벌대에 발각되어 학살 당하기도 했다.
수습되지 않는 시신과 애타는 유족들
학살이 있고 군경의 방해로 한참 동안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심지어 3년이 지나 수습한 경우도 있었다. 치아 상태나, 도장, 허리띠 등 소지품으로 신원을 확인해 수습할 수 있었다. 수습하지 못한 시신은 동네 개들이 냄새를 맡고 땅을 파, 뼈를 물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한때 도령마루는 흉흉한 소문들이 떠돌아 꺼려지는 장소였다.
당시 도령마루는 용담리(현 용담동), 연동리(현 연동), 오라리(현 오라동), 도두리(현 도두동)와 붙어 있었다. 도령마루는 네 마을 주민과 해안마을로 소개되어 온 주민을 학살하는 집단 학살지였다. 도령마루의 원래 규모는 지금보다 훨씬 컸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도로가 개발되고 확장되면서 많은 부분이 도로에 편입되었다. 그중 현재 남아 있는 곳은 도령마루 서쪽 소나무밭이다. 도령마루 학살지에 관한 자료나 증거들은 많이 부족한 상황이다. 더욱 정확한 실태 조사를 위해서 더 많은 자료와 증언들이 필요하다.
작가 생각
도령마루 소나무 숲 일부는 그대로 있다. 소나무들은 그날 일어난 일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장면도 분명 봤을 것이다. 사람들이 쓰러질 때 나던 피비린내를 맡으며 토벌대의 무서운 총구에서 나는 굉음과 화약 냄새도 맡았을 것이다. 소나무에 묶여 하나둘씩 쓰러지던 그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누군지도 모르는 옆 사람이 하나둘씩 죽어 갈 때 그들은 어땠을까. 그렇게 그들은 삶의 끝이 느껴지는 두려움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모두 안고 억울하게 떠났다.
나의 제주 4·3 여행 첫 유적지는 공항에서 가까운 도령마루다. 나는 여러 번 제주 방문을 했지만, 이토록 엄숙했던 적이 없다. ‘다크’라는 무거운 주제로 왔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다음 여행지는 무슨 일이 일어난 곳인지 궁금하다. 무거운 마음을 안고 다음 유적지 관덕정으로 이동했다.
[ 도령마루 유적지 정보 ]
주소 l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2동 1805
문의 l 제주특별자치도청 4·3 지원과 064-710-8452
기타 l 주차장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