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해방이 되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했다. 드디어 35년 동안 지긋지긋했던 일제강점기가 끝났다. 일본군 무장해제 때문에 승전국들이 국내에 진주해 있었다. 소련이 먼저 평양에 진주하여 소련군정을 시작했고, 미국이 뒤늦게 서울에 진주해 미군정이 시작됐다.
미군은 육지 일본군과 제주 일본군에 각각 다른 날 항복 받고, 무장해제 했다. 제주 일본군은 육지 일본군보다 한 달가량 더 머물러 있었다. 6만여 명의 일본군은 제주 도민을 향해 여전히 만행을 일삼고 있었다. 패망으로 인한 막무가내식 분노 범죄, 모리배들과 전쟁 물자 뒷거래는 삶이 힘든 제주도민을 더 힘들게 했다. 제주 일본군 만행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고, 제주도민이 느끼는 해방의 기쁨은 크게 없었다. 골칫거리였던 제주 일본군은 1946년 2월 15일이 되어서야 철수 완료했다.
청년이 돌아오다
청년이 돌아왔다. 일본군으로 징병·징용되어 갔던 청년이었다. 일본 군수공장, 각종 노동 현장, 전쟁에 끌려갔던 6만여 명의 청년이 돌아왔다. 동포가 귀국했다는 점은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갑자기 늘어난 인구로 제주는 심각한 상황이 됐다.
인구가 늘어나자 문제점도 많았다. 청년이 귀국하자 제주는 정치적인 문제보다, 사회·경제적 문제가 더 시급했다. 일자리는 정해져 있고, 귀국한 청년이 직장을 못 구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군정에 의해 일본과 무역이 중단되어 생필품 구매가 힘들었다. 더욱이 경찰과 미군정 관리들은 밀수품 단속을 빌미로 귀국 동포들이 가지고 있던 일본 물품을 빼앗는 일이 빈번했다. 결국 이런 일들은 민심을 자극했다. 돌아온 가족들은 분명 반가웠지만, 인구 증가는 제주 전체로 볼 때 큰 문제였다.
제주 도민에게 많은 지지를 받은 인민위원회
해방이 되자 나라를 다시 세우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여운형은 애국자들과 ‘건국동맹’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건국동맹은 나중에 건준이라고 불리던 ‘건국준비위원회’로 조직이 커졌다. 조선총독부 일부 권한을 이어받은 건국준비위원회는 다시 ‘인민위원회’로 이름을 바꿨다.
특히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제주만이 가지고 있는 공동체 의식으로 다른 지역과 달리 더 활발했다. 각 마을에 교육기관을 설립해 주민 교육에 힘쓰는 것처럼, 독립운동가 중심으로 뭉쳐진 인민위원회는 도민에게 많은 신경을 썼다. 이로써 인민위원회는 제주도민으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인민’이라는 용어가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1948년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기 전까지 국민, 시민보다 인민이라는 용어를 보편적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태극기도 북한과 같이 사용했다. 남과 북이 자체 정부를 수립하고 나서 태극기와 인공기로 나뉘고, 인민과 국민으로 나뉘었다.
국민 기대를 저버린 미군정
우리 국민은 미군정에 친일 청산을 많이 기대했다. 너무 고통스러웠고 길었던 일제강점기여서 더욱 그랬다. 하지만 미군정은 국민 기대와 달랐다. 도제(道制) 실시로 관계가 소원해진 인민위원회를 견제하기 위해 각 분야에 걸쳐 많은 친일파를 등용했다. 효율적인 통치라는 이유로 군인, 경찰, 공무원 자리에 친일파를 등용했다. 인민위원회는 친일파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미군정은 이를 이용했다. 일제강점기 때 억압하던 그들을 앞세워 인민위원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미군정은 인민위원회를 마땅치 않게 여겼다. 맥아더 포고령에 말했듯이, 승전국으로서 북위 38도선 이남 지역은 미군정이 통치한다. 따라서 남한 정부는 둘이 아닌 미군정이 유일했고, 한 국가에 두 정부는 있을 수 없었다. 미군정은 국내를 통치하는 데 인민위원회가 큰 걸림돌이었다. 외세 도움 없이 우리 민족끼리 해결하려는 인민위원회, 강점기 운영국을 이겨 승전국 지위를 가진 미군정의 대립은 클 수밖에 없었다.
외세의 결정에 달린 한반도
1946년 3월 20일 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미국과 소련이 해방된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회담은 서로의 견해차로 성과 없이 종료됐다. 회담 결과를 본 미국 유학파 출신 이승만이 전국 순회 연설을 했다. 그중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했던 연설이 문제가 됐다. “통일 정부를 고대하였으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하자는 이른바 ‘정읍 발언’이었다. 이승만은 민족주의 차원에 배치되는 단독 정부를 꿈꾸고 있었다. 통일 정부를 지향하는 많은 국민은 단독 정부 수립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1947년 5월 21일 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다시 서울에서 열렸다. 하지만 이번 회담도 1차와 마찬가지로 성과 없이 종료됐다. 회담이 종료되자 미국은 더 이상 소련과 뜻을 함께할 수 없음을 알고, 한국 문제를 국제연합기구인 ‘UN’으로 넘겼다.
1947년 11월 14일 UN은 ‘UN 감시 아래 남북한 인구 비례 총선거’를 실시하라고 결정했다. 인구 비례에 따라 의석수는 남한 200석, 북한 100석이었다. 소련은 선거가 치러질 경우 남한이 의석을 더 많이 차지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반대했다.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거는 강행됐다.
1948년 1월 8일 UN 한국 임시위원단이 입국했다. 이들 역할은 선거 홍보, 선거구 점검 등 선거 전반에 대한 관리였다. 미국 손을 들어주었던 UN이 보낸 한국 임시위원단을 소련이 방북 거절했다. 앞서 밝힌 것처럼 인구 비례 총선거에 동의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총선거를 앞두고 난처해진 미국과 UN은 다시 의견을 모았다.
1948. 2. 26 UN 소총회가 열렸다. UN은 소총회에서 ‘UN 감시 아래 가능한 지역에서만 선거한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소련의 임시위원단 방북 거절로, UN 감시 아래 가능한 지역은 남한뿐이었다. 선거는 1948년 5월 10에 치러지는 5·10 선거였다. 이 선거는 제헌 국회의원 200명을 뽑는 우리나라 최초 선거였다.
끔찍한 일을 불러온 3·1절 발포사건
1947년 3월 1일 제28주년 3·1절 기념 대회가 있었다. 제주북초등학교(현 제주북초등학교)에서 대회를 마친 시민들이 가두시위를 했다. 시위대를 구경하던 군중 속에 한 아이가 기마경찰 말에 치이는 사고가 발생했다. 경찰은 몰랐는지 아무 구호 조치 없이 현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화가 난 군중은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 군중은 급기야 제주경찰서로 향했다.
경찰서 앞에 도착할 때쯤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총소리가 들린 현장에는 6명이 죽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번 총격은 시위대 해산 목적이 아니었다. 공권력에 대한 도전의 보복 조치로, 시위대를 살상하고자 조준사격 한 것이다. 이 사건을 ‘3·1절 발포사건’이라 한다. 3·1 발포사건은 1년여 후 엄청난 일을 불러왔다.
유례없는 민·관 합동 3·10 총파업
3·1절 발포사건을 계기로 남로당 제주도당은 제주도 전체 총파업을 주도했다. 급기야 3월 10일 민·관 총파업이 시행됐다. 학생, 공무원, 자영업자, 운수업체, 통신업체, 금융업, 일부 경찰 등 제주 사회 전반에 걸쳐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은 제주 전체 직장 95%, 166개 기관과 단체가 참여했다. 도지사는 3·1절 발포사건 책임을 지고 사직서를 제출했고, 학생들은 등교를 거부했다.
일반 공무원과 중문 지서 경찰은 파업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파면당했다. 제주도 전체가 들끓고 있었다. 이 사태에 대해 미군정이 내놓은 해결 방안은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이 아니라 강경 진압이었다. 그리고 제주를 빨갱이 섬으로 불렀다. 제주도민 70% 이상을 좌익 세력으로 간주했다.
제주 민심을 자극한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회 투입
제주는 자체 경찰력이 부족했다. 큰 행사가 있거나 소요 사태가 있으면 육지에서 경찰이 투입됐다. 이렇게 투입되는 경찰을 ‘응원(應援) 경찰’이라고 한다. 3·1절 기념대회가 열리던 1947년도 육지에서 100명의 응원 경찰이 투입됐다. 4월까지 제주에 투입된 응원 경찰은 500여 명이었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응원 경찰에게 파업 주동자들을 검거하라고 명령했다. 파업에 참여한 주민 저항은 갈수록 거세졌다. 주민 항의가 거세지자, 응원 경찰이 추가로 투입됐다. 응원 경찰은 주민을 마구잡이로 연행했다. 응원 경찰은 4·3이 발발하고 한 때 2,000여 명까지 늘어났다.
38도선 이북에서 청년들이 내려왔다. 그들은 남한에 정착 후 여러 우익단체를 통합해 ‘서북청년회’를 결성했다. 서북청년회 구성원은 공산당의 토지개혁으로 많은 땅을 빼앗긴 사람, 재산이 몰수된 사람, 친일 청산 대상 도피자 등 공산당 탄압을 못 견딘 사람들이었다. 북쪽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남쪽으로 도망 온 범죄자와 소련군정으로부터 억압받는 기독교인들도 있었다. 공산주의에 치가 떨린 사람들이 극우주의자가 되어 남으로 내려왔다.
미군정은 부족한 군과 경찰을 서북청년회로 대체했다. 서북청년회는 계급과 이름표 없이 활동했다. 미군정은 이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끓어오르는 적개심을 잘 이용했다. 이들은 토벌대가 되어 무자비한 탄압에 앞장섰다. 급여가 지급되지 않아 자급자족해야 했다. 약탈로 배를 채워야 했고, 자신들 요구에 협조하지 않으면 감금, 고문, 강간을 일삼았고, 방화와 살인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서북청년회는 미군정 비호 아래 온갖 범죄를 저질렀다.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회는 파업을 주동하거나 참여한 사람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4·3이 시작되기까지 2,500여 명이 검거됐다. 제주 민심은 다시 한번 들끓었다.
4·3 시작을 알리는 새벽 2시 봉화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중산간 오름마다 봉화가 타올랐다. ‘제주 4·3’이 시작되는 개시 신호였다. 300여 명의 남로당 당원으로 구성된 무장대는, 도내 24개 경찰지서 중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회와 각종 우익단체를 습격했다. 이 습격으로 경찰과 경찰 가족, 민간인 등 14명이 희생됐다. 이들의 행동은 3가지 주장이 있었다. 3·10 총파업으로 경찰과 서북청년회 탄압에 대한 저항, 곧 실시될 5·10 선거 반대와 통일 독립 쟁취, 미군정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저항이었다.
제주 도민이 느끼는 분노는 당연한 것이었다. 3·10 총파업으로 많은 도민이 연행되었고, 구금자 석방을 위해 시위하던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했다. 심지어 학생이 고문받다가 죽는 일도 벌어졌다. 경찰과 서북청년회 만행을 못 견뎌 주민은 한라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경찰과 서북청년회의 탄압으로 곪을 대로 곪은 제주 도민 분노는 결국 터졌다.
이런 탄압에 맞선 무장대는 ‘탄압이면 항쟁이다’라고 선언했다. 이들의 무장투쟁은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무는 격’이었다. 이번 일은 공산당이 일으킨 봉기라는 확실한 반공인식을 미군정에 심어줬다. 이 일로 미군정과 이승만은 제주 도민을 무참히 학살하는 빌미를 갖게 되었다. 새벽 2시에 타올랐던 봉화는 절대 타오르지 말았어야 했다.
조국 분단의 움직임
결국 이승만 정읍 발언이 현실화됐다. 일련의 과정을 볼 때 미국과 이승만 합작품이었다. 한편,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세력도 있었다.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독립운동가, 민족지도자들은 단독 선거를 반대했다. 선거가 치러질 경우 남과 북이 분단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48년 4월 19일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 김일성과 국내 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북한에서 열리는 ‘남북 연석회의’에 참석했다. 후속 조치로 단선(單選)·단정(單政) 반대 운동이 전개되었고 5.10 선거 불참을 선언했다. 하지만 5·10 선거를 막을 수는 없었다.
미군정은 이들의 행동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김구는 권력에서 멀어졌다. 미군정은 5·10선거를 차분히 준비하고 있었다. 이번 선거는 한국이 공산화가 되느냐 마느냐가 걸린 매우 중요한 선거였다. 선거는 순탄히 진행되는 듯했다.
반드시 이행돼야 했던 4·28 평화 협상
사태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미군정은 급기야 군을 진압에 투입했다. 군은 도민과 경찰, 서북청년회 문제이므로 자체적으로 해결되기를 바랐다. 제주 주둔 미군정 중대장의 지시를 받은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이 사태를 해결하려 나섰다. 김익렬 연대장은 무장대와 회담을 준비했다. 다행히 무장대도 이를 받아들여 협상 테이블에 마주하게 됐다.
1948년 4월 28일 대정면 구억국민학교(폐교)에서 평화 협상이 열렸다. 김익렬 연대장과 무장대 김달삼 사령관은 제주 도민을 위한 투쟁과 협상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무장대는 경찰과 서북청년회로부터 탄압받는 도민을 살리기 위해 일으킨 봉기였고, 토벌대는 군이 나서 주민들을 검거해야 하는 것을 막으려는 상황이었다. 오랜 시간 끝에 김익렬 연대장과 김달삼 사령관은 성공적으로 협상을 마치게 됐다. 두 대표자는 72시간 내 전투 중지, 무장 해제, 무장대 신변 보장이라는 큰 합의를 끌어냈다. 이 협상을 ‘4·28 평화 협상’이라고 한다.
4·28 평화 협상을 깨뜨린 오라리 방화사건
누군가 평화 협상을 방해했다. 5월 1일, 오라동 연미 마을에 누군지 알 수 없는 청년이 몰려와 집을 방화했다. 미군정은 무장대 소행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무장대 소행으로 보기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마을이 불타고 있는 동안 마을 위에는 미군 비행기가 돌며 영상을 촬영하고 있었다. 미군은 연미 마을이 불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알고 촬영했을까. 이 영상은 나중에 ‘제주도 메이데이(Cheju-Do May Day)’라는 선전용 기록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 사건을 ‘오라리 방화사건’이라고 한다.
오라리 방화사건은 경찰이 조작한 사건이었다. 경찰 묵인 아래, 우익청년단이 연미 마을에 불을 질렀다. 평화 협상을 파기할 목적으로 일으킨 방해 공작이었다. 오라리 방화 사건으로 불과 3일 전에 합의한 평화 협상이 깨졌다. 미군정은 이 일로 무장대에 대한 총공격을 명령했다.
남북 분단을 불러온 5·10 선거
1948년 5월 10일 치러지는 선거는 좌파, 중도파, 우파 가릴 것 없이 전국적으로 반대가 심했다. 제주는 특히 단선·단정을 반대하던 남로당 무장대의 반대가 심했다. 무장대는 선거를 방해하려고 주민을 한라산으로 올라가게끔 선동했다. 선거 방해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투표소를 습격해 불 지르고, 선거인명부를 약탈했다. 그뿐 아니라 선거위원이 피살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무장대는 남한 내 단독 선거를 여러 방법으로 저지했다.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5·10 선거가 치러졌다. 그 결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198명의 제헌 국회의원이 선출됐다. 전국 선거구 중 제주도는 북제주군 갑, 북제주군 을, 남제주군 3개 선거구가 있었다. 하지만 무장대 방해로 북제주군 갑, 북제주군 을 선거구에 선거를 치르지 못했다. 그래서 두 선거구를 제외한 198개 선거구에서 선거가 치러졌다.
5·10 선거에서 전국 투표율 중 제주도가 가장 낮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제주도 선거 결과를 본 미군정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급기야 6월 23일 재선거를 시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실패했다. 결국 5·10 선거 방해는 미군정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어 많은 제주 도민이 탄압받는 원인이 됐다.
민족을 둘로 가른 남북한 정부 구성
정부 수립을 위해서 필요한 헌법을 제정할 제헌 국회의원 198명이 선출됐다. 1948년 7월 17일 제헌 국회의원이 만든 헌법이 제정되어 공포됐다. 이날을 ‘제헌절’이라 부른다. 헌법에 따라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다. 초대 대통령은 국회의장이던 이승만이었다.
이를 본 북한도 정부를 수립했다.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북한 정부가 수립됐다. 김일성이 수상(首相)이 되어 북한 정부를 맡았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조국 분단이 시작됐다. 이후 남과 북의 냉전체제는 수십 년간 이어지고 있으며, 국민은 둘로 나눠진 조국을 보며 전쟁에 대한 두려움도 느꼈다.
대학살을 준비하는 이승만 대통령
제주 도민 탄압은 미국 원조와도 관련이 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출범 초기 미국에 군사적, 경제적으로 많은 원조가 절실했다. 하지만 미국은 제주 사태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이런 이유로 이승만 정부가 바라던 미국 원조는 더디게 이뤄졌다. 미국 원조를 위해서라도 제주 사태는 꼭 빠른 정리가 필요했다.
1948년 4월 8일, 주한미군을 12월까지 철수하기로 결정됐다. 이승만 정부 출범 후 국내·외 상황을 볼 때 미군 철수는 이승만 정부에 상당한 부담이었다. 이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 철수를 연기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확실한 답은 없었다.
미군 철수 기한이 다가오자 이승만 대통령은 마음이 바빴다. 미군 철수 후 남한 독자적인 능력으로 공산주의 벽을 넘을 수 있냐는 이승만 대통령에게도 큰 고민거리지만, 미국에도 큰 문제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동안 제주 사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래서 11월 가장 공포스러웠던 ‘초토화작전’이 전개됐다. 초토화작전 결과를 보고 미국은 미군 철수를 연기해 1949년 6월 29일 철수 완료했다.
여러 이유로 이승만 대통령은 정권 안정이 최우선 과제였다. 정권 안정을 위해 제주 4·3이 왜 일어났는지 규명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공산당 폭도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규정해 무자비하게 제주 도민을 탄압했다.
많은 희생자를 만든 초토화작전
1948년 10월 17일 경비사령부 송요찬 9연대장은 포고문을 발표했다. 제주 해안에서 5km 이상 지역에 통행금지를 명령하면서 이를 어길 시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총살하겠다는 섬뜩한 내용이 담긴 포고문이었다. 이 포고문 발표와 함께 중산간마을에 해안마을로 강제 이주하라는 소개령(疏開令)이 내려졌다.
포고문 발표 한 달이 지났을 무렵, 토벌대는 이른바 ‘초토화작전’이라고 불리는 끔찍한 작전을 전개했다. 이 작전은 11월 13일부터 이듬해 3월까지 중산간마을에 전개됐다. 소개령으로 중산간마을 주민이 해안마을로 내려갔다. 토벌대는 빈 마을을 모두 불태웠다. 일부 주민은 소개령을 거부해 마을에 남아 있거나 토벌대를 피해 한라산으로 올라갔다. 그 과정에서 토벌대에 발각되면 포고문에 따라 총살했다. 4·3 동안 발생한 희생자 대부분이 초토화작전 기간에 발생했다.
제주도민을 두 번 죽이는 예비검속법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정부는 ‘예비검속법’이라는 일제 악법을 동원해 다시 한번 제주 도민을 학살했다. 예비검속은 현재 범죄 사실이 없지만,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미리 체포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좌익세력이나 과거 좌익세력이었던 사람들을 말한다. 정부는 예비검속된 사람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했다.
제주는 한국전쟁 직접적인 영향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예비검속법으로 4·3과 관련된 많은 도민이 예비검속되었다. 예비검속된 도민은 정뜨르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 대정면 섯알오름 학살터, 서귀포 정방폭포에서 집단 학살당했다. 집단 학살당한 일부 희생자들은 아직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다.
무장대 해체와 4·3 종료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 지역’이 해제됐다. 9연대장 포고문 이후 6년 만이었다. 한라산 출입이 허용됐지만 4·3이 끝나지는 않았다. 1949년 6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되면서 대부분의 무장대도 붙잡히거나 교전 중 사살되었다. 사실상 궤멸 상태여서 세력이 많이 약해졌다. 1957년 4월 2일 마지막 남은 무장대원을 체포하면서 무장대는 9년 만에 완전히 사라졌다.
1947년 3월 1일 3·1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의 무장봉기를 거쳐,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해제될 때까지, 7년 7개월간 이어졌던 제주 4·3이 종료됐다.
제주 4·3 사건은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이 발생해, 진압과정에서 무고한 제주 도민 3만여 명이 희생된 사건이다. 즉, 무장대 350여 명을 잡으려 제주 도민 3만여 명을 학살시킨 사건이었다. 제주 4·3은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외 단일 사건으로 최대 희생자를 만들었다.
4·3 특별법과 정부 공식 사과
2000년 1월 12일, 김대중 정부에서 ‘4·3 특별법’이 제정·공포 됐다. 특별법은 4·3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킨다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4·3은 특별법에 따라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이뤄질 수 있었다. 그리고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지원과 보상 등 4·3사건 전반을 바로 잡을 수 있게 됐다. 4·3을 대하는 진정성 있는 첫 법률이었다.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도민과의 대화>에서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라고 했다. 장내에 있던 제주도민은 오랫동안 맺혀있던 한 맺힌 눈물을 흘리며, 대통령 사과에 대한 보답으로 박수와 함성을 지르며 그동안 쌓였던 응어리를 풀었다. 도민들은 그제야 맘이 풀리는 듯했다. 노무현 대통령 사과는 55년 만의 첫 사과였고, 정부 첫 공식 사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