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캄한 것이 너무 어두웠다. 어둠을 밝히는 불도 함부로 못 붙였다. 연기가 밖으로 나가기라도 하면 다 죽는다. 옆에 누가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대답으로만 어디에 누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홍태야, 어디 있어?”
“엄마, 나 여기 있어.”
“조심해, 바닥이 울퉁불퉁하니까 넘어질라.”
홍태 엄마는 홍태가 어디쯤 있는지 수시로 확인했다. 굴 안에서는 가족끼리 모여있으면 몰살될 수 있기 때문에 흩어져 있었다. 홍태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엄마는 모른다. 그저 목소리만 들리면 됐고, 밖으로만 안 나가면 됐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토벌대는 이들을 죽이러 굴 앞에 있는지 모른다.
“홍태 엄마.”
옆에 있던 이모뻘 아주머니가 부른다.
“네.”
“홍태 엄마는 나가면 뭐부터 할 거야?”
아주머니 질문은 홍태 엄마를 갑자기 기분 좋게 했다.
“나가면요? 음······, 나가면 할 일이 태산이죠. 빨래도 해야 하고, 물 길어와 방도 한번 닦아야죠. 아주머니는 뭐 하세요?”
홍태 엄마가 설레는 듯 보이지 않는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난 나가면 뽀얀 쌀밥 한 숟갈 크게 먹고, 시원한 동치미 국물 한 모금 마시고 싶어. 목이 얼어도 좋으니까 말이야.”
서로가 보이지 않는 둘은 그저 웃는다.
굴 안 모든 사람이 동감하고 있었다. 나가면 뭐도 해야 하고, 뭐도 해야 한다며 웅성웅성했다.
언제까지 있어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시간이 많이 흐른 것 같은데 며칠이 지났는지 모른다. 심지어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모른다.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저 잠이 오면 아무 때나 누워 자고, 눈이 떠지면 눈만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 다랑쉬굴에서 일어난 일을 소설로 구성 |
굳이 찾아가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곳. 다랑쉬오름만이 내려다보는 곳. 그 아래 차고 어두운 굴은 한때 희망을 품고 몸을 숨겼던 곳이다. 햇빛조차 쉽게 닿지 않는 곳에서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느꼈다. 힘들수록 서로 다독이며, 어둠 속에서 온갖 공격을 다 견뎌내며, 희망을 꿈꾸고 있었다. 주민은 떠났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밝은 햇살만 굴을 비추고 있다. 굴 입구에 앉아 있으면 그들 숨결이 느껴진다. 아, 다랑쉬여!
학살의 광풍에도 큰 피해가 없었던 다랑쉬 마을
제주 동쪽 구좌읍 세화리에 10여 가구, 40여 명이 모여 살던 ‘다랑쉬 마을’이 있었다. 오름의 여왕이라 불리는 다랑쉬 오름이 마을에 있어, 다랑쉬 마을이라 불렀다. 다랑쉬 마을은 중산간마을로써 주로 밭농사를 짓고 말을 키우며 살았다. 당시 마을에 울창했던 대나무 숲은 아직도 그대로 있다. 제주 대부분 중산간마을은 대나무를 이용해 채롱과 같은 생활용품을 만들어, 생계에 도움을 줬다. 다랑쉬 마을은 대나무숲이 울창한, 조용하고 아담한 마을이었다.
다랑쉬 마을도 중산간마을이기 때문에 소개령(疏開令)이 내려졌다. 이 무렵 다랑쉬 마을 주민도 다른 중산간마을 주민처럼 어쩔 수 없이 해안마을로 내려갔다. 다행히 다랑쉬 마을 주민은 어느 곳에서도 학살당하지 않았다. 초토화작전 중 소개령을 거부하거나 산으로 도피하는 주민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해안마을에 소개되어 갔어도 도피자 가족이 없었고, 마을 청년이 무장대에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다. 모두 토벌대 지시에 잘 따랐기 때문이었다. 소개령에 반발해 토벌대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마을 주민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토벌대는 마을 주민이 떠나자, 무장대가 마을을 점거하거나 숨어지낼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다. 주민 의견과 관계없이 집마다 모두 불을 질렀다. 다랑쉬 마을 주민은 4·3이 끝나고 복귀할 수 있었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다랑쉬 마을은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대부분 잃어버린 마을은 마을 설명이 적혀있는 비석이 있다. 비석마다 공통점은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다. 마을에 누가 불을 질렀는지, 누가 주민을 죽였는지 단 한마디도 적혀 있지 않다. 분명 마을은 없어졌는데 왜 없어졌는지 모른다. 무엇이 그렇게 겁이 났던 것일까? 그렇게 부끄러웠다면 그런 짓을 저지르지 말아야 했다. 초토화작전이 한참 전개될 무렵 중산간마을 방화는 모두 토벌대가 저질렀다. 뻔한 이야기며 사실인 이 내용은 약속이라도 한 듯, 모든 비석에서 빠져있다.
총칼보다 더 무섭게 학살한 토벌대
1948년 12월 18일 토벌대는 초토화작전 일환으로 다랑쉬오름 일대를 수색했다. 토벌대는 수색 중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 누가 풀밭에 배변 후 대충 처리하고 간 것이었다. 토벌대는 인근에 주민이 숨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4·3 당시 굴에서 은신 생활하는 주민은 연기 때문에 음식도 마음대로 못 했고, 냄새 때문에 배변을 마음대로 못 해 큰 문제였다.
토벌대가 수색 중 기어코 굴을 찾았다. 그리고 주민이 있는지 확인했다. 몇 명인지 모르지만, 주민이 있는 것이 확인됐다. 토벌대는 보이지 않는 주민을 향해 굴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주민은 토벌대가 부르는 소리를 무시했다. 나가면 죽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숨어있던 주민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토벌대도 한계를 느끼자, 보이지 않는 굴 안을 향해 마구잡이로 총을 쐈다.
토벌대는 총을 쏴도 주민이 나오지 않자, 다른 궁리를 했다. 생각해 낸 것은 수류탄을 굴 안으로 던지는 것이었다. 수류탄이 터지자 굉음은 굴 전체에 울렸다. 하지만 굴이 깊어 살상력은 없었다. 굴이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있는 구조가 아니기에 총을 쏴도, 수류탄을 던져도 깊게 잘 숨어 있으면 괜찮았다. 온갖 위협에도 주민은 꼼짝하지 않고 굴 안에 숨어 있었다. 어쩌면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는지 모른다. 다행히 피해는 없었지만, 토벌대가 한 짓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토벌대는 궁리 끝에 다른 방법을 찾았다. 토벌대는 굴 인근 마른풀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굴 입구에서 불을 붙였다. 마른풀들은 불이 붙어 연기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연기는 서서히 굴 입구를 통해 주민을 찾으러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 죽었는지도 모른 채 숨어있던 주민은 모두 연기에 질식해 고통스럽게 죽었다.
희생된 주민은 다랑쉬 마을 주민이 아니었다. 그들은 구좌읍 종달리와 하도리 주민 11명이었다. 놀랍게도 희생자 중 9세 소년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엄마를 따라갔을 9세 소년의 희생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희생자 11명 유족은 집에 돌아오지 않는 가족 행방을 알 수 없었다. 4·3 당시 어느 날 갑자기 가족 중 한 명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토벌대에 끌려가서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신이라도 수습하려고 온 마을을 찾아다녔다. 당시 토벌대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을 일삼았다. 다랑쉬굴 안에서 죽은 11명 가족도 행방을 알 수 없는 가족이 토벌대에 끌려가 죽었겠거니 생각했다. 더군다나 종달리, 하도리 주민이 다랑쉬굴이 있는 세화리까지 와서 죽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점점 드러나는 진실
희생자 11명 외에 한때 다른 주민 한 명도 굴 안에서 같이 생활했다. 이 주민은 사건이 있던 며칠 전부터 우연히 굴에서 나와 다른 곳에서 생활했다. 그러던 어느 날 토벌대가 다랑쉬오름을 수색하는 것을 보고 몸을 숨겼다.
숨어 있던 주민은 다랑쉬굴 쪽에서 나는 총소리와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한때 같이 생활했던 주민이 생각나, 하루 지나 조심히 굴을 찾았다. 굴 입구는 큰 돌로 막혀 있었다. 주민은 돌을 겨우 걷어내고 굴 안으로 조심히 들어갔다. 굴 안으로 들어갔을 때 아직 연기가 가득해 숨쉬기가 힘들었다. 어제 있었던 상황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끔찍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얼마 들어가지 않아 시신들을 찾았다.
시신들은 고통을 참지 못하는 듯, 돌 틈이나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쓰러져 있었다. 숨쉬기가 괴로운 듯 벽을 마구 긁어 손톱이 닳기도 했다. 한 시신은 코와 귀에 피를 흘린 채 죽어있었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이곳이 바로 지옥이었다. 그는 굴 안 상황이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할 일을 했다. 흩어져 있는 시신을 한곳으로 모았다. 가족은 가족대로 한군데에 모아 눕혔고, 번호와 이름을 종이에 적었다. 그리고 굴안 모든 것을 기록해 따로 보관하고 있었다. 그는 세월이 흐르기만 기다렸다. 언젠가 좋은 세상이 오면 명단과 상황을 모두 알릴 계획이었다.
세월이 한참 지나 지역 언론사 기자가 4·3을 취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희생자 명단을 가지고 있던 주민을 만났다. 기자는 주민에게 자신이 예전에 잠시 굴에서 생활했다고 들었다. 그 말을 듣던 기자는 ‘드디어 세상에 공개되겠구나’라고 직감했다. 현장에 도착해 보니 막막했다. 40여 년이 지나 굴 인근은 온갖 수풀이 우거져 입구를 덮어버렸다. 정확한 위치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노력 끝에 입구를 찾게 됐다. 수십 년 동안 숨겨두었던 대외비가 봉인 해제되는 순간이 왔다고 느꼈다.
드디어 봉인 해제 된 44년 전 학살 증거
1992년 4월 1일 제주에 엄청난 충격을 주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소식은 제주뿐만 아니라 육지에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4·3으로 가족을 잃은 유족도 충격이지만, 4·3을 알고 있던 국민도 큰 충격을 받았다. 소식은 그동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4·3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구좌읍 세화리 ‘다랑쉬굴’에서 공권력에 의한 학살임을 증명하는 유골이 발굴됐다. 가지런히 누워있는 유골 옆으로 생전 그들이 사용했던 무쇠솥, 놋그릇, 놋수저, 가위, 요강과 같은 생활 도구와 톱, 호미와 같은 농기구가 함께 발견됐다. 굴에서 발견된 물품들은 굴 안 주민이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잘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더 충격을 준 물품도 발견됐다. 굴 안에 유골과 함께 탄피가 발견됐다. 탄피는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토벌대가 굴에 와서 주민을 학살했다는 증거라는 것을 보여줬다. 많은 유족이 이야기했던 군인에 의한 학살은 그동안 증거도 없고 기록도 없어 인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발견된 탄피는 이를 반박하는 너무 명확한 증거였다.
사실 다랑쉬굴이 세상에 알려지기 넉 달 전 먼저 발굴됐다. 1991년 12월 22일 ‘제주 4·3 연구소’가 발굴한 굴은 발견 당시 바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1991년은 노태우 정권 절반이 지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 시절은 지금처럼 과거사에 대한 정부 차원의 조사, 사과와 보상은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군사정권이 여전하던 1991년은 4·3 당시보다는 시대가 많이 변했어도,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4·3을 알리려는 사명감을 느끼고 있던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증거를 발견했지만 공개하지 않고, 더 완벽한 증거를 확보할 때까지 기다렸다. 넉 달간 의사, 법률가, 연구사, 언론이 참가한 가운데 합동 조사 후 결과를 이듬해 1992년 4월 1일 발표했다.
빠른 뒤처리를 원했던 정부
1992년 5월 15일 아침 7시, 희생자 유골은 44년 만에 굴 밖으로 나왔다. 9세 소년의 작은 유골도 엄마를 따라 나왔다. 아이는 중년이 되었을 나이에 앙상한 유골이 되어 세상으로 나왔다. 공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되어 44년 만에 굴 밖으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유골이 굴 밖으로 나오자 유족은 통곡하기 시작했다. 이 근처를 수천 번 드나들어도 가족이 여기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유족은 늦었지만 잘 수습해 장지에 묻어주려고 했다. 그리고 어떻게 죽었는지 진상조사를 원했다.
유족은 유골을 모아 굴 앞에서 간단한 장례식을 치렀다. 장례식이 끝나자 문제가 생겼다. 현장에 함께 있던 정부 관계자는 유골을 매장이 아닌 화장을 해야 한다며, 화장장으로 옮기라고 했다. 유족은 깜짝 놀랐다. 가족 중 누가 죽으면 3일이던, 5일이던 장례를 치르고 보내드리는 것이 도리다. 하물며, 44년 만에 밖으로 나왔는데 집으로 모셔 제대로 된 장례식을 치르지도 못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유족은 완강히 나오는 정부 관계자 말에 어쩔 수 없이 화장장으로 갔다.
화장을 마친 유골은 한 줌 재가 되었다. 유족은 화장한 뼛가루 일부를 가져가길 원해 관계자들에게 애원했다. 양지바른 곳에 잘 묻어 제사라도 올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정부는 유족의 마지막 부탁마저도 뿌리쳤다. 그것을 지켜보던 어느 신부님이 뼛가루를 모두 자신의 성당묘지에 안장하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마찬가지로 거절이었다. 44년 만에 수습된 유골은 단 45일 만에 구좌읍 김녕 앞바다에 뿌려졌다.
정부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 무엇이 그렇게 바빴을까? 빨리 유골을 처리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었던 것이었을까? 44년 만에 나왔는데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그들은 죽어서도 대우 못 받는 것일까? 오랜 세월 기다렸던 유족을 위해서라도 한곳에 모시면 안 되었던 것일까? 정부의 태도에 많은 질문이 던져진다.
당시 시대적 분위기는 대학생들이 학생운동을 활발하게 하던 시절이었다. 군부정권이 막바지에 달하고 5공화국 청문회를 마치는 등 과거사에 대해 바로 잡으려는 정치권 움직임도 있었다. 이런 시국에 공권력에 의해 희생된 희생자 유골 발견은 정부로써 상당한 부담이었을 것이다.
유골 발굴이 부담으로 느꼈다면 사과하면 될 일이었다. 다랑쉬굴처럼 지난 정부의 과오가 어떤 증거로 증명되면, 당연히 유족과 국민에게 사과함이 마땅하다. 당시 정부가 저지른 일이 아니므로 지난 정부를 대신해서 사과하면 될 문제였다. 이런 용기마저 없는 정부에서 견뎌냈던 유족의 모진 세월은 누가 위로해 줄 것인가?
유골이 세상으로 나오고 다랑쉬굴은 급하게 통제됐다. 희생자들이 사용했던 생활 도구는 모두 굴 안에 넣어둔 채, 입구를 시멘트를 발라 막았다. 보존이라는 명분으로 은폐를 한 셈이었다. 지금은 큰 바윗돌을 굴 입구에 꽂은 듯 막아 놓았다.
작가 생각
다랑쉬굴은 여행하기 전 검색 과정에서 먼저 알게 됐다. 처음 검색 결과를 보았을 때 매우 충격적이었다. 개인적으로 폐쇄를 무서워해 그들이 굴속에서 느꼈던 공포와 고통이 나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숨쉬기가 힘들어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나는 스스로 숨 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공황장애를 겪어봐서 잘 안다. 과호흡으로 고생해 보니 아무 장치 없이 스스로 숨 쉬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런 나여서인지 굴 안에서 숨진 그들을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내가 그 안에 있었더라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해 봤다. 답을 내리기 쉽지 않았다.
나는 평소 다랑쉬라고 하면 자꾸 ‘다람쥐’가 떠올랐다. 다람쥐도 귀엽지만, 다랑쉬라는 이름이 너무 예뻐서 이 이름을 너무 좋아했다. 하지만 이름과 달리 이렇게 잔인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4·3 유적지 중 가장 마음이 아프고, 끌리는 곳이 어디냐 물으면 단연코 다랑쉬굴이라고 말한다. 다랑쉬굴 입구에 꽂혀 있는 바윗돌을 빼내면 그 안에 아직 그들이 쓰던 생활 도구가 있다. 그래서 굴 입구는 1948년과 2025(2026)년을 잇는 타임머신 입구다.
첫날 4·3 유적지를 둘러본 느낌은 대체적으로 ‘분노’, ‘슬픔’, ‘잔혹’으로 정리됐다. 왜 이렇게 잔인했어야 했는지, 꼭 이렇게까지 했어야 했는지 묻고 싶다. 오늘따라 날씨가 흐려서 그런지, 내 마음이 무거워서 그런지 하늘이 더 어두운 것 같다. 해도 지려고 하고 오늘 유적지 여행은 여기서 마무리해야겠다. 지금은, 빨리 숙소가서 짐 풀고, 씻고 충전하고 싶은 마음 뿐이다.
[ 다랑쉬굴 유적지 정보 ]
주소 l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2608-3
문의 l 제주특별자치도청 4·3 지원과 064-710-8452
기타 l 주차장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