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에 문이 열렸다. 그리고 경찰 4명이 들어와 고함을 지른다.
“빨리 일어나 새끼들아!”
그리고 곤봉으로 창고 철문을 강하게 내려쳤다. 경찰은 구금자에게 공포감을 주고 잠에서 깨우려고 했다.
“일어났으면 밖으로 나가!”
밖을 보니 트럭들이 매연을 뿜으며 화물칸을 창고 쪽으로 바짝 붙여 기다리고 있엇다. 얼핏 봐도 열대는 되어 보인다.
창고 밖으로 나가는 입구가 사람들로 붐빈다. 경찰이 나가기 전 새끼줄로 앞사람 허리에 손을 묶고 있었다. 두 팔이 묶인 사람만 나가서 트럭으로 올랐다.
트럭에 오른 사람들 모두 방금 잠에서 깨어 어리둥절했다. 모두 깜깜한 밖을 뭐라도 찾는 듯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트럭에 오른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지 궁금했다.
“이봐, 양 씨. 이게 무슨 일이래, 이 새벽에 어디로 가는 거야.”
평소 양 씨와 옆에 누워 자던 고 씨 아저씨가 묻는다.
“······”
양 씨는 대답이 없다. 이 순간이 오늘 마지막 공기라는 것을 아는듯했다.
“아이고, 참 나. 자다가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고 씨는 두려운 듯 한참 동안 혼잣말로 이야기했다.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가는 내내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봉사가 된 것 같았다.
한림에서 출발한 트럭은 한참을 달려 어딘가 도착한 듯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여러 트럭이 한꺼번에 섰다. 트럭이 서면서 일으키는 먼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라이트에 비친 먼지는 마치 안개 같았다.
사람들이 트럭에서 내려 경찰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뭐야 이거, 왜 산으로 올라가지. 이봐 양 씨! 왜 산으로 올라가! 양 씨!”
갑자기 다급해진 고 씨는 그제야 뭔가를 느꼈는지 양 씨만 애타게 불렀다. 사실 양 씨는 알고 있었다. 새벽 이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미리 알고 있었다.
일주일 전 아내가 창고로 면회 왔을 때였다. 아내는 양 씨 손을 꼭 잡고 미리 이야기해 줬다. 옆 마을에 창고가 텅 비었는데, 알고 보니 새벽에 사람들을 트럭에 다 태우고 나갔다고 했다. 그러면서 새벽에 깨우거든 죽은 척하고, 일어나지 말라고 신신당부까지 했었다. 창고가 텅 빈 것은 안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이러 갔던 것이다.
그래서 양 씨는 창고에서 나가는 순간 직감하고 말이 없었다. 양 씨는 아내와 아이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양 씨는 낙담한 듯 아무 생각 없었다. 죽으러 가는 것을 알았음에도 겁먹지 않았다.
| 섯알오름 학살터에서 일어난 일을 소설로 구성 |
처음 마주치는 추모비가 나를 엄숙하게 한다. 마음을 가다듬고 안으로 들어서면 양쪽 푸른 언덕이 나를 압도한다. 넓은 공간에 혼자 서있으니, 그날 그들처럼 외롭고 무섭다. 그들이 수장되었던 웅덩이는 그대로 있어, 그날 있었던 학살의 공포가 느껴진다. 외롭고, 무섭고, 처절했던 순간순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죽음 앞에 무기력했던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이 고통이 빨리 끝나기만 바랄 뿐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중심이 되었던 대정
일제는 오사카와 제주를 잇는 항로를 모슬포항에 처음 개설했다. 모슬포항을 중심으로 대정이 발전되자, 대정은 지리적으로 일본군에 아주 중요한 곳이 됐다. 그래서 대정은 비행장과 탄약고 등 제주도민을 강제로 동원해 지은 군사시설들이 많다. 일제는 중일전쟁 당시 중국을 폭격하고, 태평양 전쟁 당시 본국을 방어하기 위해 제주를 전초기지로 삼았다.
일제는 해안 동굴, 고사포 진지, 격납고, 비행장, 탄약고 등과 같은 군사시설을 도내 곳곳에 건설했다. 그중 섯알오름 인근은 일본군 탄약고와 비행장이 있었다. 섯알오름 탄약고는 도내 최대 규모를 가진 탄약고였다.
일제가 제주도민을 강제 동원해 건설한 비행장은 네 곳이었다. 제주읍(현 제주시) 정뜨르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 조천읍 진뜨르비행장과 교래리 비밀비행장, 대정읍 알뜨르비행장이다. 정뜨르비행장은 제주 관문인 제주국제공항이다. 진뜨르비행장은 조천읍 진뜨르교차로에서 신촌진뜨르교차로 방향으로 뻗은 도로이며, 공사 2개월 만에 중단된 비행장이었다. 교래리 비밀 비행장은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알 수 없다. 그리고 알뜨르비행장은 서남쪽으로 진출하기 좋게 대정읍에 건설했다.
비행장 건설과 격납고 건설 등 각종 군사시설 건설에 많은 제주도민이 강제 동원됐다. 탄약고는 해방 후 미군정에서 폭파했다. 하지만 알뜨르비행장과 격납고 등 일제 군사 시설은 지금도 원형 그대로 남아 있어, 많은 역사적 교훈이 되고 있다.
전국을 학살터로 만든 예비검속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일제가 펼친 민족말살정책 중 하나인 ‘예비검속(豫備檢束)법’을 시행했다. 이는 일제강점기 ‘조선 정치범 예비구금령’을 그대로 옮겨 시행한 법이었다. 예비검속법을 쉽게 말하면 어느 특정인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어도, 범죄를 저지를 것 같아 미리 검거해 범죄를 예방하는 법이다. 절차에 따른 영장이 없으며, 검거에 필요한 확실한 증거나 근거도 없었다. 단지 공권력의 예측만 있었을 뿐이고, 자의적으로 판단해 검거하면 그것이 곧 합법이었다. 심지어 예비검속법은 일제강점기 때 시행하다 해방 후 미군정이 폐지할 만큼 악법 중 악법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정부는 치안국장의 명의로 ‘전국 요시찰인(要視察人)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 공문을 각 경찰국에 하달했다. 전국에 있는 요시찰인 전원을 구금하고 전국 형무소 경비를 강화하라는 지시였다. 당시 요시찰 대상은 보도연맹 원과 과거 좌익 인사, 반정부 활동을 한 사람들이었다. 제주는 4·3으로 조사를 받거나 형은 받은 사람까지 포함됐다. 예비검속 공문은 첫 공문하달 후 7월 11일 ‘불순분자 검거의 건’ 공문까지 총 세 차례 더 제주 경찰국장에게 하달됐다.
보도연맹은 좌익이거나 한때 좌익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전향시켜 정부가 보호하고 인도하는 단체였다.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이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면 모두 학살 대상이었다. 그와 관계없이 지역 할당제로 좌익과 관련 없는 사람들이 가입하기도 했었다. 고무신, 보리쌀 등 배급을 준다며 가입을 독려해 가입한 사람도 많았다.
보도연맹 명단에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면 어김없이 검거되어 전국 형무소로 구금됐다. 정부는 전쟁 상황이 점점 불리해지자 수도를, 대전을 거쳐 대구에서 부산까지 옮겼다. 후퇴하는 과정에서 한강 이남 지역 예비검속자를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 탄광 등에서 모두 학살했다. 이 역시 재판 절차 없는 즉결 처형식 집단 학살이었다. 대표적으로 대전 골령골 학살 사건,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 사건 등이 있다.
제주도 육지와 마찬가지로 보도연맹이 조직되어 경찰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다. 1949년 11월 기준으로 제주 보도연맹 회원 수는 5,283명이다. 제주 보도연맹 회원 5,283명 중 대부분이 전향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유는 4·3이 시작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기까지, 2년여 동안 많은 도민이 죽었다. 토벌대에 조금이라도 의심받거나, 무장대에 합류했던 주민 대부분은 이미 죽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향자를 찾기란 어렵다. 제주 보도연맹에 가입된 주민은 진영과 관계없이 배급받기 위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제주는 남로당에 가입했거나 가족이 남로당에 가입했어도 여지없이 예비검속됐다. 그리고 무장대로 활동했거나 무장대에 협조했거나, 무장대를 가족으로 두면 마찬가지로 예비검속됐다. 그뿐 아니라 과거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했거나 1947년 3월 1일에 있었던 3·1절 발포사건, 3·10 총파업에 관련된 사람 또한 예비검속됐다. 제주는 공무원, 교사, 농민, 교육자, 마을 유지, 우익 단체장, 학생, 부녀자 등 다방면에 걸쳐 예비검속됐다.
그뿐만 아니었다. 평소 경찰과 군에 비협조적이었거나, 그들 계획에 반대를 일삼아 군경의 눈 밖에 난 주민도 포함됐다. 같은 마을 주민끼리 서로 감정이 상해 원한을 가지고 있으면, 밀고로 인해 좌익과 전혀 관련 없는 주민이 희생되기도 했다. 예비검속된 주민은 구금 생활 며칠이 지나면 해병대 사령관 명령으로 서귀포 앞바다, 제주항 앞바다, 제주읍 정뜨르비행장, 송학산 섯알오름 학살터 등 제주 곳곳에서 수장되거나 총살됐다.
제주는 제주 경찰서, 서귀포 경찰서, 모슬포 경찰서, 성산포 경찰서가 주민을 예비검속했다. 1950년 8월 6일까지 도내 네 곳의 경찰서에 구금된 예비검속자 수는 820명이고, 17일까지는 1,120명이었다. 그중 확인된 희생자수는 560여 명이다. 나머지 예비검속자는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유는 시신이 수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예비검속자들은 제주항 앞바다, 서귀포 앞바다, 수장되어 있거나 정뜨르비행장에 묻혀있어, 시신을 찾을 수 없다.
한국의 쉰들러, 성산포 의인(義人) 문형순 성산포 경찰서장
예비검속자들은 A, B, C, D 네 등급으로 분류됐다. 등급 중 D급은 가장 중요한 자, C급은 중요한 자, B급은 경한 자, A급은 애매한 자로 분류됐다. 다시 말하면 D급은 금방이라도 적에게 협조할 것 같은 가장 위험한 자, C급은 그것보다는 위험도가 조금 낮은 자, B급은 적에게 협조하거나 이로운 행동을 할 여지가 비교적 적은 자, A급은 전혀 그렇지 않거나 애매한 자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D급, C급은 즉결 처형이었고 B급, A급은 훈방될 수 있는 등급이었다.
당시 즉결 처형에 해당하는 명부는 처형 일시와 처형 장소, 처형 방법과 비고가 자세히 적혀있었다. 처형 방법은 ‘군에서 총살’ 비고는 ‘예비검속’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이렇듯이 당시 예비검속에 대한 즉결 처형은 주로 제주지구 계엄사령부인 해병대가 맡았다. 마을마다 있던 예비검속 대상자들을 경찰이 검거해 해병대로 넘기면, 해병대가 이들을 총살했다. 때로는 반대로 해병대에서 경찰로 이관해 즉결 처형을 하기도 했다.
4·3 당시 제주는 제주경찰서, 서귀포 경찰서, 모슬포 경찰서, 성산포 경찰서와 같이 네 군데에 경찰서가 있었다. 제주 동서남북 치안을 책임지는 역할을 했다. 경찰서는 주로 배가 드나드는 큰 포구를 중심으로 있었다. 큰 포구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됐고, 마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4·3 당시 경찰서는 본연의 임무인 치안보다 주민을 구금하고 고문하는 장소로 쓰였다. 하지만 모든 경찰이 그렇지는 않았다. 성산포 경찰서는 의인 같은 경찰도 있었다.
제주 동쪽 끝, 성산읍도 예비검속 열풍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성산포 경찰서도 D급 4명, C급 76명의 예비검속자가 곧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성산포 경찰서 문형순 서장은 6명만 해병대로 넘겼다.
해병대로 넘겨진 6명을 제외한 나머지 예비검속자는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문형순 서장의 용기 있는 행동 덕분이었다. 1950년 8월 30일 해병대는 성산포 경찰서에 ‘예비검속자 총살 집행 의뢰의 건’이라는 공문을 내려보낸 후 기한 내 집행 결과를 보고하라고 했다. 문형순 서장은 ‘부당함으로 미이행’이라는 짧은 의견을 적어 보고했다. 사실상 해병대 명령을 거부했다. 성산포 경찰서에 구금된 예비검속자는 문형순 서장의 지시 거부로 인해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일로 문형순 서장은 한국의 쉰들러이자, 성산포 의인(義人)으로 불렸다.
문형순 서장은 평안도 출생으로, 해방 전 독립운동가였다. 만주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한국광복군으로 활동하다 해방 후 1947년 경찰에 투신했다. 제주경찰서 기동대장으로 임용되어 1949년 10월까지 모슬포 경찰서장으로 복무한 그는 1950년 12월까지 성산포 경찰서장으로 근무했다. 1953년 경찰을 퇴직한 그는 쌀 배급소와 제주시 극장에서 일을 하며, 남은 인생을 보내다 1966년 사망했다.
문형순 서장은 제주시 오등동 평안도민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2024년 5월 10일 공로를 인정받아 제주시 노형동 국립 제주호국원으로 이장했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민족애를 바탕으로 근무했던 인권 경찰로서 인정받아 그나마 다행이다. 그는 이렇게 최고 예우를 받으며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곳에 영면했다.
문형순 서장은 누구보다 민족애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같은 민족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것은 큰 죄악으로 삼으며 지냈다. 2018년 경찰청은 문형순 서장을 ‘올해의 경찰 영웅’으로 선정했다. 경찰청 내에서는 두 번째이며,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시민을 향한 발포 지시를 거부한 전남경찰청 안병하 청장 다음이었다.
섯알오름의 첫 번째 총성
모슬포 경찰서는 대정면과 안덕면 그리고 한림면을 관할했다. 모슬포 경찰서에 예비검속된 주민은 344여 명이었다. 그들은 모슬포 절간 고구마창고와 한림 어업창고, 무릉 지서 창고 등에 분산 구금 후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학살됐다. 예비검속자 D급, C급 252여 명이었다. 구금된 예비검속자 수는 ‘섯알오름 희생자 명단 비석’에 235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중 1950년 7월 16일 1차 학살이 자행됐다. 학살은 섯알오름 탄약고 터와 제주읍 정뜨르비행장 두 곳에서 자행됐다. 끌려온 예비검속자 41명 중 20명이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해병대에 의해 학살됐다. 나머지 21명은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시신을 찾지 못한 희생자들은 서귀포 앞바다, 모슬포 앞바다에 수장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학살 가해자는 분명 어디서 학살했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서로 굳게 입을 다물었다. 유족은 가족 행방을 알지 못한 채 망연자실하며 긴 세월을 보냈다. 이 학살로 섯알오름 탄약고 터는 ‘섯알오름 학살터’가 됐다.
정부는 2007년 8월부터 12월까지 ‘1차 제주국제공항 4·3 희생자 유해 발굴’을 시작했다. 하지만 발굴 조사는 공항 전체가 아닌 일부 지역이었다. 이유는 제주국제공항이 현재 운영 중이므로 공항 전체를 파헤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발굴 조사 범위는 남북 활주로 서북 측으로 정해졌다. 제한된 범위였지만 성과도 있었다.
발굴 조사 결과 128구의 유골이 발굴됐고, 그중 43구의 신원이 확인됐다. 신원이 확인된 43구의 유골 중 13구가 섯알오름 학살터에서 학살된 희생자였다. 신원 확인된 13구 유골 발굴은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유족에게 기대감을 안겨줬다. 이와 같은 사례로 볼 때 학살 당시 찾지 못한 21구 시신은 제주국제공항 어딘가에 묻혀있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정말 이착륙 비행기를 모두 멈춘 채 제주국제공항 전체를 파헤치면 더 많은 유골을 발굴할지 모른다.
1차 학살에 궁금한 점이 있다. 해병대는 예비검속자들을 굳이 왜 섯알오름 학살터와 정뜨르비행장 두 군데로 나눠 학살했는지 궁금하다.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게 하려고 여기저기서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학살 시 다른 문제라도 있었던 것일까? 시신 수습이 되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1차 학살은 2차, 3차 학살에 비해 정확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어디서 끌려왔으며, 왜 정뜨르비행장까지 갔는지 모른다.
새벽 2시에 울린 두 번째 총성
2차 학살은 1차 학살 한 달 뒤쯤 8월 20일(음 7월 7일) 새벽 2시에 자행됐다. 이 날은 모슬포 경찰서 관할 구금 시설 중 한림 어업창고와 무릉 지서 창고에 구금되어 있던 62명의 예비검속자들이 학살됐다.
예비검속자들은 평소 구금 중에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와중에 눈치껏 빨리 움직인 주민은 목숨을 살리기도 했다. 예비검속자 중 일부는 경찰에게 일정 금액을 상납해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우게 하고,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석방된 자들로 인해 생긴 명단 빈자리는 애꿎은 주민 누군가가 대신 채워 죽어야 했다.
한림 어업창고에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 경제력이 있거나 가족이 겨우 돈을 만든 일부 예비검속자는 그 돈으로 경찰을 매수했다. 돈을 받은 경찰은 명단에서 이름을 지워주고 석방해 줬다.
8월 20일 예비검속자 총살 집행 명령이 떨어졌다. 돈을 받고 예비검속자를 석방했으니 당연히 명단과 예비검속자 수가 차이가 났다. 한림 어업창고 예비검속자를 태운 트럭은 섯알오름 학살터로 일단 출발했다. 트럭은 가는 길에 다른 구금 시설인 대정읍 무릉 지서 창고에 들렀다. 무릉 지서 창고 방문 목적은 명단 빈칸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트럭에 오른 예비검속자는 억울하게도 돈이 없어 목숨을 잃게 됐다.
한림에서 출발한 트럭은 새벽 2시에 섯알오름 학살터에 도착했다. 무릉 지서 창고에서 일부 예비검속자를 태워 도착하자 해병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예비검속자들은 트럭에서 내려 해병대 지시로 탄약고 터 우측 능선으로 올랐다. 62명의 예비검속자들은 총성과 함께 힘없이 능선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동트기 전 울린 세 번째 총성
3차 학살은 2차 학살과 같은 날 새벽 5시에 일어났다. 경찰은 모슬포 절간 고구마창고에 구금된 예비검속자들에게, 창고가 협소하니 조금 더 넓은 곳으로 이동한다고 했다. 경찰은 이들에게 개인이 가지고 있던 물품도 모두 들고나오라고 했다. 그들은 몇 안 되는 물품을 끼고 창고를 나섰다. 그렇게 그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트럭에 몸을 실었다.
예비검속자들은 어느 순간 놀랍게도 본인이 죽으러 가는 것을 직감했다. 그들은 당장, 이 상황을 모면할 수는 없지만, 죽어서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리려는 큰 생각을 했다. 이들은 대정읍 상모리 ‘신사 동산’을 지나던 무렵부터 신고 있던 고무신과 옷 등, 수용소에서 들고 나왔던 물품을 도로 위로 하나씩 던지기 시작했다. 내가 이곳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죽은 후 가족에게 알리기 위한 표시였다. 죽음을 직면한 상황에서도 가족에게 알리려고 했던 생각과 행동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느껴진다.
섯알오름 학살터에 도착하니 막 해가 뜨려고 했다. 도착한 예비검속자들은 해병대 지시대로 움직였다. 이번 예비검속자들은 2시에 도착한 예비검속자들과 달리 좌측 능선으로 올라갔다. 능선에 올라서니 아래 큰 웅덩이에 탄약고가 폭파되어, 여러 잔해물이 날카롭게 흩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곧 해병대 모슬포부대에서 총살 집행에 차출된 대원들이 도착하자, 먼저와 기다리던 소대장이 총알을 나눠줬다. 총성이 울리자 예비검속자 149명은 맥없이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8월 20일 하루 동안 몇 시간에 걸쳐 211명이 학살됐다.
학살이 자행되고 한 유족이 학살터에 도착했다. 유족은 절간 고구마창고에 구금되어 있던 구금자를 트럭에 태워 송학산으로 이동시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유족은 동생이 창고에 구금되어 있어 미숫가루를 전해주려 송학산으로 갔다. 신사동산에 이르렀을 때 도로 위에 고무신들이 떨어져 있는 것을 봤다. 떨어진 고무신들을 하나씩 따라가 보니 섯알오름 학살터였다. 유족이 도착했을 때는 아쉽게도 학살 후였다.
동생을 잃은 유족의 마음은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다시 한번 분노했다. 희생자들이 창고에서 나올 때 들고나온 물품이 불에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담요, 베개, 옷, 허리띠, 쌀, 부식, 주전자 등 그들이 평소 쓰던 물품이 모두 군경에 의해 타고 있었다. 유품을 유족에게 돌려줘야 마땅하나, 학살 증거를 인멸하는 중이었다. 이곳을 ‘증거인멸의 장소’라고 한다.
2차 학살과 3차 학살이 시간 차이가 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한림 어업창고에서 출발한 트럭은 계획대로 섯알오름 학살터로 오고 있었다. 하지만 절간 고구마창고에서 출발한 트럭은 이동 중 고장이 났다. 고장 난 트럭을 수리해서 도착하니 5시였다. 트럭을 수리하는 몇 시간은 예비검속자들에게는 조금이라도 더 삶을 연장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들은 곧 다가올 운명에 대한 공포감은 널브러져 있는 시신을 봄으로써 더 극대화됐다.
시신 수습을 방해하는 경찰
모슬포 경찰서 예비검속자들 총살 집행은 이것으로 끝났다. 이제는 유족 시간이다. 유족은 마음이 급해졌다. 유족은 시신이 훼손되기 전 빨리 수습해서 안장해야 한다. 하지만 유족 생각과 달리 시신 수습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경찰이 막아서 시신 확인도 못 하게 하고, 수습도 못하게 했다. 희생자는 죽어서도 가족 품에 안기지 못했다.
2차 학살이 있던 날 학살을 목격한 주민이 있었다. 섯알오름 인근에서 소를 키우던 주민이었다. 주민은 새벽에 예비검속자들을 가득 태운 트럭 2대가 탄약고 터로 가는 것을 봤다. 트럭 뒤로 완전무장한 군인들을 가득 태운 트럭 한 대가 뒤따랐다. 트럭이 도착하고 15분쯤 지나 탄약고 터 쪽에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총성은 한동안 계속 났다. 주민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숨어서 지켜봤다. 그는 바다로 나가던 마을 청년 두 명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청년은 유족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 소식을 들은 유족 300여 명은 통곡하며 학살터를 찾았다.
유족은 빨리 움직였다. 서둘러 수습한 끝에 27구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치더니 유족이 시신 수습하는 것을 보고, 공포탄을 쏘며 멈추게 했다. 경찰 저지로 유족은 더 이상 수습하지 못했다. 경찰은 수습한 27구의 시신을 원위치에 돌려놓으라고 지시했다. 유족은 미칠 노릇이었다. 왜 시신을 수습할 수 없게 하는지 이유를 몰랐다.
유족은 경찰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수습한 시신들을 구덩이 안에 다시 넣고 모두 해산했다. 억울하게 죽은 것도 원통한데 시신마저 못 가져가는 유족 마음은 누구도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시신 수습에 실패하고 그로부터 약 6년 동안 학살 현장에는 군경에 의해 통제되어 민간인 출입이 금지됐다.
1956년 3월 30일 2차 희생자 유족이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 몰래 모였다. 그들은 칠성판이며 광목, 가마니 등 시신 수습에 필요한 여러 가지를 챙겨 새벽 2시쯤 도착했다. 그들은 약 6년 전 시신을 수습하다 경찰에 발각되어, 다시 집어넣었던 날을 떠올렸다. 오늘은 기필코 시신을 수습해 갈 것이라는 다짐을 했다. 이들은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시신들은 보철 치아, 나일론 옷, 허리띠, 소지품 등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학살터는 일본군 탄약고를 미군이 폭파해 잔해물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잔해물 사이에서 시신을 수습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지만, 노력 끝에 62구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그중 신원이 확인되는 16구는 유족이 수습해 개인적으로 안장했다. 나머지 46구는 유족 중 한 명이 땅을 기증해 그곳에 안장했다. 이곳이 ‘만벵디 공동장지’다.
4월 28일, 이 소식을 들은 3차 희생자 유족도 가만있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유족은 시신 수습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 학살터에 도착했다. 그날은 도착하니 3월과 다르게 경찰이 현장 출입을 막고 있었다. 경찰은 3월에 시신이 외부로 나간 것을 알고 경비를 강화했다. 그렇다고 유족이 쉽게 물러설 상황도 아니었고, 그럴 일도 아니었다. 그날부터 유족은 꾸준히 관계 당국에 탄원과 청원을 넣어 유해 발굴을 허용해 달라고 요구했다.
1956년 5월 18일 결국 유족 요구가 받아들여졌다. 드디어 시신 수습이 허용됐다. 유족이 확인해 보니 시신들은 탄약고 잔해물 사이 웅덩이에 수장되어 있었다. 유족은 이웃의 양수기를 빌려와 물을 퍼내기 시작했다. 물을 퍼내자, 시신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물 속에 오래 잠겨 있다 보니 시신이 훼손되어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 다행히 그중 17구는 치아와 옷, 소지품 등으로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원이 확인된 시신은 유족이 수습해 개인적으로 안장했다.
신원 확인이 되지 않은 나머지 132구 시신들이 문제였다. 당시 과학이 발달하지 않아 DNA를 통해 신원을 밝힐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미리 준비한 칠성판을 바닥에 깔고 아무 시신의 머리뼈 하나에 팔뼈 두 개, 아무 시신의 다리뼈 두 개 등 여기저기 뼈를 모아 사람 형태를 만들어 한 구의 시신으로 만들었다. 이날 수습된 시신들은 만뱅디 공동장지와 달리 멀리 가지 못하고 인근에 합동으로 안장했다. 이곳이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다.
백조일손지지 묘역 이름은 주민 세 명의 제안으로 정했다. 대정읍 사무소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예비검속으로 아들을 잃은 주민과 다른 유족 두 명의 제안이 있었다. 이들이 제안한 이름은 백 명의 할아버지 아래 한 명의 손자라는 의미인 백조일손(百祖一孫)이었다. 그리고 묘역을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고 불렀다.
1952년 11월 26일 제104회 국무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경찰의 예비검속은 공표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에게 예비검속은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되었다. 이런 이유로 시신은 어떻게든 유족 손에 넘어가면 안 되었던 것이었다.
4·19의 희망은 5·16의 절망으로
1960년 4월 19일 4·19혁명이 일어났다. 3·15 부정선거로 드디어 이승만 정부가 무너졌다. 이 일로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직에서 하야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자, 예비검속 유족은 국회에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해 주기를 원했다. 5월 23일 국회에서 거창 지역 양민 학살 사건을 조사하기로 했다. 이를 본 제주 지역 국회의원들은 5월 30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조사 대상에 제주를 포함해달라고 요청했다. 국회는 이를 받아들여 조사 지역에 제주를 포함하기로 하고, 6월 6일 제주도를 방문하기로 했다.
당시 지역 신문사이던 제주 신보는 ‘4·3사건 및 한국전쟁 당시 양민 학살 진상규명 신고서’ 신청 관련 기사를 냈다. 이를 보고 제주도민이 신청한 건수는 1,200여 건이 됐고 피해 인원은 1,400여 명으로 집계됐다. 당시 연좌제가 적용되었기 때문에 실제 피해보다는 훨씬 적은 수의 신청이었다. 억울하지만 남은 가족을 생각하면 숨길 수밖에 없었다. 6월 6일 제주를 방문한 조사단은 제주도의회에서 유족 증언을 듣고 돌아갔다. 진상규명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이끄는 군사혁명위원회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사혁명위원회는 반공을 국가 정책의 기본 방침으로 내세웠다.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미국에 많은 지지와 원조받기 위함이었다. 반공을 국가 정책 기본 방침으로 내세운 마당에 4·3 정의는 훼손되어야만 했다. 미군정이 말한 대로 많은 제주도민은 공산주의자들이었고, 4·3은 그들이 일으킨 폭동이었다. 군사혁명위원회도 같은 인식이었다. 이런 인식은 미국 입맛에 딱 맞는 것이었다. 이로써 4·19의 희망이 5·16으로 절망이 되어버렸다.
1961년 6월이 되자 서귀포경찰서장은 ‘상부 명령이라면서 공동 묘역을 해체하라’라고 했다. 이를 받아들일 유족이 아니었다. 조선 천지에 이런 법은 없다며 펄쩍 뛰는 유족 대표는 경찰서장 지시를 완강히 거부했다. 유족 대표는 마을 이장을 찾아 중재를 요청했다.
경찰서장과 유족은 공동 묘역은 그대로 두고 비석만 철거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고, 이 일은 여기서 끝내기로 했다. 유족은 스스로 비석을 철거하지 못했다. 이를 본 경찰서장은 경찰서 급사에게 술을 마시게 한 뒤 비석을 해머로 깨부수게 했다. 파괴된 비석은 한참 동안 행방을 몰랐다. 비석은 1999년 8월 8일 유족이 합동으로 벌초하던 중, 돌담을 정리하다 발견됐다. 하지만 완전한 모양의 조각이 아니었다.
대학살을 막을 수 있었던 4·28 평화 협상
대정읍은 4·3초기 아주 중요한 회담이 있었던 곳이다. 4·3이 발발하고 20여 일이 지났을 무렵 9연대와 무장대간 평화 회담이 예정되어 있었다. 회담은 제주 주둔 군정 중대장 맨스필드 중령 지시로 이뤄졌다. 명령은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이 나서 무장대와 직접 만나 담판을 지으라는 내용이었다. 4월 22일 김익렬 중령은 자신의 신분과 이름을 넣어 평화 협상을 하자는 내용의 전단을 만들어 비행기를 타고 상공에서 뿌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 무장대에서 연락이 왔다. 무장대는 회담 장소는 자신들이 정한다고 했다. 연대장이 직접 나와야 하며 수행인은 2명 이상 안 된다고 했다. 양쪽의 노력 끝에 4월 28일 정오 무렵 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은 구억초등학교(현 대정초등학교)에서 만났다. 회담에 나선 그들은 서로 일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더 이상 같은 민족끼리 피 흘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장대 총사령관 김달삼은 가명을 쓰고 있었다. 그는 이승진이라는 본명으로 대정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교사였다. 당시 김달삼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을 맡고 있었다. 김달삼은 3·1절 발포사건이 있을 때 남로당 제주도당에 총파업을 건의하기도 했다. 김달삼은 남로당 내에서도 강경파로 손꼽히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948년 4월 3일 일어났던 무장봉기도 남로당 내에 김달삼과 같은 강경파들의 다수 결정으로 일어났다. 김달삼은 8월에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해 소련과 스탈린을 지지하자, 남한 정부는 무장대를 더 가혹하게 탄압했다.
회담장에 나타난 김달삼은 김익렬 중령에게 얼마만큼 회담 결과에 대한 약속 이행 권한이 있는지 물었다. 이는 상대 지위가 얼마만큼 높은지를 파악하는 것으로, 자신의 급과 맞는지 확인하는 절차였다. 결과에 대한 약속 이행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회담장에 왔을 경우, 합의된 결과가 일방적으로 바뀌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익렬 중령은 굴하지 않고 “미군정 장관 지시에 따라왔으며 내가 가진 권한은 미군정 장관 권한을 대표하며, 오늘 나의 결정은 미군정 장관 결정”이라고 말했다. 김달삼 또한 “제주도민 도민 의거자들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다”라고 하며 동등한 입장에서 협상이 시작됐다.
4시간 동안 회담은 진행됐다. 밀고 당기기를 반복한 끝에 결과를 끌어냈다. 첫 번째, 72시간 이내에 전투를 중지한다.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 미달로 간주하며 5일 이후 전투는 배신행위로 본다. 두 번째, 무장해제는 점차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세 번째, 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뤄지면 주동자들 신변을 보장한다. 합의된 귀순 절차는 회담 다음 날에 모슬포 연대본부와 제주읍 비행장에 각각 귀순자 수용소를 설치하고, 점차 서귀포, 성산포 등지에도 수용소를 세우되 군이 직접 관리하고 경찰 출입을 통제한다는 내용을 합의했다. 이 협상을 ‘4·28 평화 협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4·28 평화 협상은 5월 1일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파기됐다.
예비검속의 실체를 세상에 알린 김도영 박사
김도영 박사는 섯알오름 희생자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대정면사무소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학살의 광풍이 불었던 4·3을 무사히 넘겼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으로 1950년 8월 20일 새벽 5시에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학살됐다. 그의 나이 3살 때였다. 이도영 박사는 억울하게 아버지를 잃게 되자 4·3과 한국전쟁으로 희생된 예비검속 피해자들을 알리는 데에 헌신했다.
김도영 박사는 연좌제 피해자였다. 제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경북대 사범대학교에 진학해 교사의 꿈을 꾸었다. 대학교를 졸업해 교사로 첫발을 디뎌 꿈을 이루나 싶었지만, 얼마 가지 못해 교직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1979년 그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미국 유학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지만, 노력 끝에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상담심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에서 성공한 이도영 박사는 세월이 흘러 1997년 동원산업대학(현 제주국제대학)에 전임 강사로 임명됐다. 18년 만에 고향 제주로 돌아왔다. 그는 학생들을 지도하는 본업을 수행하면서 민간인 학살 규명에 대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미국과 제주를 오가며 자료 수집을 했다.
그 결과 미국 정부 문서 보존소에 5건의 비밀문서를 찾을 수 있었다. 비밀 문건은 ‘1950년 4월 20일 서울 공산 게릴라 처형’, ‘1950년 7월 초 대전형무소 정치범 처형’, ‘1951년 1월 대구 근교 부역자 처형’ 등의 문건이었다. 그가 수집한 많은 자료는 1999년 세상에 공개됐다. 그가 공개한 자료는 한국전쟁 당시 양민 학살 실체를 세상에 처음 알리는 매우 중요한 증거 자료들이었다.
이도영 박사는 그뿐 아니라 제주국제공항이 들어서기 전 지적도를 확보해 있기도 했다. 지적도에 따라 공항 주변 주민을 직접 찾아다니며, 주민이 기억나는 대로 말하는 증언을 꼼꼼히 기록했다. 이는 예비검속으로 정뜨르비행장에서 집단 학살 후 암매장했던, 제주국제공항 유골 발굴을 위한 중요한 자료였다. 그가 꼼꼼하게 정리했던 기록은 2008년 9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있었던 제주국제공항 유해 발굴에 결정적인 자료가 됐다.
학살에 가담한 군인을 찾아가거나 더 윗선의 사람들을 찾아가 진상규명을 위해 큰 노력을 했다. 노력은 아쉽게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지병으로 4년여 간의 투병 생활을 하다 2012년 3월 13일 미국 자택에서 사망했다. 이도영 박사 할아버지는 예비검속으로 자식을 잃고 합동 장지가 마련된 후 백조일손이라는 명칭을 만들자고 제안한 주민 세 명 중 한 명이었다.
작가 생각
섯알오름 학살터는 자꾸 미뤄지게 됐다. 촬영 계획서에 있었지만, 변수가 많아 세 번째 제주행에 촬영했다. 나는 섯알오름 학살터 입구에 차를 세우고 입구 위령비에 묵념을 했다. 그리고 좌·우측 능선이 눈에 띄었다. 나는 능선을 걸었다. 발 아래 넓은 땅에 얼마나 많은 시신들이 있었겠나 가늠해 봤다. 그러면서 토벌대가 생각났다. 이 잔인무도한 것들이 사람 생명을 어떻게 알았으면 파리 목숨처럼 대했을까 싶었다. 그런 만행을 저지르면서 전혀 죄책감을 못 느꼈는지 궁금했다.
능선을 한바퀴 돌고 잠시 쉼터에 앉았다. 방금 내가 걸어온 능선을 보며 예비검속자들의 당시 동선에 대해 잠시 생각해 봤다. 그들은 위령비가 있는 저 아래에서 들어와 내가 올라왔던 능선에 일렬로 섰다. 그리고 총살당했다는 것을 생각하니, 마치 내가 그때 현장에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삶의 끝을 느껴 삶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그들, 제발 하늘에서는 이런 일 안 당하면서 지내길 빌었다. 난 마음을 추스려 희생자들이 묻혀 있는 백조일손지지 묘역으로 이동했다.
오늘 촬영을 모두 마쳤다. 여유 있게 공항에 도착했다. 탑승 수속을 마치고 의자에 잠시 앉아 활주로에 뜨고 내리는 비행기를 봤다. 활주로 아래 어딘가에 예비검속으로 희생된 분들이 계시지 않을까 생각했다. 활주로 건너로 보이는 바다를 보며, 저 바다 어딘가에 수장된 분들이 계시지 않을까 생각했다. 무거운 마음이었다. 무거운 마음은 발걸음도 무겁게 했다.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는 동쪽으로 이륙하는 바람에 하늘에서 곤을동 마을과 주정공장 수용소를 볼 수 있었다. 난 눈을 감고 4·3 유적지 여행 첫날을 떠올렸다.
[ 섯알오름 학살터 유적지 정보 ]
주소 l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1590-3
문의 l 제주특별자치도청 4·3 지원과 064-710-8452
기타 l 주차장 있음
[ 제주예비검속 백조일손 역사관 유적지 정보 ]
주소 l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586-5
문의 l 제주예비검속 백조일손 역사관 064-792-4301
기타 l 운영시간 9:00~18:00(2·4주 월요일 휴관일)
관람료 무료
주차장 있음
[ 만벵듸 공동장지 유적지 정보 ]
주소 l 제주특별자치도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2754
문의 l 제주특별자치도청 4·3 지원과 064-710-8452
기타 l 주차장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