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여기는 누구 집이야?”
엄마 따라온 2학년 지민이가 여기가 어딘지 궁금해 묻는다.
“여기는 진아영 할머니가 살던 집이야.”
“진아영? 어! 내 친구 이름이랑 똑같네.”
“그래? 신기하네. 지민이 친구랑 할머니 이름이랑 똑같네.”
지민이는 할머니 이름을 듣자, 단짝 친구를 떠올렸다. 지민이는 아영이랑 학원도 같이 다니고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둘도 없는 단짝 친구다.
엄마가 할머니 집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본다.
“엄마 아는 할머니야?”
지민이가 낯선 듯 엄마에게 물어본다.
“어. 최근에 알게 된 할머니야.”
“어떻게 아는데? 마트 가서 알았어?”
지민이가 엄마랑 할머니가 어떻게 아는지 2학년 다운 질문을 했다.
“아니. 하하하”
엄마도 지민이 질문이 웃겨서 웃기만 했다.
“할머니 어디 갔어?”
“할머니는 하늘나라 소풍 갔어.”
“언제 갔어?”
“할머니는 지민이 태어나기 한참 전에 가셨어.”
“아닌데. 우리 할머니 집처럼 그릇도 있고, 소파도 있고, 이불도 있는데. 이런 거 있으면 살고 있는 거야 엄마.”
지민이가 손가락을 가리키며 엄마에게 설명했다.
“저 봐. 텔레비전도 있잖아. 엄마, 할머니 잠깐 마트 갔나 봐”
엄마는 지민이가 귀엽기만 해 미소만 지었다.
엄마는 최근에 4·3 때 돌아가신 진아영 할머니를 우연히 알게 됐다. 그래서 할머니 집에 한번은 와봐야지 하면서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모처럼 조용한 주말이라서 지민이랑 바람 쐴 겸 들렀다.
할머니 집은 지민이가 말한 것처럼 잠시 외출한 것처럼 보였다. 방도 깨끗했고, 살림살이도 그대로 있어 잠시 나갔다면, 진짜 믿을 것 같을 정도다. 갑자기 뒤에서 할머니가 들어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엄마는 방에 들어가더니 자물쇠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엄마는 조용히 흐르는 눈물을 지민이가 보기 전에 닦고 있었다. 할머니 영상을 처음 봤을 때 꼭꼭 잠가두던 그 자물쇠였다.
| 진아영 할머니 삶터에서 일어난 일을 소설로 구성 |
인적 드문 골목길에 유난히 작은 집 한 채가 보인다. 집은 시골 할머니 집에 온 듯 정감 있다. 주인은 떠났지만, 사람들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마당에 들어서니 주인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선인장만 반긴다. 사람들은 친할머니 집에 온 듯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열고 들어간다. 할머니가 쓰던 소파와 싱크대는 할머니가 쓰고 있는 듯 온전하다. 주인 없는 물건들을 보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첫 급습에 놀란 조용했던 판포리
한림읍 판포리(현 한경면 판포리)는 널개오름 아래 작고 평범한 마을이었다. 1949년 1월 13일 밤이었다. 판포리에 무장대가 급습했다. 무장대는 식량을 약탈하러 밤에 몰래 내려왔다. 무장대를 본 주민은 무서움에 떨며, 집 밖으로 뛰쳐나와 도망가기에 바빴다. 골목은 주민과 무장대가 섞여 혼란스러워 누가 무장대인지, 누가 주민인지 구분이 안 됐다. 판포리 주민은 마을 급습이 처음이라 매우 당황했다.
무장대가 나타나자 토벌대가 출동했다. 토벌대는 주민과 무장대가 섞여 있는 곳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무장대는 습격 30분여 만에 도망쳤다. 이날 토벌대 공격으로 주민 10여 명이 희생됐고 몇몇 주민은 부상을 입었다. 그중 한 주민은 토벌대가 쏜 총에 아래턱을 잃었다. 다행히 목숨은 지켰다.
무장대 습격이 있자 토벌대의 분노는 주민에게 돌아갔다. 토벌대는 무장대 습격이 있던 다음 날 오전, 주민을 불러 모았다. 그중 한 부녀자를 앞으로 불렀다. 주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옷을 모두 벗기고, 모진 구타와 몹쓸 짓을 하고 바로 총살했다. 부녀자는 다른 지역에서 살았는데 남편이 무장대가 되어 산으로 올라가자, 어쩔 수 없이 친정이 있는 판포리로 와서 생활하고 있었다.
죽은 부녀자에 씌워진 혐의는 무장대와 연락했고, 마을 지리를 알려줬다는 것이다. 토벌대는 증거 없는 의심으로 몰았다. 부녀자 여동생은 토벌대에 항의했다. "언니는 판포리 민보단장 집에서 생활하는데, 어떻게 산에 있는 무장대와 연락을 할 수 있냐"라고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세상에 나를 노출하고 싶지 않았던 진아영 할머니
판포리에 무장대가 급습하던 날, 턱을 잃은 주민은 어느덧 할머니가 됐다. 할머니는 35세 나이로 사고를 당했다. 사고로 턱을 잃자, 무명천으로 얼굴을 감싸고 지냈다. 그때부터 ‘무명천 할머니’로 불렸다. 할머니는 사고 후 판포리 생활지를 버리고, 언니와 사촌 형제들이 사는 월령리로 이주했다. 할머니는 이주 후 본인의 모습 때문에 마을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서지 못했다. 사람들이 일하러 나간 시간을 이용해 혼자 담벼락 아래 쪼그려 앉아 햇볕을 쬐곤 했다.
할머니는 잠시 집을 비울 때면 항상 자물쇠로 현관문을 잠그고 다녔다. 현관문뿐만 아니라 하나뿐인 방문도 꼭꼭 잠그고 다녔다. 심지어 집 앞 담벼락에 나가 햇볕을 쬘 때도 자물쇠로 꽁꽁 잠갔다. 습관이자 본능이었다. 사고 당시 두려움에 떨고 있던 나를 집 안에 두고 노출하지 않으려는 무거운 마음 표현이었다. 자기 자신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는 마음이었다. 하루에도 자물쇠를 얼마나 잠그고 열고 했는지, 자물쇠 몸통이 다 닳아 광이 날 정도였다.
할머니는 사람들과 어울려 같이 밥을 먹는 경우가 없었다. 마을에 큰일이 생겨 잔칫집이나 상가(喪家)에 가서도 음식을 먹지 않았다. 굶고 있다가 음식을 싸서 집에서 혼자 먹었다. 동네 이웃들이 커피를 타 주거나, 간식을 줄 때도 집에 가서 혼자 먹었다. 무명천을 풀고 식사를 할 경우 자신의 흉한 모습으로 주위 사람들이 불편해할 수 있다는 배려심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강박적일 만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장난을 좋아하는 성격이 밝은 할머니였다. 오랜만에 누군가 찾아오면 보란 듯이 손장난을 치고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계속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 할머니는 과거에 얽매여 있는 것 같지만, 현재의 밝은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할머니는 이웃의 도움을 거부하고 스스로 생활을 유지했다. 마을 앞 바다에 나가서 미역과 톳을 따고, 선인장 열매를 따서 팔았다. 때로는 논밭에 잡초를 뽑는 품팔이를 하며 생활했다.
할머니는 턱이 없으니, 대화뿐만 아니라 음식을 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항상 위장병에 시달리고 영양 부족으로 힘들어했다. 소화가 되지 않아 늘 소화제를 달고 살았고, 영양부족으로 온몸이 아파 진통제를 달고 살았다. 게다가 관절염이 심해서 주사를 자주 맞았고, 약을 타러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병원에 다녔다. 할머니에게 병원 가는 날은 유일한 외출이었다. 병원에 가는 날은 시장도 들리고 바깥바람을 쐬고 돌아왔다. 할머니는 힘든 몸이지만 약값 때문이라도 바닷가에 나가거나 품팔이를 해야만 했다. 할머니를 괴롭히던 것은 아픈 기억뿐만 아니라, 앞에 놓인 생계도 큰 걱정이었다.
할머니는 인생 절반 이상을 원망과 고통, 한에 서려 살았다. 아무 이유 없이 다쳤고, 국가의 사과와 치료는 없었다. 제대로 먹지를 못해 영양부족으로 온몸이 아팠고, 턱을 잃고 외출이 힘들어 사회생활도 하지 못했다. 이런 처지에 놓인 할머니에게 생활에 필요한 최소 비용과 약값은 큰 부담이었다.
할머니는 건강이 나빠져 2001년부터 한림읍 성이시돌 요양원에서 생활했다. 통증 완화 치료와 수녀님의 보살핌 아래 3년간 생활하다, 지병으로 2004년 9월 8일 91세 나이로 돌아가셨다.
독일의 진아영, 안네 프랑크
진아영 할머니와 유사한 사례를 독일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안네 프랑크(Anne Frank)는 192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유대인 소녀였다. 사업가였던 아버지 때문에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33년 안네 가족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1933년은 히틀러가 나치당을 집권한 해이며 유대인 탄압이 시작되던 해였다.
어느 날 안네 언니에게 노동수용소에서 보낸 소환장이 도착했다. 딸을 지키려는 부모님은 소환장을 거부했다. 안네 가족을 포함한 일행 8명은 안네 아버지 사업장 건물 공간에 은신처를 만들어 생활했다. 안네는 그날부터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갔다. 씻는 것, 화장실 사용하는 것 등 모든 것을, 시간을 짜서 계획대로 움직이며 살았다. 은신처 생활은 2년여 동안 이어졌다. 이곳이 마지막 은신처가 된 프리센그라흐트 263번지다.
안네는 은신처 생활 중 1942년 6월부터 1944년 8월까지, 2년 2개월 동안 있었던 모든 일들을 기록했다. 독일 나치의 참상을 본인 일기에 하나도 빠짐없이 적었다. 안네는 붉은색 체크 무니 일기장을 ‘키티’로 부르며, 키티와 대화하듯이 썼다.
1944년 8월 은신처 생활 중, 안네 가족은 누군가의 밀고로 나치에 모두 발각됐다. 안네 가족은 폴란드에 있는 악명 높은 독일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로 수용소’로 이송됐다. 안네 언니와 안네는 다시 독일 본토 ‘베르겐 벨젠 수용소’로 이송됐다. 안네는 전쟁이 끝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45년 수용소에서 전염병에 걸려 16세 나이로 죽었다.
안네 가족은 아버지를 제외하고 모두 죽었다.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고 지인으로부터 안네가 쓴 일기장을 돌려받았다. 1947년 나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딸의 일기를 책으로 만들었다. 그 책이 ‘안네의 일기’다. 책은 전 세계 60개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2,500만 부 이상 팔려 전 세계 베스트셀러 10위에 들었다. 안네의 일기는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안네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가족들과 함께 지냈던 은신처를 박물관으로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어느 방직공장의 새 공장 건립 계획으로 은신처가 철거 위기에 놓였다. 암스테르담의 이름있는 시민위원회가 앞장서 안네의 은신처 철거 계획을 막았다. 결국 방직공장은 새 공장 건립을 포기하고 은신처 건물을 안네 아버지에게 기증했다.
1957년 안네 아버지는 박물관 건립을 맡을 조직을 설립했다. 1960년 5월, 3년간 준비 끝에 ’안네 프랑크 하우스‘라는 박물관을 세상에 공개했다. 안네 프랑크 하우스 방문객 수는 해마다 늘고 있고 연간 120만 명이 다녀갔다.
1970년 안네 아버지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더 이상 일어난 일을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고,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 것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박물관의 사명에 대해 ’제2차 세계 대전의 암울한 시기와, 유대인 박해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오늘날 세계의 차별, 편견, 억압에 맞서 싸우기 위해 설립했다‘라고 말했다.
현재 박물관을 관리하고 있는 대표는, ’안네 프랑크 하우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사명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당시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여주고,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안네 아버지는 ’역사는 교훈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이라고 했다. 그 역사를 기억하고, 그 역사를 통해 반성하고, 그 역사에 응답하는 것이 안네 아버지가 말하는 안네 프랑크 하우스 활동 목표다.
히틀러 데칼코마니 이승만
안네와 진아영 할머니 공통점은 국가로부터 희생당했다는 점이다. 히틀러 나치의 유대인 탄압과 이승만 정부의 제주 도민 탄압은 너무 닮았다. 국가는 무분별한 공권력을 국민에게 가했고, 공권력에 맞서 저항하는 것은 힘없는 국민이었다. 공권력에 대한 희생은 안네와 진아영 할머니를 동시에 부른다.
독일 최대 정당인 나치당은 국민으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었다. 나치당 수장 히틀러는 독일 총리로 취임했다. 1차 세계대전 패배로 독일 자존심이 추락한 것과 전쟁 패배로 엄청난 액수의 전쟁배상금이 발생했다. 그로 인해 독일 경제가 점점 어려워졌다. 히틀러는 독일인의 적을 유대인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 돌파구를 마련했다.
유럽 대부분 유대인은 사람들이 꺼리는 금융업이나 대출업에 종사했다. 히틀러는 이를 이용해 ‘유대인이 독일 국민에게 비싼 금리를 받는다, 유대인 때문에 삶이 힘들다’라는 모함으로 국민을 선동했다. 결국 유대인은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직장을 잃고, 목숨까지 빼앗겼다. 갖은 탄압에 못 이겨 도망가거나, 안네 가족처럼 숨어 지내다 붙잡혀, 공포의 상징이던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 대학살이 자행됐다.
4·3 당시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좌익에 선거가 방해되자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낙인찍어 제주 도민을 폭도로 간주하고, 온갖 모함으로 학살했다. 토벌대와 무장대간 평화 협상이 있었지만, 좌익의 행동처럼 꾸며 고의로 마을에 불을 질러 협상을 깼다. 이 일로 도민에 대한 미군정 탄압은 더 심해졌다. 결국 남한 단독 정부가 만들어져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제주를 향한 탄압은 ‘초토화작전’으로 극에 달했다.
당시 유대인은 나치를 피해 도피, 은신했던 것처럼, 4·3 때도 많은 제주도민이 토벌대를 피해 도피, 은신했다. 많은 유대인이 몸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암담한 생활은 4·3 때도 마찬가지였다. 제주도민은 토벌대를 피해 한라산, 궤(굴), 곶자왈(숲 덤불)에서 은신 생활했다. 은신 생활 중 토벌대에게 잡히면 수용소인 각종 창고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거나 학살됐다.
독일에 히틀러 친위 부대인 나치 친위대가 있었다면, 국내는 이승만 대통령 친위 부대인 서북청년회가 있었다. 나치 친위대의 남녀노소 무분별한 학살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마찬가지로 서북청년회의 무분별한 학살은 많은 제주도민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승만 사진이 있는 액자를 구매하라고 강요했고, 구매하지 않으면 빨갱이로 몰아 그 자리에서 죽였던 것만 보더라도 이승만 친위 부대임을 알 수 있다.
독일이 폴란드에서 운영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공포는 세계적으로 알아준다. 아우슈비츠에서 느꼈던 공포는 제주 주정공장 수용소, 정방폭포의 각종 창고, 성산 서북청년회 특별중대도 마찬가지였다. 이곳들은 이름만 들어도 제주도민을 벌벌 떨게 했던 곳이었다. 이 모든 것을 봤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마치 학습이라도 한 듯이 히틀러와 너무 닮은 모습을 보여줬다.
역사적 가치가 높은 할머니 집
히틀러가 자살하고 독일은 전쟁에서 패망했다. 그 후 1970년 12월 7일 서독 빌리 브란트 총리는, 25년 만에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는 폴란드를 찾았다. 전쟁 이후 독일 정상이 폴란드를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총리는 유대인 희생자 위령탑이 있는 바르샤바를 찾아 위령탑에 헌화하면서 무릎 꿇고 참회하는 시간을 가졌다. 총리의 파격적인 행동은 폴란드 국민으로서 매우 놀랄 일이었다.
가해국 총리가 무릎을 꿇고 사죄한다고 해서 죽은 가족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동안 가슴에 품고 있던 응어리가 풀릴만한 최소의 행동으로 보였다. 독일 총리의 진정성 있는 사과를 통해 반성하는 장면은 전 세계인을 놀라게 했다. 이런 모습은 폴란드 국민에게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럼, 우리 땅에서 있었던 4·3은 어땠을까. 4·3은 누구 하나 나서 사과하거나 인정하지 않았다. 유족을 위해 가해자의 사과와 책임, 처벌이 중요하지만 없었다. 55년이 지난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국가 차원의 사과가 있었다. 그나마 오랜 세월 동안 가지고 있던 유족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렸다고 생각한다.
안네 프랑크 하우스를 관리하는 재단이 있듯이, 우리에게도 ‘제주 4·3 평화재단’이 있다. 재단은 4·3을 널리 알리고, 젊은 세대에게 올바른 역사 인식을 심어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4·3의 전반적인 이해나 인적, 물적 피해 규모, 가해자 집단의 존재 등 4·3에 관련된 모든 것을 잘 설명해 주는 ‘제주 4·3 평화 기념관’이 제주시 봉개동에 있다.
진아영 할머니 삶터도 안네 프랑크 하우스처럼 보존 가치가 매우 높다. 안네가 2년간 지낸 공간을 통해 당시 상황을 이해하고, 왜 숨어 있어야 했는지를 알려준다. 박물관은 안네의 은신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목표이듯이, 할머니 집도 마찬가지다. 할머니가 살던 집을 통해 4·3 피해자가 어떻게 살았는지, 얼마나 많은 고통 속에 살다가 갔는지 잘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할머니의 모든 것들이 고스란히 묻은 기억 모두를 간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올바른 역사를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존재를 부정할지 모르는 역사에 대한 대비도 매우 중요하다. 할머니 자신을 스스로 가둬두었던 집은 역사적으로 매운 큰 의미가 있다.
월령리에 할머니가 살던 집은 ‘진아영 할머니 삶터’라는 이름으로 관리되고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주인이 없어진 집은 헐리게 됐다. 이 소식을 접한 제주도 내 여러 단체가 움직였다. 4·3 때 다쳐서 외롭게 살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위해, 공간을 기록으로 남기자는 의견이 모였다. 모인 의견으로 ‘진아영 할머니 삶터 보존위원회’를 구성했다.
보존위원회를 구성할 당시만 해도 할머니는 ‘무명천 할머니’로 더 알려졌다. 무명천 할머니는 할머니 아픔을 가리기 위한 이름이었다. 그래서 ‘진아영’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할머니였기에 본명을 사용하자는 의견이 있어, 진아영 할머니 삶터로 정해졌다.
2008년 3월 할머니 집은 할머니가 생전에 살고 있을 때처럼 복원됐다. 삶터 내부는 실제 할머니가 끔찍이 사용했던 자물쇠 세 개가 보관되어 있다. 그 외에도 할머니가 사용했던 옷과 이불, 머리빗, 가방 등이 있다. 냄비, 그릇 등 가재도구들과 할머니가 달고 살던 약통도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보존위원회 활동가들이 수시로 할머니 집에 들러 먼지를 닦고, 청소를 하며 집을 관리한다. 현재는 많은 관광객들이 다녀가는 곳이 됐다.
작가 생각
진아영 할머니 집 촬영을 위해 한림읍에 도착했다. 오늘은 날씨가 너무 맑고 구름이 예뻤다. 3번째 촬영 만에 이런 날씨를 볼 수 있었다.
진아영 할머니 집을 방문하려고 마을 어귀에 차를 세워두고 골목을 걸어갔다. 골목을 몇 번 꺾자 멀리 색이 바랜 초록 지붕이 얹힌 하얀 집 한 채가 보였다. 검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할머니 집은 다른 집들에 비해 유난히 작게 보였다. 집 앞에 도착하니 일반인은 들어오지 말라는 의미인지 정낭에 나무가 3개가 올라가 있었다. 이 의미는 주인이 멀리 외출 중이라는 의미였다.
나는 정낭 앞에 서서 ‘주인 없는 집에 들어갈까, 말까?’를 한참 고민했다. 마침, 골목에 아주머니 한 분이 지나갔다. 할머니 집에 들어가도 되는지 여쭤봤다. ‘원래 저렇게 있고, 여기 오는 사람 모두 정낭 넘어 다닌다’라고 했다. 아차 싶었다. 정낭 3개가 올라간 것은 당연하다. 주인이 멀리 외출 중이니까 세 개를 올린 것이었다. 할머니는 지금 21년째 하늘 소풍 중이다.
할머니 집 현관을 열었다. 나는 놀랐다. 진짜 조금 전까지 계시다가 잠시 외출한 듯 살림살이가 가지런히 있었다. 할머니가 평소 쓰시던 그릇과 주방 도구들, 소파와 작은 냉장고, 안방에 이불과 옷장, 열쇠와 약통은 조금 전까지 사용하고 있던 물건들 같았다. 초등학생들이 손 글씨로 적은 편지는 무척 인상 깊었다.
난 희생자들을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아팠다. 그들의 슬픔과 억울함, 분노가 느껴졌다. 시대를 잘못 만나 불길 속에서 출구를 찾아야만 했던 그들의 모든 것이 느껴졌다. 할머니 집을 돌아보고 나오니 내 마음이 뭉개졌다. 문득 다랑쉬굴에서 죽은 소년이 생각났다. 뭉개지는 내 마음이 그 소년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오늘 촬영은 유적지 촬영은 더 이상 없다. 봉개동에 있는 제주 4·3 평화 기념관 촬영을 하러 간다. 그곳은 면적도 넓고 실내 전시관을 촬영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그래서 다른 일정은 잡지 않았다. 기념관은 4·3 전반적으로 잘 이해할 수 있는 곳이다. 4·3을 알고 싶으면 제주 4·3 평화 기념관부터 찾으면 많은 도움이 된다.
[ 진아영 할머니 삶터 유적지 정보 ]
주소 l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월령리 381
문의 l 제주특별자치도청 4·3 지원과 064-710-8452
기타 l 주차장 없음
[ 제주 4·3 평화기념관 유적지 정보 ]
주소 l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봉개동 237-2
문의 l 제주 4·3 평화기념관 064-723-4344
기타 l 운영시간 9:00~18:00(1·3주 월요일 휴관일)
관람료 무료
주차장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