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간 취재를 끝으로 느낀 여행의 목적

by 예지리파파

진아영 할머니 집을 마지막으로 열두 곳 제주 4·3 유적지 방문을 마쳤다. 9개월 동안 사진 촬영, 유적지 해설 청취, 주민 인터뷰, 유족 행사 참여 등 계획보다 더 많은 일이 있었다. 돌아보니 제일 힘들었던 것은 사진 촬영이었고, 제일 계획대로 되지 않은 것도 사진 촬영이었다.


집에 와서 사진을 보니 날씨 때문에 사진이 마음에 안 들었고, 부족한 부분이 있어 다시 촬영했고, 원고를 쓰다 보니 새로운 촬영지가 생겨 다시 내려가 촬영했다. 처음 계획했던 2일은 얼토당토않은 계획이었다. 마지막 날은 항상 비행기 시간에 쫓겨 촬영 계획보다 일정을 빨리 접기도 했다. 사진 촬영은 계획처럼 진행되지 않았고 첫 촬영을 마치고 다섯 번을 더 내려와 촬영했다.


제주는 나만의 핫스폿이 있다. 옥빛 바다가 펼쳐진 협재해수욕장, 용이 지나간 자리 같은 용머리해안, 하루 종일 넋 놓고 봐도 질리지 않는 서귀포 범섬 등이 있다. 하지만 취재 기간 중 한 곳도 들리지 않았다. 카페에 들러 커피 한잔 마시지 않았고, 여유 있는 식사 한번 하지 않았다. 늦잠 한번 자지 않고 아침 8시 전에 숙소를 나왔다. 커피는 테이크아웃해서 이동 간에 마셨고, 식사는 이동 간에 김밥으로 때우거나, 원래 빨랐지만 온 김에 한 군데라도 더 취재하려는 욕심에 입으로 털어 넣다시피 했다. 점심 먹고 잠이 오면 졸음 껌을 두 개씩 씹고, 렌터카 창문을 모두 열고 미친 듯이 노래를 따라 부르며 잠을 깼다. 이렇게 여유와 융통성 없고, 나와의 타협 없는 제주 여행은 처음이었다.


7월 제주 촬영이 기억에 남는다. 무더운 제주 여름은 고향인 대구만큼이나 뜨거웠다. 말 그대로 고온다습, 뜨겁고 끈적이는 여름이었다. 내가 취재한 제주 4·3사건 유적지는 대부분 야외였다. 차에 내려 잠시 걸으면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 때문에 하루에 오전, 오후를 나눠 상의를 갈아입을 때도 있었다. 좀 힘들기는 했으나 내가 여기 있는 이유가 휴양 차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더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늘을 찾거나 폭염 시간대를 피하는 등 편한 마음으로 다니지 않았다. 더욱이 그럴 수 없었던 것이 사진을 찍고 취재를 하려면 그늘에서만 할 수 없었다. 주민을 만나 인터뷰하고, 현장을 다니면 자연스레 그늘 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픈 역사를 보러 온 내가 그늘을 찾는 것은 나 스스로가 허락하지 않았다.


7월 촬영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 양말을 벗었는데, 다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양말 신은 발목 아래만 하얗고 다리가 모두 타서 투톤이 됐다. 가족도 마찬가지로 놀라며 선크림을 운운하길래, 난 무시하는 듯 웃기만 했다. 사실 취재하러 다닐 때 가끔 다리가 따갑다는 느낌을 받아 선크림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원래 그런 것에 신경을 안 쓰는 스타일이어서 얼굴에만 발랐다. 그리고 기념으로 다리쯤은 태워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색이 다른 내 다리를 보며 내가 땀 흘리던 7월 제주를 잊지 않고 싶어서였다.


나는 혈액 투석 환자로서 혈압 떨어지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혈압이 떨어지면 그 자리에서 쓰러지는데, 스스로 막을 수 없다. 쓰러지는 동안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2년 전 이미 한 차례 쓰러지는 경험을 해봤다. 그날이 처음이었고 전혀 대비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평소처럼 더운 곳에 서 있다가 나도 모르게 갑자기 쓰러졌다. 마침, 옆에 같이 있던 사람이 깨워 일으켜줬다. 얼굴을 벽에 긁으며 쓰러져 깨진 안경으로 눈썹을 찔러 꿰맨 적이 기억난다. 그 후로 다시는 그러고 싶지 않아 더운 환경을 피한다. 하지만 제주에서 뜨거운 7월을 겁내지 않고 바쁘게 다녔던 것은, 제한된 시간과 내 두 눈으로 봤던 것을 빨리 글로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1년여 간의 취재를 통해 제주 4·3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 검색을 통해 알던 것과 다르게 현장을 보니 더 실감이 났다. 아직도 시신이 수습되지 않고 묻혀있는 제주국제공항, 흔적조차 많이 남지 않은 도령마루, 제주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제주의 심장 관덕정, 산에서 내려오자 고문과 구타가 이어진 주정공장 수용소, 그저 평온했던 해안마을 곤을동, 마을 전체가 제삿날이 같은 북촌리, 스스로 성을 쌓아 갇혀 살아야 했던 낙선동 4·3성, 살려고 피했던 굴속에서 모두 죽은 다랑쉬굴, 근거 없는 권력인 서북청년회의 횡포를 온몸으로 겪은 성산, 아름답지만 무섭고 끔찍했던 정방폭포, 한국전쟁으로 다시 끌려가 억울하게 죽은 섯알오름, 섯알오름에서 희생된 분들을 모신 만뱅듸와 백조일손지지, 토벌대를 피해 겨우 찾은 은신처 큰넓궤, 경찰이 쏜 총에 턱을 잃고 평생을 살았던 진아영 할머니 집. 나는 이 열두 곳에서 학살의 광풍이 불던 때 살고자 처절하게 움직였던 그들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꼈다.


이번 제주 4·3 여행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민주주의가 얼마나 고마운지 느낄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유적지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니,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성숙한 민주주의가 있기까지 제주 4·3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희생된 엄청난 분들의 피와 땀이 깔려있다. 그래서 제주 4·3과 5·18은 그들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과 헌신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며, 더 나은 민주주의로 발전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책임이 완수되어 더 나은 민주주의는 다시 우리 후세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그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한편, 이번 제주 4·3 여행은 나를 스스로 돌아보는 여행이기도 했다. 살면서 내가 지금 하는 일은 정당한지, 나 혼자 좋자고 남을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닌지,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지, 내가 없을 때 난 아이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는지 생각해 봤다. 4·3사건이 진행되는 때도 이런 고민을 한 번만 했더라면 잔혹한 동족상잔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확신한다. 죄 없는 주민을 학살하는 일이 정당한지, 나 살자고 경찰에게 상납해 남을 끌어들여 힘들게 하지는 않았는지, 아이들 앞에 어른으로서 한 짓이 부끄럽지 않았는지, 무고한 주민들을 학살하고 세월이 지나 내가 죽고 없을 때, 내 아이들은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를 한 번만 생각했더라면, 3만여 명이 학살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이번 여행은 궁금했던 제주 4·3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고, 여러모로 많은 것을 느껴 만족할 수 있었던 여행이다.


내가 걷고,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여행이다. 여행은 내가 움직이고 느끼면서, 기억에 남는 모든 것을 잊지 않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어디에 갔는지 사진을 찍고 SNS에 기록을 남긴다. 보통 여행은 밝고, 명랑하고, 처음 가보는 곳에 대한 기대심에 가득차 있다. 여행은 기분 좋게 시작해야 하고 끝도 기분 좋아야 한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다. 이런 여행이 되어야 어떤 일로 힘들었던 지난 날을 보상받을 수 있다. 여행을 통한 보상은 여행의 순기능 중 하나이기도 하다.


밝고, 명랑한 여행 외에도 ‘다크투어’라는 어두운 여행도 있다. 다크투어를 하는 목적은 ‘아픈 과거를 잊지 말고, 다시 반복하지 말자’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일반 여행과 달리 기억과 성찰을 통해 교훈을 주는 여행이다. 다크투어의 모든 것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들이다. 아픈 기억이지만 그것을 느끼고 꼭 기억해서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


다크투어를 통해서 많은 것을 얻기도 한다. 사람들은 지금 나의 환경이 너무 평범하고 지루해 불평불만이 생길 때가 있다. 평범함이 소중한지 모를 때 다크투어를 하면서 당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보자. 그러면 지금 나의 환경에 안도감을 느끼고 감사함을 느낄 수 있다. 그날 있었던 아픔과 슬픔을 생각하면 지금 내가 느끼는 불평불만이 부끄러워 나를 성찰할 때가 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느끼며, 지금 환경에 만족하는 교훈도 얻는다. 교훈과 성찰은 다크투어의 순기능 중 하나다.


여행은 좋은 여행과 나쁜 여행이 따로 없다. 하지만 내가 만족하느냐, 못하느냐 혹은 내가 느끼느냐, 못 느끼느냐 차이에 따라 좋은 여행과 나쁜 여행이 될 수 있다. 허허벌판에 혼자 있어도 만족하고 뭔가를 느꼈다면, 좋은 여행이다. 하지만 해외 유명한 어디를 여행하더라도 만족 못 하고 느끼지 못하면, 그 여행은 나쁜 여행이다.


다크투어도 마찬가지다. 다크투어는 무거운 이야기가 있고 엄숙한 곳이다.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듣고 슬픔이든, 아픔이든, 분노든, 반성이든, 뭐라도 느꼈다면 다크투어는 좋은 여행이다. 어둠이 있어야 밝음이 느껴지듯이, 다크투어가 있어야 보통 여행에 만족감을 높일 수 있다.


우리는 힘들었던 삶을 여행을 통해 보상받고, 삶에 만족감을 느끼려고 여행한다. ‘만족’은 우리가 여행하는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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