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보는 제주 4·3

by 예지리파파

평화의 섬, 제주. 제주는 언젠가부터 평화의 섬으로 불린다. 제주는 왜 평화의 섬으로 불릴까? 한국전쟁이 육지에서만 일어나서일까? 아니면 유명 관광지여서일까? 아니다. 평화의 섬으로 불리기까지 제주도민의 많은 희생과 헌신, 이에 따른 상상도 못 할 이야기가 있다.


제주 4·3은 끔찍하고 잔인한 단어들이 빠지지 않는 아주 무서운 이야기다.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면 다 듣기 전에 포기하던지, 다 들은 후 분노를 참지 못할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이게 사실인가 다시 한번 확인할 것이다. 이야기의 가장 큰 핵심은 국가가 제주도민을 상대로 잔인무도한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소속 무장대가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은 12곳 경찰 지서를 불 지르고 경찰과 경찰 가족을 죽였다. 우익청년단을 찾아가 살인하고 선거관리위원회를 방화하고 선거관리위원을 살해했다. 국가는 350여 명의 무장대를 진압하려다 3만여 명의 제주도민을 학살했다. 무장대 진압 과정에서 도민 3만여 명이 희생되는 일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무장대가 일으킨 무장봉기도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불만이 있으면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하며, 절대로 폭력으로 해결해서는 안 된다. 명백한 잘못이며 처벌받아 마땅하다. 무장대가 진정 제주도민을 위했다면 무장봉기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문제 해결을 해야 했다.


1947년부터 1952년까지 제주에서 학살, 감금, 폭행, 약탈, 방화, 강간 등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일들이 벌어졌다. 토벌대는 도민 상대로 일제가 저질렀던 고문만큼이나 혹독한 고문이 자행됐다. 고문만 있었을까? 전쟁 속에서 적에게 나라를 빼앗긴 국가에서나 일어날법한 대량 학살이 있었다. 마을을 통째로 불을 질러 많은 도민이 집을 잃었다.


믿지 못하겠지만, 이런 일들이 우리 땅 아름다운 제주에서 일어났다. 놀랍게도 이런 짓을 지시했던 것은 이승만 정부였고, 그 명령을 따른 것은 군인과 경찰 그리고 서북청년회였다. 이들이 나서 일삼은 만행은 권력에 대해 선제적이자 과잉 충성이었다.


범죄자를 잡으려면 조사를 통해 당시 상황을 들어보고, 현장을 찾아 증거를 수집하고, 증인을 찾아 증인 기억을 검증해야 한다. 그리고 확실한 물증을 가졌을 때 재판에 넘겨 죄를 밝히는 것이 정상적인 국가 시스템이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았다.


잔인무도했던 제주 4·3은 이승만 정부가 무능하고, 무지했음을 대량 학살을 통해 스스로 입증했다. 제주 4·3 원인이 무엇인지 어떤 규명도 하지 않았고, 대화나 제도적으로 통치해야 할 정부는 무력을 앞세워 도민을 탄압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 4·3을 권력에 대한 도전이자,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나쁜 세력으로 내몰았다. 대통령 명령을 따르는 9연대장 박진경은 "제주도민 30만 명쯤은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라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이 발언은 국민 목숨을 하찮게 여김을 증명한 발언이었다.


희생자와 유족에게 제주 4·3은 아직 진행 중인지 모른다. 보상과 배상을 떠나 가해자 처벌이나 책임자 처벌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해자 우두머리 이승만 대통령, 학살 책임자 군경 수뇌부 중 처벌받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벌은커녕 승승장구하거나 정부 요직에 기용됐다. 심지어 이들은 국립현충원에 안장돼 있기도 하다.


반면 유족은 어땠을까? 가족을 끌고 가서 어디에서 죽였는지 말해주지 않아,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다. 시신이 없으니 장례식을 치르지도 못했고 제사도 못 지냈다. 공권력이면 이렇게 막무가내로 해도 되는 일인가? 누가 말했듯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아무 죄가 없다고 주장했는데, 그럼 제주 4·3은 이렇게 엄청난 일이 일어났는데 왜 아무도 죗값을 받지 않는 것인가?


제주 관문인 제주국제공항, 천혜의 비경이 있는 정방폭포, 웅장한 성산 일출봉은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들은 77년 전 모두 학살터였다. 이곳에서 학살된 희생자는 모두 시신 수습이 안 됐다. 시신은 공항 아래에 묻혀있거나, 바다에 떠내려갔기 때문이다. 아직도 이들을 기다리는 유족이 엄청나게 많다.


제주 4·3이 끝나고 유족은 연좌제에 시달렸다. 자식이 취직하려고 경찰서에 신원조회를 하면 4·3 유족이라서 신원조회를 꺼리고, 군에 장교로 지원하면 신원조회 과정에서 불합격을 받았다. 어쩌다 임용이 돼도 승진이 안 됐고 각종 인사에 불이익받았다. 연좌제는 친척일가까지 영향을 끼쳤다. 제주 4·3은 끝났지만, 연좌제는 오랜 세월 유족을 괴롭혔다. 유족에게 제주 4·3은 ‘死’와 ‘삶’이다.


나의 기준에서 제주 4·3을 정의하자면, ‘정부가 무장대를 진압하기 위해 군경과 서북청년회를 투입했지만, 무능으로 인해 애꿎은 제주도민 3만여 명을 학살한 사건’이라고 말하고 싶다. 3·10 총파업이 일어나고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회를 투입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사태를 수습했더라면, 최악의 결과는 없었다.


제주 4·3은 미군정 통치 기간에 일어났다. 제주 4·3은 미군정 때 일어난 일이니, 미군정에서 무장대를 체포해 조사 끝에 재판에 넘기면 가장 이상적이었다. 그리고 미군정이 초창기 제주 상황을 제대로 이해했더라면, 그래서 제주 민심을 조금만 읽었었더라면, 4월 3일 봉화는 피어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제주 4·3 책임은 미군정에도 있다.


이승만 정부가 출범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그런 시스템이 없었다면, 그에 대한 정부 책임은 전혀 없는 것일까? 무장대가 마을에 있으니 마을 주민은 모두 무장대였을까? 어쩌다 가족 구성원에 범죄자가 있으면 그 가족은 모두 범죄자일까?


생각해 보면 아쉬운 부분들이 있다. 관덕정 앞에서 기마경찰이 말에서 내려 아이와 부모에게 사과했으면 어땠을까? 3·1절 발포사건 책임자를 처벌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리고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회를 투입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많이 죽었을까? 토벌대와 무장대가 어렵게 협상한 4·28 평화 협상을 준수하고, 오라리 방화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는 굳이 3만여 명을 이렇게 희생시켜야 했나, 그 방법밖에 없었나, 꼭 그렇게 해야만 했느냐고 묻고 싶다. 분명 아쉬운 부분들이 곳곳에 있다. 분명 제주 4·3은 막을 수 있었고, 충분히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일이다.


제주 4·3이 끝난 지 70여 년이 지난 오늘도 4·3의 공식 명칭이 없다. 제주 4·3은 어느 처지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경찰과 서북청년회의 온갖 만행에 지친, 무장대 처지에서 보면 항쟁일 것이다. 무장대의 행동을 토벌대 처지에서 보면 폭동일 것이고, 무장대나 토벌대 모두가 도민에게 저지른 만행을 도민 처지에서 보면 분명 학살이다. 이 세 가지가 모두 얽혀 있어 제주 4·3을 정의하기 매우 어렵다.


우리는 엄청난 희생자를 만든 제주 4·3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는 한국전쟁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다. 어릴 때부터 교과서, 언론 등을 통해 배우거나, 해마다 6월이면 많은 영상 자료로 보고 듣는다. 누가 잘못했으며, 교훈은 무엇이며, 전쟁을 통해 남긴 아픔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럼 제주 4·3은 무엇을 교육했나? 안타깝게도 제주 4·3 관련 교육은 상당히 부실했다. 교과서를 통한 교육은 전무하고 방송에도 극소수로만 소개됐다. 최근에서야 여러 분야에서 제주 4·3을 소개하고 있다. 늦은 감이 있어 안타깝지만, 지금이라도 알려져서 다행이다.


우리말에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운다’라는 말이 있다. 제주 4·3이 딱 그 격이다.

이전 16화1년간 취재를 끝으로 느낀 여행의 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