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나 밖에 한 번만 나가면 안 돼요?”
“무슨 말이야! 밖을 왜 나간단 말이야!”
“요새 별을 본지 너무 오래됐어요.”
“신지야, 지금은 별 보는 것을 좀 참아야 해. 지금 밖에 별 보러 나갔다가 숨어 있는 군인들에게 들키면, 안에 있는 할아버지랑 삼촌들, 너 동생들 다 죽는다 말이야.”
“그래도 보고 싶은데…”
별을 보고 싶어 하는 여덟 살 신지를 아버지가 애써 달랜다. 신지는 굴에 들어오기 전 언니와 함께 곶자왈에서 잠시 생활했다. 곶자왈 생활은 조금 춥기는 했어도, 밤이 되면 반짝이는 별은 마음껏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별은커녕, 앞도 안 보인다.
마을 주민 모두 며칠째 굴 생활을 하는지 모른다. 굴에 들어온 날짜를 셀 수 없다. 신지도 답답해하고 있었다. 굴 안은 깜깜하기만 하고 놀 것이 하나도 없어 그럴 만도 했다.
“아버지.”
“왜”
“지금 밖은 밤이야?”
“글쎄, 아버지도 안 나가봐서 잘 모르겠는데.”
“우리 내일은 뭐 할거야?
”······”
신지는 잠시 쉬지도 않고 아버지에게 말을 건다. 어쩌면 신지는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이 놀이인지 모른다. 아버지 말꼬투리를 잡아, 말도 안 되게 계속 이어갔다.
나가고 싶어 하는 아이를 막는 아버지 마음도 아프다. 왜 이런 세상이 되었는지,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아이에게 알려줄 수 없다. 아이나, 아버지나 모두 시대를 잘못 만난 탓이다.
“신지야.”
“······”
“신지야!”
“······”
아버지가 신지를 불러도 대답이 없다.
“아~맛 좋다!”
갑자기 신지가 엉뚱한 말을 했다.
“신지 뭐 먹었어?”
“나? 물 마시고 있는데”
신지가 기분 좋은 듯 아버지에게 대답했다. 신지는 어쩌다 천장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을 발견했다. 어미 새가 먹이를 주면 입을 벌리듯이 천장을 보고 입을 벌리고 물방울을 받아먹고 있었다.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면 밖에 비나 눈이 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지는 아버지가 부르는 동안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은 어느 정도 물을 모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지는 목이 말라 물을 받아 마셨던 것이 아니었다. 신지는 지금 배가 너무 고팠다. 물도 벌컥벌컥 마시고 싶었다. 사실 신지는 그것보다 별이 더 보고 싶었다.
| 큰넓궤에서 일어난 일을 소설로 구성 |
바람만이 스치는 중산간마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하기만 하다. 학살의 광풍은 돌고 돌아 바다로 흘러갔다. 광풍이 지난 자리는 아픔과 분노만이 남아 있다. 그날 잔혹했던 피비린내는 온데간데없고, 고요만이 빈 마을에 남아 있다. 죽기 싫어 숨었던 따뜻했던 공동체를 버리고 혹한에도 살 곳을 찾아 산으로 올라갔던 그들은, 진정 그곳이 따스함을 느끼게 해 주는 곳인지 모른다.
동광리에서 최초로 일어난 학살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는 다섯 개 자연부락이 있던 중산간마을이었다. 다섯 개 자연부락은 무등이왓, 조수궤, 사장밧, 간장리, 삼밧구석이다. 다섯 개 마을 전체 200여 가구가 살았고, 그중 무등이왓은 130여 가구가 있어 동광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그리고 제주 전체 잃어버린 마을 중 가장 큰 마을이기도 했다.
무등이왓 지명 유래는 ‘춤을 추는 어린이를 닮았다’에서 유래됐다. 마을은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던 국영 목장을 일컫는 ‘소장(所場)’ 중 7소장이 있었다. 소장은 나라에 말을 공급하기 위해 특정 구역을 정해, 말을 키우던 곳으로 조선 세종 때 생겼다. 소장이 있던 무등이왓은 말총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말총은 말의 목뒤 갈기나, 꼬리 털을 말하며 갓, 망건, 관모의 재료로 쓰였다.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여러 물품을 팔아 가계에 보탬이 되므로, 7소장은 주민에게 아주 고마운 곳이다. 또, 무등이왓은 대나무가 많아 차롱(채롱)과 같은 대나무 수공예품을 많이 만들었다.
말 키우며 대나무 수공예품 만들고 살던 무등이왓에 학살터가 두 곳이 있었다. 1948년 11월 15일 새벽, 토벌대는 마을 주민에게 전할 말이 있다며 어느 주민 우영밭(텃밭)으로 모이라고 했다. 마을에 청년은 이미 도망갔거나, 인근 궤에 숨어 있어서 비교적 나이가 좀 있던 주민만 모였다.
토벌대가 주민을 우영밭으로 모을 때 양심 있는 군인이 있었다. 그는 주민에게 “지금 군인들 따라가면 죽으니까 빨리 도망가요.”라고 말하며 살 기회를 줬다. 그 말을 듣고 잽싸게 도망갔던 주민은 이웃이 구타를 당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있었다. 그와 달리 군인을 따라갔던 사람들은 처참한 광경을 눈앞에서 볼 수밖에 없었다.
토벌대는 주민이 우영밭에 모두 모이자, 그중 11명을 앞으로 불러 난데없이 구타를 했다. 주민이 모두 놀랐지만, 군인들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누구 하나 나서서 말렸다가는 같이 구타를 당했을 것이다. 내 목숨을 지키려면 이웃에게 미안하지만, 말릴 수 없었다. 그렇게 구타가 이어지는 동안 주민 한 명은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목숨 걸고 도망친 결과 살았다. 하지만 나머지 10명의 주민은 마을 주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 자리에서 총살됐다. 주민 10명이 학살당한 우영밭은 ‘최초학살터’가 됐다.
마을에 청년이 잘 안 보였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1947년 초대 제주도지사 박경훈이 물러나고 두 번째로 부임한 유해진 도지사가 부임했다. 유해진 도지사는 미군정 정책에 따라 강제공출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에 따라 각 마을을 점검하기 위해 담당 공무원이 동광리에 방문했다. 이 소식을 들은 마을 청년도 공무원을 만나러 왔다. 청년은 담당 공무원에게 공출량이 너무 많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마을 할당량을 조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담당 공무원이 요구를 거절하자 청년은 다시 요청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마을 청년이 담당 공무원을 폭행했다. 청년은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을 살았다.
이 사건으로 동광리는 미군정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경찰이 수시로 순찰하는 마을이 됐다. 그럴 때마다 마을 청년은 혹시 붙잡혀 갈까 봐 구석구석으로 숨었다. 이런 이유로 토벌대가 들이닥친 새벽도 비교적 나이가 있는 주민만 모였다.
당시 공출 제도는 미군정이 추진하고 있던 중요한 제도 중 하나였다. 그래서 공출 문제는 담당 공무원이 그 자리에서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이장도 안절부절이었다. 마을 이장은 마을을 돌보고, 주민을 위해서 일해야 하지만, 읍·면이나 더 윗선 관리자 심기도 잘 살펴야 했다. 심지어 어느 마을은 이장이 토벌대에 잘 협조해서 대량 학살을 막은 마을도 있었다.
숨어서 주민을 기다리던 비열한 토벌대
최초 학살이 일어난 지 한 달이 조금 안 됐을 무렵이었다. 12월 11일 무등이왓 마을 주민 18명이 토벌대에 학살됐다. 유족은 다음날 새벽 시신 수습을 위해 노인과 아이를 업은 여성들 위주로 학살터를 찾았다. 학살터에 도착한 유족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대나무 숲에 잠복해있던 토벌대였다. 전날 끔찍한 일에 놀란 가슴이 진정되기도 전, 다시 한번 놀랐다.
토벌대는 왜 숨어 있었던 것일까? 시신 수습을 막기 위해서였다면, 굳이 숨어 있지 않아도 됐다. 현장에 토벌대가 있는 것만으로도 유족은 근처에 가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토벌대는 누군가 찾아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 숨어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나무 숲에 숨어 있을 이유가 없었다. 토벌대는 전날 주민을 학살하고 유족이 나타나면 유족마저 죽이려는 의도가 있었다.
유족은 도망갈 생각도 못 한 채 꼼짝없이 토벌대 지시에 따랐다. 토벌대는 유족을 한곳에 모여 앉게 했다. 토벌대는 유족에게 다시 한번 만행을 저질렀다. 이번은 총이 아닌 죽창이었다. 죽창으로 주민을 마구 찔러 죽이려고 했다. 한 번에 죽지 못한 주민은 고통스러워했다. 너무 고통스러워 이리저리 구르면 다시 찔렀다. 그렇게 죽거나 죽을 지경에 있는 주민을 모아 놓고 그 위에 짚더미나 멍석을 가져와 덮었다.
토벌대는 짚더미에 불을 붙였다. 주민은 그 자리에서 모두 불타 죽었다. 그야말로 생화장이고, 생화장터였다. 12명이 그 자리에서 죽었고, 이곳을 ‘잠복학살터’라고 한다. 희생자 중에는 3세, 5세, 6세 어린 아이가 있었다. 토벌대는 노인과 아이를 업고 있는 여성에게 이토록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단순한 분풀이었을까? 아니면 무장대에 협조하지 말라는 협박용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주민이 무장대로 보였을까? 잠복학살터는 무등이왓의 두 번째 학살터였다.
따뜻했던 지하 공동체
1948년 11월 초토화작전으로 중산간마을에 소개령(疏開令)이 내려졌다. 동광리 주민도 소개되어 해안가로 내려갔다. 토벌대는 주민이 이주하자 동광리 모든 마을에 불을 질렀다. 그중 일부 주민은 소개령을 거부해 해안마을로 내려가지 않은 주민도 있었다. 남아 있던 주민은 토벌대에 학살되거나, 토벌대를 피해 한라산이나 인근 궤(굴), 곶자왈(숲 덤불)로 숨었다.
동광리 일부 주민은 마을 북쪽 도너리오름 곶자왈에 숨었다. 자왈은 우거진 풀들로 인해 몸을 숨기기 좋았다. 특히 밤에는 불만 켜지 않는다면 걸어 다녀도 들키지 않았다. 하지만 날씨에 대한 영향을 바로 받아 겨울에는 지내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광리 주민은 곶자왈 인근 ‘큰넓궤’를 발견했다.
큰넓궤는 크고 넓은 굴이라는 뜻이다. 큰넓궤는 삼밧구석 주민이 먼저 발견해 숨어 있었다. 삼밧구석 주민은 궤 입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무등이왓 주민도 나중에 큰넓궤를 발견해 들어왔다. 먼저 들어온 삼밧구석 주민은 궤 입구에 모여 있으면 발각의 위험이 있으니, 무등이왓 주민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큰넓궤는 입구가 좁아 무릎으로 기어 겨우 들어갈 수 있다. 입구에서 30여 미터 쯤 기어가다 보면 갑자기 나타나는 절벽을 만난다. 절벽을 내려가 조금 더 가다보면 교실 하나 크기의 공간이 나온다. 이런 복잡한 구조의 궤는 노출이 되지 않아 주민에게 더할 나위 없이 안전했다. 큰넓궤는 동광리 주민에게 조용히, 은밀하게 알려졌다.
은신 생활 중 청년은 낮 동안 도너리오름에서 빗개(보초)를 섰다. 오름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토벌대가 올라오는지 보였다. 빗개는 ‘검은개’와 ‘누런개’로 신호를 보냈다. 검은개는 검은색 제복을 입은 경찰, 누런개는 누런색 제복을 입은 군인을 빗대어 불렀다. 빗개 신호에 따라 궤 안에 있던 주민은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거나, 밖으로 잠시 나와 있던 주민은 궤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빗개는 감시자 역할 외 외부와의 창구 역할도 했다. 궤의 생활은 무엇보다 은폐가 중요했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아니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꼭 필요한 것이 있으면 빗개에게 시켰다. 빗개는 산에서 먹을거리나, 물을 구해 궤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져다줬다. 이렇듯 빗개 역할로 주민이 살고 죽는 경우가 많았다.
두 마을 주민이 숨어 지내던 큰넓궤 생활은 50여 일 동안 이어졌다. 시기가 겨울인 점을 고려하면 궤 안은 생활하기 좋았다. 곶자왈에서 피할 수 없었던 매서운 바람과 눈, 비는 걱정 안 해도 됐다. 피신 생활은 먹을거리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추위에서 살아남는 것이 항상 문제였다. 그런 측면에서 궤는 늘 일정한 온도로 인해 포근한 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
궤 생활은 추위와 눈, 비로부터는 내 몸은 지킬 수 있었지만, 배변 문제가 걱정이었다. 곶자왈 생활 중 배변은 뒤처리만 잘하면 아무 곳에 해도 문제가 없었지만, 폐쇄된 궤는 냄새로 큰 문제였다. 두 마을 주민은 협의 끝에, 무등이왓 주민이 있는 곳보다 더 들어간 곳에 변소를 지정해 사용했다.
그럼, 식사는 어떻게 해결했을까? 식사는 인근 다른 궤에서 해결했다. 큰넓궤에서 동쪽으로 100m 정도 가면 ‘도엣궤’가 나온다. 도엣궤는 큰넓궤에서 생활하던 주민이 밥을 했던 곳이다. 도엣궤 입구는 숲이 우거져있고 넓어서 몰래 밥하기 좋은 곳이다. 큰넓궤에 숨어 있던 주민 중 가족 대표 몇 명만 나와서 며칠 동안 먹을 것을 한꺼번에 만들어 큰넓궤로 다시 들어갔다.
도엣궤에서 만든 음식은 차롱에 담아 옮겼다. 물은 인근 마을 삼밧구석에서 소먹이는 물을 항아리에 담아, 큰넓궤로 옮겨 나눠 마셨다. 어느 날은 궤 밖에 비가 왔는지, 눈이 왔는지 유난히 천장에서 물이 똑똑 떨어지는 날이 있었다. 그럴 때면 어미 새가 물고 온 먹이를 먹으려는 듯, 천장을 향해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그리고 바닥 어딘가 움풀패인 곳에 물이 고여있으면, 짚을 말아 물을 적셔 빨아먹기도 했다.
지금 도엣궤 입구는 당시 사용하던 도자기 조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큰넓궤는 한때 120여 명이 살았을 정도로 큰 동광리의 여섯 번째 마을이었다.
목숨을 건 대이동
큰넓궤에 숨어 지내던 어느 날 주민 한 명이 토벌대에 발각되어 잡혔다. 토벌대는 ‘같이 숨어 있던 주민이 있는 곳을 말하면 살려준다’라고 회유했다. 주민은 순간 많이 고민했지만, 어쩔 수 없이 토벌대 회유에 넘어갔다.
토벌대는 주민을 앞세워 큰넓궤로 갔다. 토벌대가 궤 입구로 들어서자, 잡힌 주민은 숨어 있던 주민에게 ‘토벌대가 왔으니 안으로 더 들어가라’라고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본인도 재빨리 궤 안으로 들어갔다.
궤 안에 있던 주민은 밖에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이불처럼 탈 것들을 모아 고춧가루를 뿌려 태웠다. 그리고 푸는체(키)로 부쳐 매운 연기를 궤 밖으로 보냈다. 궤 구조를 모르는 토벌대는 길잡이 하던 주민이 사라지기도 했지만, 매운 연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갈 엄두를 못 냈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토벌대는 인근에서 큰 돌들을 옮겨와 궤 입구를 막았다. 그리고 내일 반드시 복수할 것을 다짐하며 하산했다.
다행히 궤 밖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주민이 있었다. 그는 빨리 돌무더기를 치웠다. 그리고 궤 안 사람들에게 내일이면 토벌대가 다시 올라올 테니 빨리 도망치라고 했다. 갑자기 궤 밖으로 나온 주민은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두 마을 주민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삼밧구석 주민은 한라산 영실로, 무등이왓 주민은 인근 오름으로 다시 숨을 곳을 찾아갔다.
삼밧구석 주민은 깜깜한 밤, 웬만한 아이들 키 높이까지 덮인 눈을 헤치며 한라산으로 무작정 오르기 시작했다. 한겨울 한라산 추위는 말도 못 한다. 오랫동안 궤에서 생활했던 주민은 제대로 먹지 못해 기력이 없었다. 그들에게 혹독한 추위를 이긴다는 것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기력도 기력이지만 먼 거리 눈 덮인 산행을 하기는 복장이 너무 어설펐다. 짚신을 신은 사람은 이미 발이 얼어서, 짚신이 벗겨진 것도 모른 채 걸었다. 눈길에 젖고 바닥에 긁혀서 해진 버선도 발목 부분만 남았다.
그렇게 밤새 꼬박 걸어 아침이 밝아올 때쯤, 해발 1,300m가 넘는 한라산 영실 부근 볼레오름에 도착했다. 큰넓궤와 달리 두 번째 피신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미 한 차례 발각이 된 탓에 다시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왜냐하면 눈 덮인 산을 오르면 발자국을 아무리 잘 정리한다고 해도 흔적이 남는다. 결국 삼밧구석 주민은 영실 인근에서 모두 토벌대에 붙잡혀 총살되거나, 서귀포 단추 공장으로 끌려갔다. 그 후 정방폭포에서 학살됐다.
반면 인근 오름에 숨었던 무등이왓 주민은 삼밧구석 주민보다 더 오랫동안 숨어지냈다. 이들은 이듬해 3월 선무공작 때 한라산에서 내려와 서귀포 농회창고로 끌려가 구금 생활을 했다. 토벌대에 불탄 삼밧구석 마을과 무등이왓 마을은, 4·3이 끝나고 재건되지 못해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작가 생각
큰넓궤 옆 작은 공터가 있다. 반듯한 돌에 앉자 잠시 그때를 생각해 봤다. 토벌대에 발각되어 한밤 중 다른 은신처를 찾으러 나갈 때, 살을 찢을 것 같은 중산간 찬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지금처럼 방한복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방한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 먼 거리를 아이들 손잡고 이동했다는 것은 절박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조금만 더 멀리 갔으면 안 잡혔을 텐데, 조금만 더 높이 올라갔으면 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오직 생(生)만 생각하고 사(死)는 버렸을 주민의 대이동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도 두 딸이 있지만 절박한 환경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감사하게 생각한다.
큰넓궤 공터에 앉아 있으니 불어오는 잔잔한 바람이 너무 좋다. 2일 차 일정은 큰넓궤에서 마무리했다. 공항 도착 시간이 문제다. 제주 시내로 들어가는 도로는 항상 밀렸다. 그래서 렌터카도 반납하고 조금 일찍 공항에 도착해 있으려고 했다. 가는 길에 섯알오름에서 학살당한 희생자들이 묻혀 있는 만벵디 공동장지가 있어 잠시 들렀다가 가야겠다. 다음 일정은 또 언제 잡힐지 기대된다.
[ 큰넓궤 유적지 정보 ]
주소 l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산90
문의 l 제주특별자치도청 4·3 지원과 064-710-8452
기타 l 주차장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