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멀지 않고, 두렵지 않다
우리는 종종 일어나지 않을 일들에는 온갖 신경을 쓰고 걱정을 하면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죽음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본인이나 주변 사람의 죽음이 아주 근접한 상황에 놓이지 않는 이상,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하여 사색하고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더 자주 생각하고 대화해야 하는 이유는
1. 갑작스러운 누군가(나를 포함한)의 죽음에 대비하고,
2. 죽음을 통해 삶을 이해하여 현재를 가치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일까?
우선 죽음이 나와는 무관한 무엇이 아닌 항상 내 삶에 도사리고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수면은 죽음의 예행연습이라고도 한다. 우리는 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졸리면 자야 하는 게 인간의 숙명이고,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면 죽어야 하는 게 인간의 숙명이다.
의식의 부재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수면과 죽음이,
단지 모든 생체 반응을 멈추는 것 외엔 동일하다고 간주한다면
그렇게 생각한다면, 죽음이 나와는 관계없는 무언가가 아닌
나와 함께 삶을 살아가야 할 자연스러운 내 삶의 동반자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죽음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죽음이 두려운 이유에 대해 먼저 알아보자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죽음의 순간에 느끼게 될 '고통'과 죽음 이후에 내가 겪게 될 '상실'이 그것이다.
고통
죽음은 누구나 반드시 겪게 될 수밖에 없으며, 그 시기가 제각각 다르고 알 수 없을 뿐이다.
피할 수 없다고 하여 '언제'가 될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고통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물의 깊이를 알지 못한다고 하여 옆에 있는 돌다리를 외면하고 백날 돌멩이를 던져 보았자 물의 깊이도 알 수 없을뿐더러 그 돌멩이로는 다리를 만들 수 없다.
상실
상실에 대해서는 내가 감히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으며 그럴 자격도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렇듯 나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죽음으로 인해 '상실하게 될 것'이 과연 현재 두려움의 대상이 될 필요가 있을 정도로
사후 세계에서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제기할 수 있다.
내가 죽게 된다면, 나의 육신과 내가 가진 모든 물질적인 것들(돈, 권력, 아끼는 옷, 책 등)은
모든 만물이 그렇듯 자연으로 돌아가 순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이 영혼은 그것이 성불을 할지,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 고행을 하게 될지,
무의 상태로 돌아가게 될지는 그 누구도 알 길이 없다.
만약 내 영혼이 물질적인 것들과 동일하게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한다면,
과연 사라질 것에 대해 지금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반면, 내 영혼이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존재하게 된다면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의 근원이 되는 물질세계, 인간 세상의 속박에서 벗어난 그 영혼을
고통과 속박 안에 있는 현재의 내가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그럴 필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본인만의 가치관을 정립하여도
갑작스러운 누군가의 죽음에 큰 슬픔과 절망이 차지하게 될 자리를 빼앗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 죽음을 받아들이고 건강한 방법으로 슬퍼하기 위해서
죽음에 대한 가치관의 뿌리를 단단하게 내려둘 필요가 있다.
또한 이러한 죽음에 대한 가치관은 현재를 살아가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언젠가 겪게 될 죽음을 받아들이고 삶이 무한하지 않음을 이해함으로써
삶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고, 지금 집중해야 할 것을 구분할 수 있으며
현재를 더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비하고, 현재를 가치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
죽음을 나와는 무관한, 두려운 무언가가 아닌
이해하고 사랑해야 할 내 삶의 영원한 친구로 생각하고 함께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