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8) 가스라이팅 The End

단단한 자아 성장기 (2015~2018)

by 아남과소년

들이받고 한수 접은 후로 그와 엮여 있던 업무는 대략 3개월이 지나 일단락이 났다.


곧이어 조직장은 나를 특정 해외 자산 투자를 검토하는 TF 조직에 단기 파견을 보냈다.

조직장은 지난 2년 간 내가 일에 부딪히고 보는 성향이나, 분석적인 사고방식을 좋게 보시고, 역량 성장의 기회로 TF에 나를 추천한 것이다.

TF 조직에는 재무, 전략, 기술, 사업 각 조직에서 출중하신 분들이 단기 발령으로 모였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과부장급 연차였기에 3년 차 쫄병 김지훈은 행동 거지를 잔뜩 조심하였다. 또 다른 잠재적 포식자(제 2의 K과장)가 없는지 예의 주시하는 미어캣이었다.


그러나, 미어캣의 우려는 무색하게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은 인품도 훌륭했다.

TF라는 특수 조직은 각기 다른 조직에서 필요한 기능 별로 인원을 모아 공동의 목표만 정해져 있는 단기 집합이다 보니,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정교하게 짜인 수직적 업무 체계보다는 개방적이고 빠른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했고, 각자가 자율적으로 일을 찾아 수행하고 보고했다.

자유로운 의견피력이 가능한 분위기에서 나는 더 이상 눈치를 보느라 펼치고 싶었던 주장과 의견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나는 물 만난 고기와 같았다. 그동안 고려해야 할 수많은 사방의 가림막들이 없었기에 능동적으로 TF의 목표 실행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자산 분석과 리서치를 수행하였다. 매일 자신에 대한 효능감을 느끼며 업무에 몰입할 수 있었다.

또한, 이 기간 회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걷어졌다. 이전에는 회사라는 거대 시스템이 언제나 나를 모니터링하고 평가하고 있다는 압박을 느껴 왔는데, 경험이 풍부한 선배들의 조직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시각들을 접하게 되며 회사와 내가 공생관계임을 배웠다.


'아 나도 존중을 받을 수 있는 것이었구나.. 상시 대체 가능한 조직의 단순 부품이 아니었구나.'


비로소 K과장이 지난 2년 간 공들여 세운 가두리 양식장이 와르르 무너지며, 가스라이팅의 늪에서 완전히 탈출하였다.



대략 반년 간의 TF 기간을 거쳐 최종 보고를 마치고 다시 원 조직에 복귀하였는데, 다시 부여받은 업무는 독립적으로 일을 수행하는 분야였다.


자연스럽게 나는 K과장의 손아귀에서 점점 멀어져 갔으며, 회사생활 만족도는 점점 개선되었다.

반대로, K과장은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나의 모습이 적잖이 아니꼬웠다.

그는 내가 야근으로 갈아 넣은 업무 결과를 받으면, 아주 깔끔하게 오려 자신의 성과로 치환해 내는 재주꾼이었는데, 이제는 다 된 밥이 자신에게 오지 않아 가로챔의 즐거움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K과장이 어망을 들고 진지하게 나를 찾아왔다.

다시금 원대한 가두리 양식장을 세우겠다는 제국 건설의 열망이 그득한 눈빛이었다.


"김지훈, 잠깐 얘기 좀 하자?"

"네. 어디서 얘기할까요?"

"저기 빈 회의실로 좀 올래?"


그의 계획이 눈에 보인다. 맛있게 익은 흰쌀밥에 혹여 쌀벌레는 없을지 솥 안에 탄 밥은 없을지 살펴봐야 하니 자신에게 보고를 거치라고 하겠지.

내가 수행하고 있던 업무는 기술과 재무를 종합한 모델링 분석이었는데, 그의 직무 경험과 역량과는 전혀 다른 분야였기에 피드백을 줄 수 없는 분야였고 조직장이 둘을 묶지도 않았다.


그를 좇아 회의실로 들어가는 나는 이제는 도축장으로 질질 묶여 끌려가는 예전의 그 가축이 아니었다.

대신 권투 글러브를 양손에 끼고 링에 올라가는 대전자였다.

회의실 문이 닫히고 그와 생생한 격투가 시작되었다.


"앉아봐." → 링의 벨이 울렸다. 그는 10초가량 정적으로 무게를 잡으며, 가져온 어망을 바닥에 펼친다.

"너 요즘 무슨 일 하냐?" → 주도권을 잡기 위한 그의 오프닝 질문이다.

"재무재무와 기술기술을 종합하여 분석분석하고 있습니다" → 그의 질문이 내가 정말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의중을 미리 파악하고 싶지 않아 표면적으로 성실히 답변한다.

"지금 대답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니 사수인데 나한테 보고 해야 하지 않아?" → 1차 잽이 날라온다.

"아 서면 보고할 때 메일에 항상 과장님 참조로 넣어드렸는데 혹시 못 보셨어요? 제가 다시 전달드릴까요?" → 잽을 회피하며 나도 얄미운 잽을 날린다. 아프진 않은데 코끝을 스쳐서 기분 나쁜 그런 잽이다. 얄미운 모습을 더욱 연출하기 위해 노트북을 가져오려는 듯 엉덩이를 뗀다.

"야. 그렇게 참조로 메일 띡 보내면 내가 이해를 하냐? 와서 설명을 해야 될 것 아니야!" → 언성이 높아졌다. 나의 얄미운 잽에 화가 난 그는 스트레이트를 날린다.

"제가 그래서 업무 과정 협업부터 이해하실 수 있도록 모든 메일에 다 참조로 넣어드렸습니다. 말씀 없으셔서 다 인지하고 계신 줄 알았죠." → 스트레이트를 방어하고, 또다시 얄미운 잽을 뻗어 그의 코 끝을 찌른다.

"...." → 그가 코끝이 시려 머뭇한다.

"...." → 나는 그런 그를 보고 멀찍이 서서 휴식을 취한다.

"너, 나랑 말 장난하냐?" → 자신한테 직접 찾아와 세세하게 보고하고 떠먹여 달라는 그의 지시사항을 계속해서 튕겨내는 나에게 짜증이 올라왔을 게다. 강압적인 눈빛으로 훅을 날린다.

"...." → 바디에 꽂힌 그의 훅에 나의 감정도 서서히 끓어오르며 오른손 스트레이트를 준비한다..

"저는 지금 뭐가 잘못되어서 이렇게 따로 야단을 맞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 내가 당신에게 보고해야 할 합리적이고 타당한 사유를 못 찾겠는데? 나도 언성을 높이며 스트레이트를 날린다.

"하... 진짜 이게 많이 컸네..." → 그의 얼굴이 지난 연재에서 저녁식사로 내가 들이받았을 때와 같이 새하얗게 창백해진다. 그에게 그로기가 왔다.


나는 그의 그로기 상태에 굳이 흥분하지 않고 차분히 기다린다. 거의 5분간의 정적이 흐르고, 나는 의자를 돌려 앉아 벽을 쳐다보고 있고, 그 또한 허공을 계속 쳐다본다.


나는 더 이상 진도 없는 링 위 경기에, 오늘의 업무를 마무리하면 시간도 없는데 대전을 마쳐야겠다고 결정 내린다. 그에게 정타 잽을 다시 한번 꽂으며 글러브를 벗어 바닥에 던졌다.

"과장님, 앞으로는 모든 참조 메일을 송부하면 인지하실 수 있게 메일 참조 드렸다고 직접 찾아가 알림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세세히 보고하지 않겠다. 오로지 알림뿐이다로 못 박으며 회의실 문을 열고 나간다.

그리고 이내 다시 돌아서서 들어와 한번 더 쐐기를 박는다.

"아. 지금 제 태도 보고 듣고 싶으실 것 같아서요. 죄.송.합.니.다. 수고하십쇼."

120도로 고개를 힘차게 숙여 인사한 후 문을 닫고 나간다.


그의 야심 찬 어망과 가두리 양식장 재건 계획은 무참히 끝이 났다.

가스라이팅을 벗어난 하룻강아지의 전투력을 확인한 K과장은 그 이후 재경기를 제안하지 않았고,

나의 회사생활에 있어 그는 더 이상 큰 고려 요소가 되지 않았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이 가스라이팅의 시작은 K과장의 재주도 있었으나, 본질적인 원인은 나에게 있었지 싶다. 내가 시작부터 스스로 나라는 존재를 회사 안의 최약자로 정의하였고, 그 캐릭터에 내가 과잉 몰입하였다. 유명 대배우들이 자주 하는 언급 중에 영화 캐릭터에 몰입하다 보면, 어느 순간 본래의 자신을 잃어버리고, 자아와 인격이 그 캐릭터로 변질되어 있다고 하는데, 나 또한 약자 캐릭터에 완전히 동화되어 나를 몰아세웠던 듯하다.


현재의 나는 나를 외부 환경에 맞추어 정의하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

나의 자아는 단단하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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