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힌 신념
나는 몸도 약하고 마음도 약하다. 나의 이런 연약함을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여겼다. 특히 내 안의 연약한 그림자를 숨기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강한 사람이고 싶었고 그래서 나의 이상은 늘 여전사 같은 사람이었다. 어릴 땐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해서 스스로를 강인한 여전사로 생각하기도 했다. 계속 강한 척을 하다가 어느 시점에서 완전히 무너졌고 그때 나는 내가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처음엔 내가 이토록 연약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무척이나 좌절스러웠지만 이 또한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됐다.
내가 완전히 망가졌을 때 나는 두려움에 가득 찬 채로 의사 선생님에게 말했다. 다시 괜찮아진다고 하더라도 또 무너지는게 무서워요. 의사 선생님은 내게 차분하게 말했다. 일어나는 경험이 생기면 나중에 또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길 거예요.
나는 무너졌지만 다시 일어났고, 의사 선생님의 말대로 한 번 일어난 경험은 내가 다시 무너지더라도 일어날 것이라는 자신감과 확신을 주었다. 그런 신념은 나에게 강함이 되었다. 뒤집힌 신념은 나라는 사람 자체를 뒤집어 놓았다. 나는 카드를 뒤집듯이 나의 신념들을 하나씩 하나씩 뒤집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나를 사랑받지 못했다고 여겼다. 어리고 여린 딸 옆에 충분히 머무르지 못한 엄마를, 존재만으로 사랑스럽다고 표현해주지 못한 엄마를, 주기적으로 딸 앞에서 맹렬한 전쟁을 치러서 불안함을 심어준 나의 부모를 원망했다. 어린아이가 받은 상처와 원망은 언젠가 나에게서 도망가주길 바랐지만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를 더 강하게 옥죄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은 불건강한 신념이 되어 무의식 깊이 자리를 잡았다. 생각의 중심, 존재의 중심이 되어 인생 전체를 좌지우지했다.
나의 빛은 엄마의 사랑이었고, 나의 그림자는 엄마의 상처였다. 나는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딸인 나는 점점 더 불행해졌다. 어른이 되도 ‘나’라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가 차마 하지 못했던 마음 속 말을 써내려가본다. 엄마, 내가 원했던 건 그저 엄마가 내 옆에 있어주는 거였어. 그리고 내가 상장을 가져가지 않아도 나에게 웃어주고 나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봐주는 거였어. 엄마랑 아빠의 싸움이 끝나면 놀란 나를 안아주면서 나를 안심시켜주길 바랐어. 그래, 그게 어렸던 내가 바란 전부였어.
세월이 흘러 내 나이가 그 시절 엄마의 나이와 비슷해지면서 원망은 서서히 이해로 변했다. 우린 가족이지만 너무나도 달랐고, 그 시절의 나는 어른을 이해하기엔 많이 어렸다.
엄마의 사랑 방식은 책임감이었다. 엄마는 27살이란 나이에 ‘엄마’가 되었고 자신의 가게를 시작했다. 엄마는 나뿐만이 아니라 가족의 많은 부분을 책임졌다. 엄마가 되고 자신의 가게를 시작하며 가족의 많은 부분을 책임지기에 27살이란 나이는 어렸다. 옆에 늘 엄마가 붙어있고 엄마의 케어를 받은 다른 친구들이 부러웠고, 그들 앞에서 나는 너무 작아지고 슬퍼졌다. 학교나 학원에 할머니나 아빠가 오는게 창피했다. 내가 다른 친구들을 보며 부러워하고 스스로 작아지는 동안 엄마는 나를 부족함 없이 키우기 위해 삶의 현장에서 고군분투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말 그대로 뼈빠지게 일했다. 그 결과 어린 시절 나는 정서적으론 잔뜩 허기지지만 경제적으론 풍족하게 자랐다. 교육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어렸던 엄마의 좌절과 슬픔은 도리어 나에게 풍요로운 교육적 혜택을 주었다.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자신과 같은 좌절과 슬픔을 겪지 않길 바랐던 것 아닐까. 가게가 어려워졌을 때 엄마는 빚을 내서라도 나를 교육시켰다.
나는 엄마의 다른 자아였고 엄마는 다른 자아에게 자신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헌신했다. 엄마의 어리고 서투른 사랑이었노라 생각한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니까. 그리고 나는 엄마의 첫아이이자 첫사랑이기에. 엄마는 표현에 서투른 사람이지만 나는 이제 엄마가 나를 어마어마하게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 너무 아파서 와달라는 나의 전화에 엄마가 한겨울에 헐레벌떡 내가 일하던 호텔로 달려온 날이 있었다. 나는 급하게 응급실로 갔고 엄마는 병상에 누워있는 나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묵묵히 나의 손을 잡을 때 엄마의 온기가 느껴졌다. 아,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한때 내가 엄마의 그림자 같아서 갑갑해서 미칠 것 같았지만 나는 결국 필연적으로 나의 길을 걸어가게 됐다. 그리고 어느 순간 엄마도 엄마 생각대로 사는 것을 나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엄마의 반대로 문예창작과를 포기하고 경영학과를 나와 회사에 들어갔지만 결국 이도저도 못하고 아무것도 못하게 된 딸을 보며 마음 내려놓았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