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날수록 반짝이가 좋아진다

나이 때문만은 아니야

by 밤버울



나는 평소 검은색이나 어두운 계열 옷을 즐겨 입는다.

밝은 옷을 언제 입었나 떠올리려면 한참 고민해야 할 정도다.


하지만 이렇게 무채색이고 어두운 옷만 입던 내가 반짝이가 좋아진다는 사실을 이젠 부정할 수 없다.


내 주변에 점점 늘어가는 반짝이 아이템들이 그 증거였다.




크리스털 모양으로 만든 무드등.

프리즘처럼 무지개 빛을 뽐내는 무드등.

네일아트도 하지 않으면서 사 모은 반짝이 글리터.


IMG_1932.jpeg 강한 조명 아래서 휘적여 보면 그 영롱함이 대단하다


특히나 의욕을 잃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밤.

방 안의 불을 끄고 살짝 켠 무드등은 조용한 위안이 되어주었다.

잔잔하지만 템포가 살아있는 재즈 플레이리스트와

제각각으로 빛나는 조명을 보고 있으면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갔다.



시나브로 반짝이를 향한 나의 애정은 커져만 갔다.

분명 나는 반짝이가 촌스럽고 정신 사납다며 피하던 사람이었는데.


언제부터였을까. 반짝임을 나의 치유 요소로 삼은 건.



산란하는 빛들을 보며 마음의 안정을 느끼기 시작한 건 7~8년 전이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그런 아이템을 모으고 멍하니 쳐다보게 된 건 최근 2~3년이다.


나는 반짝이는 것을 좇아 마음의 안정을 찾아보려 애를 썼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닿은 결론은 ‘현실도피’였다.


내 사주엔 역마살이 끼었는지 회사를 다니면 한 곳에 진득하니 정착하지 못하고 길면 4년, 짧으면 3개월, 한 달 만에 그만두거나 회사를 옮겼다.


옮기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사람이 안 맞거나.

일이 안 맞거나.

건강이 안 좋아졌거나.

세 가지 모두 해당되거나.


격동의 시기를 보내기엔 세상 사람 눈에 나는 늦은 나이였다.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잡고 나만의 기반을 다져가는 게 맞았지만, 나는 항상 틀린 선택을 고수했다.



‘아직 괜찮아’하며 정신 승리를 하는 나날이었다.

겉으로는 정신 승리를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조급함과 불안함이 나를 좀먹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던 차에 유튜브에서 눈이 부시게 반짝이는 윤슬을 보았다.

물결에 따라 흔들리고 반사되는 빛이 아른거리니 절로 마음이 평온해졌다.


바람에 따라 빛나는 윤슬을 바라보며 ‘반짝임’에 매력을 느낀 나는 무채색이던 환경에 반짝이를 더해갔다.


처음엔 글리터에 강한 조명을 비추며 색색깔로 빛나는 아련함을 즐겼다.

그다음에는 글리터가 가득한 휴대폰 케이스와, 부서지듯 빛나는 조명을 사고…



스크린샷 2025-05-19 오후 10.41.47.png 어지럽게 빛이 퍼지는 크리스털 조명. 아름답다.


반짝이를 향한 나의 오타쿠적 집착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크리스마스 땐 트리 워터볼도 사서 한참을 바라보았을 정도니 말이다.


반짝이고 일렁이듯 부서지는 빛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건 아마 내 안정을 위해서일 테지만, 조금 더 이유를 덧붙여 보고 싶다.


그래야 조금 더 나의 정신 승리를 합리화할 수 있지 않을까.


익숙한 빛이 어떤 물체를 만나 산란하게 되는 순간, 원래의 모습과 다른 색과 형태로 바뀐다.

그게 프리즘이 되었건, 눈부신 반짝임이 되었건.


나는 살면서 언제 그렇게 빛이 났을까.

짧다면 짧은 인생을 되돌아봐도 반짝이던 순간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항상 어딘가 부족했고, 성에 차지 않는 것들 뿐이었다.

어쩌면 나는 내가 갖지 못한 걸 조금이라도 맛보기 위해 반짝이에 그렇게 매달리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이렇게 반짝이에 의지해 정신 승리만 할 작정은 아니다.

이렇게 반짝이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약간의 수치와 치유를 동반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앞으로 나는 내가 가진 반짝이들과 함께 현재를 살아볼까.

정신 승리와 합리화로 가득하던 마음이 윤슬처럼 빛나지 않을까.

여태껏 빛나지는 않았어도 앞으로는 빛나지 않을까.




그 정도 기대쯤, 이젠 괜찮지 않을까.





IMG_1951-ezgif.com-video-to-gif-converter.gif 빛을 쏟아 내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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