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먹한 기록.
얼마 전, 엄마가 오래도록 살아오신 집을 정리하게 되었다.
낡은 벽지와 오래된 가전,
서랍 속 깊숙이 잠들어 있던 옛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내다 보니,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낯선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우연히, 어느 상자 속에서
나의 어린 시절 사진 몇 장과 함께
엄마가 써둔 육아일기 한 권을 발견했다.
처음엔 그냥 추억거리 하나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몇 줄을 넘긴 순간,
나는 왜 그동안 이토록 무심했을까,
왜 이제야 이 글들을 들여다보게 되었을까,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노트는 많이 낡아 있었고,
글씨는 군데군데 번져 있었다.
어떤 페이지는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희미했고,
어떤 날은 아예 비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하루를 다 버텨낸 채
기운 없는 손으로 꾹꾹 눌러 쓴 글씨들이었을 것이다.
그 흔적들은 엄마의 아픔이자,
사랑의 증거였다.
"오늘은 월급날이었다.
그러나 거창하게 먹을 수 없어
아이들을 데리고 분식집에 갔다.
크게 못 해줘서 미안했지만,
아이는 불만 없이 잘 먹었다."
짧은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괜히 울컥했다.
그날의 나는 분명,
그저 떡볶이나 순대를 맛있게 먹으며
세상 다 가진 듯 웃고 있었을 것이다.
엄마가 미안해한 마음은 전혀 모르고서.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어릴 적 참 많은 속을 썩였다.
고집을 부리고,
아무 이유 없이 토라지고,
혼자 아프다며 방 안에서 벽을 치고,
세상이 불공평하다며
“왜 나만 이래야 해?”라고 소리치던 아이였다.
그런 내게 엄마는 늘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
‘사랑해’
같은 말을 해주었다.
그 말들이 얼마나 큰 위로였는지,
그때의 나는 전혀 몰랐다.
오히려,
엄마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엄마는 내 편이 아니라고,
엄마는 늘 나를 모른 척한다고
서운해하고,
미워하고,
그래서 자주 울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울고 있었던 건 나만이 아니었다.
엄마도 나 몰래
많이 울었을 것이다.
감춰진 눈물들,
말없이 삼킨 한숨들,
웃고 있는 얼굴 뒤로
묵묵히 견뎌냈을 날들이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엄마의 눈물을 보지 못했다.
엄마의 고단함도,
엄마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
모른 채 살았다.
그게, 가장 미안하다.
엄마의 일기를 통해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묻혀 있던 사랑을 알게 되었다.
매일같이 쓰려 애쓴 그 노트,
비어 있는 날들조차
엄마의 존재를, 그 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뒤늦은 깨달음은
항상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래서 더 선명하고,
그래서 오래도록 남는다.
그 시절 내가 원망했던 모든 날들이
결국, 사랑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된 내가 참 바보 같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를 재우고 난 뒤,
하루를 다 버틴 몸을 이끌고
짧은 메모 한 줄이라도 남기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