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아래꽃]물든 자락 하나

15화. 어쩌면 위로는, 손끝에서 피어났는지도

by 주미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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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볕 좋은 아침.

침선장 월상수는 손에 쥔 서신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붓끝이 반듯하게 그어낸 글씨가 눈에 익었다.

오랜 세월을 곁에서 보아온 그 사람의 글씨였다.



침선장 월상수

그대를 만나 의논할 일이 있으니 즉시 궁으로 들라.



상수는 한숨을 내쉬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웃음을 띠며 방문을 열었다.
방 안에서는 하화가 작은 수틀을 앞에 두고 정성스레 바늘을 옮기고 있었다.


“하화야.”


“네, 아버님.”


하화가 고개를 들며 반가운 얼굴로 미소 지었다.

상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다정하게 말했다.


“입궐해야겠다. 폐하께서 직접 서신을 보내셨구나.”


“폐하께서요?”


“그렇단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곧 돌아올 테니 걱정 말거라.”


하화는 수틀을 조심히 내려놓고 다가가 상수의 도포를 살폈다.


“옷깃이 조금 틀어졌어요. 잠시만요...”


작은 손으로 살며시 도포를 고쳐주는 손길에 상수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


“다녀오십시오, 아버님.”


“그래. 내 딸이 이렇게 정성껏 고쳐준 옷을 입고 가니, 오늘 하루 길~한 기운이 함께하겠구나.”


상수는 머리를 쓰다듬어주듯 하화의 어깨를 살짝 토닥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걸음은 언제나처럼 묵직헀지만, 어쩐지 오늘은 마음 한편에 작은 예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황궁 안으로 들어선 상수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대전 앞 뜨락, 금빛 일렁이는 햇살 속에서도 긴장된 정적이 맴돌았다.

기러기처럼 반듯하게 깔린 석계, 그리고 그 위에 단정히 선 무장들.

바람 한 점 없는 그곳은, 마치 무거운 고요 속에 감정마저 숨죽이는 듯했다.

상수는 가볍게 숨을 고른 뒤,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 부르셨나이까. 침선장 월상수, 폐하의 서신을 받고 입궐하였나이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문득, 어탁 뒤로 앉아 있던 령황제가 손에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았다.

그의 시선은 상수를 보지 않은 채, 멀리 창문 밖 정원으로 향해 있었다.

잔잔한 바람이 창호를 스치며 소리를 내는 가운데, 그의 낮고 지친 음성이 뒤따랐다.


“상수, 왔는가.”


“예, 폐하.”


“황후의 병세가... 날로 약해져 가고 있다. 도제조가 말하길, 약도 기력도 더는 듣질 않는다더구나.”


령황제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 이내 말을 삼키고는 손을 뻗어 곁의 작은 나무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가지런히 접힌 손수건 몇 장이 담겨 있었다.

그 중 하나를 꺼내어 펼쳐든 그의 눈빛에는 묘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이 것들은... 매 시기마다 그 계절의 꽃을 새겨 황후가 항상 나에게 주던것이네. 처음엔 그저 여인의 소일거리려니 했지만... 나중에야 알았다. 그것들이 하루를 버티게 한 정성과 애틋함이었다는 것을.”


잠시 말을 멈추던 령황제는 손수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이윽고 덧붙였다.


“전에 그대가 했던 제안...말이요... 하화. 그 아이를 황후 곁으로 들이면 어떨까...”


상수는 고개를 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예, 폐하. 하화는 비록 나이 어리나, 수만큼은 누구보다 정성과 기를 담아놓는 아이입니다. 황후 마마께 분명 큰 위로가 되실 것입니다.”


령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고개짓에는 단순한 수락 이상의 고민이 서려 있었다.


“내 걱정은... 그 아이 때문이오. 황궁이란 곳이 얼마나 차고 복잡한지, 너무 잘 알지 않소. 게다가...”


그는 손수건을 다시 천천히 접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궁으로 들이면, 그 아이가 감당해야 할 무게가 지금보다도 훨씬 커질것이오.”


“그 점 또한 충분히 염려되는 바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자체가 하화에게도 분명 힘이 될 것입니다.”


령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리고는 작은 숨을 내쉰 뒤 말했다.


“상수, 그대도 좋다면... 그만한 일도 없겠지.. 그대가 얘기를 전해 황후전으로 가게 하시오.”


“예, 폐하.”


상수는 조용히 예를 갖추었다.

령황제는 다시 창밖을 향해 돌아섰다.

한참을 말이 없던 그의 뒷모습은, 무언가 깊은 고민의 그늘 속에 잠긴 듯 묵직했다.


령의 결심에 따라 하화의 입궐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황궁으로 향하는 가마 속, 하화는 손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을 느꼈다.

긴장이 몸 전체로 퍼지고 있었다.

익숙해질 법도 한 궁궐의 풍경이 오늘따라 유난히 낯설고 멀게만 느껴졌다.


자광전과는 사뭇 다른 길.

유화전으로 향하는 길목은 고요하고 정갈한 분위기가 깃들어 있었다.

나무 하나, 돌 하나에도 세심히 손질된 흔적이 엿보였고, 발 아래 깔린 백색 석재는 흙먼지 하나 없이 빛을 머금고 있었다.


하화는 긴장된 숨을 조심스럽게 들이쉬었다.

코끝을 간질이는 건 은은하게 퍼진 약향이었다.

청연한 향기 속에는 인삼과 맥문동, 숙지황의 따스한 냄새가 섞여 있었고, 그 틈에 희미한 연꽃 향이 감돌고 있었다.

생명의 기운을 되살리려는 듯한 향이었다.


유화전 문 앞에 당도하자, 궁녀들이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낮은 문턱을 넘기 직전, 하화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문 너머로는 무겁게 드리운 병풍과, 그 뒤에서 아득히 들려오는 가늘고 메마른 기침 소리가 그녀의 심장을 서서히 죄어왔다.


“들라 하시옵니다.”


궁녀의 말에 하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안으로 발을 들였다.

침전 안은 정숙했고, 햇살조차 은은한 속도로 번지고 있었다.

하화는 황후의 침상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리고 정중히 머리를 숙이며 인사드렸다.


“황후마마를 뵈옵니다. 월가 하화라 하옵니다.”


하화는 조심스럽게 침전으로 발을 들였다.

문 안쪽에는 아까보다 좀 더 진해진 약향이 감돌고 있었고, 햇살은 병풍 너머 희미하게 퍼지며 고요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병풍 안쪽에 놓인 침상 너머로, 병약한 기색이 역력한 황후가 반쯤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녀는 하화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띤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드디어 만나는구나.”


하화는 그 말에 놀란 듯 고개를 들어 황후를 바라보았다.

예상보다 부드러운 말투, 그리고 곱고 단정한 음성이었다.


“어서 오너라. 폐하께서 너에 대해 여러 번 이야기하셨단다. 네가 놓는 수가 아주 곱고 따뜻하다 하시더구나.”


하화는 황후의 목소리에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바닥에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황후마마, 소녀 월가 하화라 하옵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후는 작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이리 와주어 고맙구나. 어려운 결정이었을텐데..”


“이렇게 찾아뵙게 되어, 오히려 소녀가 더 감사드립니다.”


“참 단정하고 예쁜 아이로구나. 그 수가 고왔다고 하더니, 그 말이 허언은 아니었다는게 느껴지는구나.”


“과찬이십니다, 마마.”


“마음이 곧 솜씨지. 수라는 건 마음을 담는 일이니. 나도 얼마전까지는 매 계절마다 손수건에 수를 놓았단다. 계절을 새기듯, 꽃과 새, 바람을 수 놓는 게 참 좋았어.”


“저도... 수를 놓을 때면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어쩐지 다른 세상으로 스며드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요.”


“그래, 누구에게나 그런 시간들이 필요하지... 허나 지금은 몸이 아프다 보니 손에 바늘을 쥐는 일조차 부담이 돼버렸구나.”


황후는 그 말과 함께 자신의 손등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근데 말이다, 이제 네가 함께한다면 내 방에도 다시 봄이 올 것 같구나.”


그 말에 하화는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마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 곁에서 원하시는 것을 놓아드릴것입니다.”


황후는 한층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도 곱게 하는구나. 혹여, 궁에 들어오는 것이 불편하지는 않니?”


하화는 짧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솔직하게 말했다.


“아직은 모든 것이 낯섭니다. 그러나 마마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 말에 황후는 작게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래, 잘 왔다. 너 같은 아이가 내 곁에 있어준다면 참 마음이 든든할 것 같구나.”


“영광입니다, 마마.”


“이름도 예뻐. 월..하화. 달 아래 핀 꽃이라니... 네가 이 정원에 피어날 또 하나의 꽃이 되어주면 좋겠구나.”


그 말에 하화는 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황후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가까이 오거라. 이제부터는 자주 이곳에 머물게 될 테니, 익숙해져야겠지?”


하화는 곧장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황후마마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그 말에 황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꽃이 피는 계절이 오고 있단다. 이제 이 정원에도 다시 바람이 불꺼고, 더 많은 꽃향이 가득해지겠지.”


하화는 그 말에 잠시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황후를 바라보며 작게, 아주 조심스레 웃음을 머금었다.


머칠 후 령황제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새벽빛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시간, 안개처럼 옅은 공기가 궁 안을 감싸고 있었다.

유화전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걸음은 미묘하게 느려졌다.

매일같이 지나가는 전각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이상하게도 가슴 한편이 조용히 긴장되고 있었다.


유화전 앞에 도착하자 방내관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폐하, 황후마마께선 아직 침상에 계시옵니다.”


령은 잠시 문을 바라보다가, 속삭이듯 물었다.


“...그 아이는?”


방내관은 살짝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벌써부터 마마 곁에서 수를 놓고 있더이다. 오늘도 한창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에 령은 눈을 가늘게 뜨며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문을 열게 했다.

문이 열리며, 약향과 함께 고요한 유화전의 내부가 서서히 드러났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창가 곁, 조용히 수틀 앞에 앉아 자수를 놓고 있는 하화의 모습이었다.

햇살이 비스듬히 그녀의 어깨에 내려앉아,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고요하고 단정했다.

그 장면에 령은 잠시 시선을 고정한 채 숨을 멈춘 듯 서 있었다.


그러나 이내 스스로를 다잡듯 시선을 돌리고, 조용히 침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정갈한 기운 속에서, 그는 하화가 아닌 황후를 먼저 마주해야 한다는 걸 늦게나마 떠올렸다.


“오셨습니까, 폐하.”


서희 황후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고운 미소를 지었다.

마른 손끝에 기운은 없었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오랜 품격이 담겨 있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황후."


“덕분에... 전보다 숨결이 조금은 편안해졌습니다. 다만, 아직은 몸이 무거워 폐하께 제대로 인사드리지 못함을... 용서하시옵소서.”


령황제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황후 곁으로 다가섰다.


“괜찮습니다. 말씀만으로도 큰 안심이 됩니다, 황후.”


그의 말투는 평온했지만, 정작 시선은 황후 곁에 앉은 하화를 향해 천천히 옮겨갔다.

한 손에 수틀을 들고 고개를 숙인 하화가 인사를 건냈다.


"폐하, 옥체 만강하시옵니까."


"어... 오랜만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시선은 그녀에게 오래 머물지 못한 채, 이내 황후 쪽으로 다시 돌아갔다.

평소와 달리 어딘가 불안한 듯, 말끝을 머뭇거리며 눈을 피하는 모습이 서희 황후의 눈에 들어왔다.


“하화가 곁에 있을 때면, 잠시나마 고통을 잊을 수 있습니다.”


황후는 하화의 손등에 손을 얹으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아이는 참 조용하면서도 따뜻한 사람이더군요. 말도 곱고, 바늘 솜씨야 더 말할 것도 없고요.”


령은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말문이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황후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아프지만, 특유의 따스한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폐하.”


령황제가 시선을 들었다.


“처음 이 아이를 마주하셨을 때... 그때의 고요함이 지금의 저와 같았는지요?”


말은 조용했지만, 그 안에는 황후가 하화에게 느끼는 따뜻한 마음과, 령에게 은근히 던지는 여유 어린 물음이 담겨 있었다.

령황제는 잠시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황후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하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수실을 가만히 매만지고 있었지만, 어느새 귀까지 붉어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그 역시 고개를 살짝 숙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고요하긴 했습니다. 아주... 깊고.”


그 말은 곧 스쳐 지나갔지만, 황후는 그 말 한 줄에 담긴 감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저 잔잔하게 웃었다.

령황제는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가, 고개를 천천히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엔 분명 익숙지 않은 낯빛이 서려 있었고, 그 긴장된 침묵이 방 안 공기마저 조용히 일렁이게 만들었다.

황후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눈빛을 살짝 내리깔았다.

표면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눈동자엔 사뭇 다른 감정이 일렁였다.


“그렇군요.”


황후는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화는 미묘한 공기의 흐름을 눈치채지 못한 채, 조심스레 다시 수틀 위에 손을 얹으며 자세를 고쳐앉았다.

그제야 령이 조금 숨을 가다듬은 듯 말을 이었다.


“그대 덕분에 황후께서 이렇게 조금씩 안정을 찾고 계시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오.”


그 말에 하화는 황급히 고개를 더 깊이 숙이며 말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황후마마의 크신 은혜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황후는 조용히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그 대답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풍경은 평온해 보였지만, 그녀의 눈길엔 미묘한 잔상이 드리워져 있었다.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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