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그날 노을빛은 유난히 부드러웠다
좁은 골목, 사람들의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난 곳.
령황제는 하화의 어깨를 살짝 감싸안은 채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이윽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까?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그의 말은 차분했지만, 감정은 억누르지 못한 채 미묘하게 떨려 있었다.
그녀는 그의 손길에서 천천히 빠져나오며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폐하 덕분에 무사합니다."
령황제는 그 말을 듣고도 쉽사리 안도의 표정을 짓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살피다, 이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런 자들과 엮이게 된 것입니까..."
"폐하께서 크게 염려하실 일은 아닙니다. 예전, 저들이 시장에서 난동을 부려 일이 좀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저 운이 나쁘게 다시 마주친 것뿐입니다."
“운이 나쁘게!”
령황제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내가 그 자리를 지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순간 멈칫했다.
눈빛엔 억누른 격정이 스치고, 떨리는 숨결이 입가에 걸렸다.
마치 그 끔찍한 상상만으로도 견딜 수 없다는 듯, 목소리가 다시 낮아졌다.
그러다 갑자기, 하화의 양쪽 팔을 단단히 잡아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의 눈빛은 단단히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 안에 스민 떨림은 숨기지 못했다.
“대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었는지, 정녕 모른단 말이오?! 어찌 그리 아무렇지 않게!”
그의 말투는 다그침에 가까웠지만, 목소리 깊은 곳에는 명백한 안타까움과 두려움이 함께 묻어 있었다.
마치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는 그녀를 잃을 뻔했다는 공포에 사로잡힌 듯했다.
순간 하화는 그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며,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떼지 못했다.
그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긴장과 분노, 그 눈빛 속에서 번지는 감정에 하화는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이렇게까지 화가 나신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진심에서 우러났고, 그 말은 마치 조심스레 꺼내든 바늘처럼 령황제의 마음을 찔렀다.
하화의 말에 그는 한순간, 눈을 감았다.
그녀를 향해 쏟아지던 분노가 멈춘 채, 숨이 목에 걸려왔고, 손끝에 힘과 함께 쏟아지듯 들어가던 감정이 천천히 느슨해졌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숨을 깊게 들이쉰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모르겠지. 내가 얼마나... 그 순간 눈앞이 캄캄했는지.”
그의 목소리는 낮고 잠긴 듯했다.
“내가 아니었다면... 그대가 어떤 일을 겪었을지.. 상상조차 하기 조차 싫습니다!”
그 말 끝에서 그의 시선이 흔들렸다.
감정을 애써 누르고 있었지만, 목소리 끝에는 미묘한 떨림이 실려 있었다.
“그대가... 이토록 무방비하게 위험 속에 놓여 있었다는 것 자체가, 나를...”
그의 말 끝이 흐려짐과 함께 얼굴은 조금 굳었고, 시선은 허공만을 향했다.
그토록 단단하던 눈빛도 어딘가 힘이 빠져 있었다.
마치 스스로 꺼내버린 진심이 어딘가 부끄럽고, 또 미련스러운 듯...
곧, 그는 말하지 않은 말을 삼키듯 고개를 돌렸다.
“아.. 아닙니다... 괜한 말을 꺼낸 것 같군요.”
그 말에 담긴 단념 섞인 목소리는, 차라리 자신에게 들려주는 듯했다.
그리고 그제야 하화는 눈앞의 황제가 왜 그렇게 분노에 휩싸였는지를, 왜 자신 앞에서 그토록 흔들렸는지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바로 그때—
“폐하!”
멀리서 운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그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말씀하신대로 저쪽은 모두 정리하였습니다. 오늘은 이만 환궁하시지요.”
하화는 운주의 등장에 깜짝 놀라며 본능적으로 반걸음 물러섰다.
방금 전까지 그와 너무 가까웠던 거리, 손끝에 닿아 있던 온기, 그것들이 한순간에 현실처럼 다가오며 그녀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령황제는 그 반응을 눈치챈 듯했으나, 아무 말 없이 조용히 하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작게 웃었다.
슬픈 듯, 어딘가 허전한 미소였다.
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쉰 뒤, 뒤쪽에서 다가오던 운주를 향해 고개를 살짝 돌렸다.
“아니, 오늘은 좀 더 걷겠다. 그러니 운주 너는 거리를 두어 호위하라.”
운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섰고, 령황제는 다시 고요한 붉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노을빛이 잔잔히 퍼진 하늘 아래,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하화를 바라보았다.
“혹, 그대만 괜찮다면... 잠시 함께 걸으시겠습니까.”
그 목소리는 분명 아까보다 낮고 조심스러웠다.
마치, 강한 척을 모두 내려놓은 진심 어린 한 사람의 청처럼.
하화는 말없이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조용히 그의 발을 따랐다.
어느새 그는 말없이 자신의 걸음을 그녀의 보폭에 맞추었다.
그리고는 바람에 자꾸 흘러내리던 그녀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손으로 감싸 올려, 어깨 위에 조심스레 덮어주었다.
그 움직임에는 말로 대신할 수 없는 다정함과 조심스러움이 서려 있었다.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도성 외곽의 오솔길을 따라 이어지는 흙길은 조용했고, 어디선가 저녁 짐을 싸는 상인의 수레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소리 너머로 펼쳐진 하늘은 붉은 물결을 지나 자줏빛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그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는 나란히 길게 늘어졌다.
령황제는 한 손을 등 뒤에 두고 걸었고, 다른 손으로는 하화가 긴장하지 않도록 천천히 걸음을 맞추며 그녀를 이끌었다.
그의 표정은 처음의 분노가 무색할 만큼 차분해져 있었지만, 어딘가 조심스럽고 어색한 기색도 감돌았다.
그는 몇 차례 입을 열 듯하다가 이내 말없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하화 역시 말을 아끼며 그의 곁을 걸었다.
방금까지의 위협과 긴장이 아직도 완전히 가시지 않았지만, 지금만큼은 그저 그의 옆에서 천천히 걸을 수 있다는 것이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그렇게 얼마간 더 걸었을까.
어둑해지는 노을빛이 하화의 옷자락 끝을 부드럽게 스치던 그 순간, 령황제가 문득 그녀를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까 그놈들이 내뱉은 말은, 부디 마음에 담지 마세요. 하나같이 입에 담을 가치도 없는 말들이었으니.”
뜻밖의 말에 하화는 고개를 들었다.
“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령황제는 잠시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리다, 이내 작게 기침을 하며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아까 그놈이 갑자기 큰소리 칠 때... 그대가 심하게 떨길래... 혹시 그 말들이 마음에 걸렸나 싶어 한 말입니다.”
“아... 그건...”
하화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당황한 듯 두 볼이 붉게 물들었고, 어찌할 바 몰라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닿자, 령은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황제든 백성이든, 양반이든 노비든... 그런 상황에서 두려운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오늘 같은 일은... 누구라도 떨 수밖에 없었던 것이구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도 단단했다.
누군가를 다그치기보다는, 조용히 마음을 감싸주는 듯한 따뜻한 울림이 담겨 있었다.
“더구나... 그 많은 이들 앞에서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들었으니, 여인의 몸으로 감당하기에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그 누구도 그대의 떨림을 나약함이라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더더욱 그렇고.”
하화는 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듯 그를 바라보다, 이내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바람이 노을빛 사이를 지나가듯, 조용히 두 사람 곁을 스쳤다.
그러다 하화가 입을 열었다.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놈들이 칼을 그렇게 들이대는데, 아무렇지 않게 서 계시면... 어떡합니까!”
그녀는 고개를 들며, 약간 울컥한 듯 덧붙였다.
“무사님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정말 위험하실 뻔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더 무서웠습니다.”
령황제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말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 하화의 떨림만을 걱정하던 그였지만, 이제는 도리어 그녀가 자신을 걱정해주는 진심이 느껴졌고, 그 안에 담긴 미묘한 감정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솔직히, 나도 좀 떨렸습니다~ 그리고 잘 모르나본데~! 운주놈 없이도 그정도는 충분히 이길수 있었습니다.”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나온 그의 말이 너무 예상 밖이었기 때문에 하화는 본인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에 힘을 얻은 듯, 령황제는 살짝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다시 말을 덧붙였다.
“사실~ 어릴 적엔 싸움도 제법 했습니다.”
령황제는 괜히 머쓱한 듯 목덜미를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내 옆엔 운주가 있었지요. 아직 황태자가 되기도 전이었는데...”
령은 잠시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저놈한테만은 번번이 졌습니다. 괜히 얼굴만 봐도 억울해질 정도로.”
하화는 령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서 하루는 말이지요, 내가 운주에게 대련을 스무 번도 넘게 신청했었습니다. 질 걸 뻔히 알면서도 말입니다. 한 번만 이기면, 속이 다 시원할 것 같아서요.”
그는 하화의 반응을 살짝 살피더니,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결국 내관들이 나를 들쳐 업고 동궁으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나는 발버둥치며 ‘한 판만 더!’를 외쳤고... 아마 그날 밤, 온 궁에 내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을 겁니다.”
참았던 웃음이 하화의 입꼬리에서 터졌다.
그 미소를 본 령황제도 따라 웃으며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그리고 지금 이 길... 예전에도 혼자 와보곤 했지요. 궁궐 밖과 그리 멀지 않으면서도 가장 조용한 곳이라서요.”
"네?"
그녀의 반응에 령황제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예전에 여기까지 와서 혼자 떡을 사 먹은 적도 있었습니다.”
“폐하께서요?”
하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듯 물었다.
령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말했다.
“그때 떡집 아이가 내게 묻더이다. ‘할아버지 갖다 드리는 거예요?’ 라고~ 혼자 몰래 나오는거라 옷 하나 제대로 챙겨입지 않고 급히 나와 그리 보였었나 봅니다.”
그 말에 하화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날 정말 많이 혼났습니다~ 아마 그날 이후부터였을껍니다. 어딜 가든 운주 녀석이 함께 하던게... 그리고 내가 그놈을 믿기에 아까 그 칼보다 그대 걱정을 먼저 할 수 있었던 겁니다."
아직 완연히 풀리지 않은 긴장으로 살짝은 굳어 있던 하화의 얼굴이 한결 부드러워지고, 입가엔 따뜻한 기색이 퍼졌다.
“폐하께서 그런 농담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화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령황제도 따라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나를 무섭게만 보았던 모양이지요?”
하화는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
“아닙니다. 폐하께서 이렇게 걸음을 나눠주시며 말씀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제겐 평생 잊지 못할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령황제의 걸음이 아주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작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도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