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아래꽃]봉황의 정원

14화. 기척 없는 무게가 어깨에 내려앉을 때

by 주미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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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저 발끝으로 부드럽게 돌을 차며 걸음을 이어갔다.

그 덕에 그의 말은 바람 사이로 묻혀, 결국 그녀의 귀에 닿지 않았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조스레 물었다.


“폐하,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령황제는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지만, 이내 다시 앞을 바라보며 짧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무언가 아쉬운 듯한 기색이 스쳤다.


“아닙니다. 그냥... 바람이 좋아서요. 이 길도 한동안 잊고 지냈던 곳인데.”


하화는 조용히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말이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 낯설거나 불편하지는 않았다.

잠시 바람이 지나며 두 사람 사이를 스쳐갔고, 저 멀리 나뭇잎들이 서로의 어깨를 부드럽게 스치는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왔다.


그때, 령황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요즘... 자주 생각이 많아집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정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쉽게 흩어지지 않았다.

하화는 조용히 입을 다문 채, 그 곁을 걸었다.

그러다 용기를 내듯 조심스레 물었다.


“폐하... 황후 마마의 병세는 조금 나아지셨습니까?”


그 말에 령황제는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듯했지만,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사뭇 달랐다.


“정말 나아지고 있다면...”


령은 시선을 떨구며 말끝을 잠시 삼켰다.


“매일같이 새벽마다, 도제조의 얼굴을 마주하지는 않겠지요.”


억지로 눌러 담은 듯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엔 지친 마음과 놓지 못하는 불안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하화는 그 말이 끝나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딱 한마디로도 알 수 있었다.말없이 걷는 동안, 그의 눈에 비친 노을빛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그 붉은 빛 너머, 떠오르는 건 유화전의 아침 공기였다.


- 유화전


서희 황후의 건강은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매일 아침, 유화전 안에서는 가늘고 메마른 기침 소리가 하루를 여는 첫 소리처럼 들려왔고, 병약한 숨결 사이로 흘러나오는 신음은 궁인들의 발걸음까지 더욱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령황제는 해가 뜨기 전부터 도제조를 불러 황후의 상태를 보고받았고, 책상 위에는 매일같이 전달되는 진맥 기록이 빠짐없이 놓여 있었다.


황후의 건강은 단지 궁 안의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나라의 안녕과도 직결된 중대한 사안이었기에, 그는 단 하루도 소홀할 수 없었다.


도제조는 새벽 공기가 채 걷히기도 전에 유화전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침전 안은 아직 촛불의 잔빛만이 머물고 있었고, 약재와 쑥 냄새가 엷게 퍼져 있었다.

병풍 너머 황후의 침상에는 창백한 비단 이불이 가지런히 덮여 있었고, 그 위로 희미한 그림자처럼 그녀의 앙상한 형체가 드러났다.


그녀의 얼굴은 희고 투명했으며, 눈매와 입술은 힘을 잃은 채 여위어 있었다.

도제조가 조심스레 손목을 짚자, 황후의 손은 깃털처럼 가벼웠고, 손끝에서 전해오는 맥은 마치 바닥을 맴도는 잔물결처럼 불안정하고 흐릿했다.


그는 그동안 수차례 약재를 바꾸고 보약을 지어 보았지만, 황후의 병세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음식을 삼키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고, 밤에는 깊은 잠에 들지 못한 채 몸을 자주 뒤척였다.

잠결에도 고통스러운 신음이 섞여 나왔고, 그때마다 궁녀들은 손끝으로 입을 가리며 황후의 옆자리를 더 조용히 정리했다.


작은 바람결에도 떨릴 듯한 그녀의 숨결은, 보는 이들의 가슴까지 아릿하게 만들어 주었다.

침전 전체에는 늘 조용한 긴장이 감돌았고, 궁인들은 작은 발소리조차 내지 않기 위해 숨을 죽였다.


도제조는 맥 짚기를 마친 뒤 곧장 붓을 들고, 정갈한 글씨로 그날의 경과를 적었다.

그 기록은 즉시 령황제에게 전달되었다.


그가 유화전을 나서는 순간, 병풍 너머에서 다시 한 번 황후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 잔잔한 소리는 고요한 새벽의 침묵보다도 더 날카롭게, 더 뼛속 깊이 파고들었다.


령황제는 매일 그 보고서를 받아들 때마다 두 눈을 감고, 잠시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기곤 했다.

종이를 넘기는 손끝마다 무게가 실렸고, 그 위로 쌓여가는 걱정은 그의 숨결까지 무겁게 만들어 갔다.


또한, 도제조는 황후의 상태를 하루도 빠짐없이 꼼꼼히 기록하여, 그날의 맥상과 증세, 처방 내용까지 정리한 문서를 매일 아침 어전으로 올렸다.

령황제는 그 보고서를 받을 때마다 묵묵히 눈을 내리깔고 긴 시간 검토했다.

그 작은 글자 하나하나마다 황후의 고통이 담겨 있다고 생각되었기에, 그는 어느 문장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병세가 좀처럼 호전되지 않자, 어느 날 아침, 황제는 조용히 도제조를 불러 세웠다.

천천히 두루마리를 말아 올린 그는 손끝에 무게를 실은 채,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도제조 영감. 대체... 어찌하여 황후의 병세는 이리도 나아짐이 없는 것이오.”


마치 자신의 무력함을 자책하는 듯, 담담한 말끝 너머로 억눌린 분노와 슬픔이 스며들었다.

도제조는 깊숙이 머리를 조아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삼가 아뢰옵니다. 황후 마마의 병세는 생각보다 깊고 오래된 뿌리를 지닌 듯하옵니다.

그간 수차례 약재를 달리해보았으나, 맥이 여전히 약하고 기혈의 순환이 흐릿하옵니다.

아마도 타고난 기질이 지나치게 여리셔서, 약을 받아들일 힘조차 부족한 듯 보이옵니다.”


령황제는 눈을 감고 한참을 말이 없었다.

깊은 숨이 가슴을 울리며 나왔다. 이내 고개를 들고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으로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도는 무엇인가.”


도제조는 주름진 손을 모아 붙들며, 말끝을 삼키듯 천천히 대답을 이었다.


“폐하... 지금 황후 마마께 가장 시급한 것은 몸을 살리는 약보다도,

마음을 편안히 하는 안정이라 사료되옵니다.

근심을 멀리하고, 피로를 줄이며, 조용한 곳에서 햇볕과 바람을 쐬며 몸을 쉬게 하시는 것이 가장 큰 치료가 될 수 있사옵니다. 혹여나... 자연의 기운이 흐르는 곳이라면, 더욱 좋을 것이옵니다.”


그 말에 령황제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그 침묵은 오히려 깊은 내면의 갈등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손을 들어 책상 위에 놓인 황후의 진맥서를 다시 펼쳤다. 손끝이 문득 떨렸다.

령황제는 도제조의 말을 신중하게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화전 주변을 다시 손보게 하라. 더 밝고 따뜻한 기운이 감돌 수 있도록. 황후가 마주하는 창밖 풍경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어야 하니.”


곧 황궁 안은 분주해졌다.

본래부터 정갈하고 아름답던 연화전 주변은 더욱 정성스러운 손길로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고운 돌을 다시 고르고, 연못 가장자리에 색색의 수생 식물이 추가되었으며, 가늘게 흐르는 물길엔 작은 물고기 떼가 풀려났다.

오래된 화초는 제자리를 지켰고, 그 틈 사이로 향기로운 계절꽃이 새로이 심어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잎사귀들이 부드럽게 흔들리며, 햇살은 나무 사이를 스치듯 내려앉았다.


궁녀들과 내시들은 황후전 앞을 조심스럽고도 빠르게 오갔고, 단장에 참여한 장인들의 손끝에도 정중함이 어려 있었다.


그 소란은 곧 침전 안에도 전해졌다.

창호 밖을 바라보던 서희 황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이리 소란스러우니.”


그녀의 부름에, 곁을 지키던 근시 궁녀 ‘담영’이 잰걸음으로 다가와 말했다.


“마마, 황제 폐하께서 연화전 주변을 모두 새로 단장하라 하셨습니다! 정원을 새로 가꾸고, 연못에도 물을 채우고, 향나무와 복숭아나무까지 심는답니다!”


“폐하께서... 그러신다 하셨느냐.”


“그럼요, 마마! 황후 마마께서 매일 밖을 내다보시는 것을 아시고는... 밝고 따뜻한 기운이 드는 풍경을 만들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부디, 기운 내시고 어서 일어나셔야지요. 마마의 웃는 얼굴을 뵙고 싶다 하셨습니다.”


담영의 말에는 눈물 섞인 기쁨이 묻어 있었다.

황후를 아끼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오랫동안 그녀를 곁에서 모셔온 사람으로서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서희 황후는 순간 창호 너머의 소란을 다시 바라보았다. 아직 힘겨운 몸이지만, 마음 어딘가가 조용히 데워지는 듯했다.


그녀는 창백한 입술을 열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여전히... 지나치게 다정하신 분이시지요.”


그러나 말끝은 어딘지 모르게 부드러웠다.

그 따뜻한 다정함은 그녀의 눈가에 아주 미세한 기운을 띠게 했다.


어느 날 오후, 령황제는 조용히 방 안을 거닐다가 창가 쪽에 머물렀다.

창 너머로 보이는 연화전의 정원에는 은은한 바람이 불어왔고, 바람결에 흔들리는 꽃가지들이 햇살 속에서 부드럽게 출렁였다.


그 풍경을 잠시 바라보던 그의 시선은 문득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손수건으로 옮겨졌다.

사계절의 꽃을 수놓은 손수건. 황후가 계절마다 손수 수를 놓아 그에게 건넸던 것들이었다.

하나는 국화, 하나는 매화, 또 하나는 자그마한 나비들.

그 속에는 황후의 섬세한 손길과 한없는 정성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조용히 손수건을 들었다.

가벼운 천 너머로 그녀의 바느질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다.

이 정성과 마음을 어찌하면 위로로 돌려줄 수 있을까.

마음 깊은 곳에서, 황후가 단지 약으로는 나아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또다시 솟구쳤다.


‘위로란... 무엇으로도 대신하기 어려운 것이지.’


그때 떠오른 것은, 누군가의 자수였다.

실로 그려낸 꽃, 풀, 새, 별, 바람.

그 손끝에서 피어났던, 단순한 솜씨를 넘어선 어떤 ‘마음의 결’ 같은 무늬들이었다.


그녀는 묘한 존재였다.

궁 밖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늘 조심스러우면서도 분명한 빛을 지니고 있었다.

수의 한 땀 한 땀이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했고, 그것은 지금 황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령황제의 마음을 조용히 두드렸다.


그러나 이내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황궁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정치와 예법, 말 한마디에도 무게가 실리는 곳.

순수한 여인이 감당하기엔 너무도 복잡하고 날선 기운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품고 있는 감정의 깊이를 알고 있었다.

그것이 곧 황후에게 ‘위로가 되기 위해’ 하화를 궁으로 부른다는 결정에 더 큰 무게로 작용했다.


‘그 아이를 궁으로 부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그는 답 없이 창호를 열었다.

신선한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묵직한 채였다.

연화전의 풍경도, 흔들리는 나뭇잎의 소리도 그를 달래지 못했다.

그저 창밖 멀리 바라보며, 조용히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그 아이가, 황후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선 다른 울림이 번졌다.

그 손끝이 위로하길 바라는 마음은, 어쩌면 황후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무겁게 드리운 이 모든 책임과 혼란 속에서,


그녀의 수가...

그녀라는 존재가, 자신에게도 조용히 손을 내밀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채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마음속엔 아직 걷히지 않은 안개처럼, 명분과 감정이 엉켜 있었다.

그녀를 황후 곁으로 들이는 것이 정말 황후를 위한 일인지,

혹은... 그녀를 가까이 두고 싶은 자신만의 마음은 아닌지.


잠시 후, 그는 조용히 붓을 들어 서신을 한 장 써내려갔다.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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