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아래꽃]연지 없는 붉음

16화. 가장 깊은 진심은 때로 가장 조용하다

by 주미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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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전의 문이 천천히 닫혔다.

단단한 문짝이 닿는 소리와 함께, 그의 안에 소용돌이치던 감정 또한 조용히 문 뒤로 밀려났다.


령은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방금 전까지의 대화, 황후의 미소, 그리고...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 아이의 잔잔한 숨결이, 이상하게도 마음에 맴돌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연한 회색빛 구름이 멀게 흘러가고 있었고, 바람은 한낮의 햇살에 데운 대지 위를 미끄러지듯 스쳐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 속에는 묘하게도 하화의 향이 묻어나는 것만 같았다.


령황제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이내, 한 발자국 물러서며 속으로 깊이 침잠했다.


‘왜 이러는 것이냐...’


속으로 내뱉은 혼잣말은 차갑고 선명했다.


‘왜 또...’


그는 방금 전, 황후와의 대화 중 말끝이 떨린 자신의 목소리와, 무심코 하화를 바라보다 놀라듯 눈을 피한 순간을 또렷이 떠올렸다.

그 모든 장면이 그의 자존심과 이성의 틈을 건드리듯, 부끄럽게 되풀이되었다.


‘나는 황제다. 나라의 근심 앞에 내 마음 따위...’


그는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의 망토 끝자락을 스치며 지나간 바람은 아직 유화전의 향을 머금고 있었고, 그 바람 끝에 닿은 그의 심장은, 여전히 조용하지 않았다.


령이 돌아간 뒤, 하화도 자리를 정리하고 조용히 유화전을 나섰다.

그제야 방 안은 다시 고요를 되찾았고, 서희 황후는 침상에 기대어 천천히 숨을 고르며 생각에 잠겼다.


방 안에 남은 은은한 약향과 함께, 조금 전까지 머물던 기척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듯 맴돌았다.


황제와 하화, 그리고 자신.

세 사람 사이에 스쳐 지나간 작은 흐름 하나하나가 조용히 마음을 두드렸다.


'폐하의 눈이... 흔들렸다.'


서희 황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방금 전, 하화에게 말을 건넬 때의 폐하의 모습.


예전과 달랐다.

그는 늘 침착하고 명확한 사람이었지만, 방금 전에는 뭔가를 숨기듯 말을 아끼고,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말끝마다 불안이 서려 있었다.


"하화가 있을 때마다 저리도 말을 더듬으시다니..."


서희 황후는 그 말을 혼잣말처럼 뱉고는 다시 침묵에 잠겼다.

그녀는 감정에 휘둘릴 만큼 어리거나, 경솔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 조심스럽고, 더 예민하게 바라보았다.


하화가 폐하의 신뢰를 얻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허나, 그것이 단지 재능과 성실함 때문인지, 혹은 그 이상인지를 구분짓는 건 여전히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어떤 감정이든, 상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흐름으로 전해진다는 것을.


'혹여, 폐하의 마음이 그 아이를 향하고 있다면...'


그녀는 자신이 그 감정을 탓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뜻대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니...

하지만 그 감정이, 훗날 황궁의 안정을 흔들 수 있다면 그건 황후로서 외면할 수 없는 문제였다.


"잠시 기대는 바위일 줄 알았건만, 그곳에 뿌리를 내리는 집이라 여길까.. 걱정이로구나..."


서희 황후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그림자가 깃들어 있었다.


감정이 아닌, 책임으로 보는 눈.

아픔을 가져도, 병약하다 하여도 결국 그녀는 연제국의 제1황후였다.


그리고, 황제의 곁에 있는 사람으로서 그의 모든 관계와 감정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지켜볼 의무가 있었다.


"신중하게 보아야겠구나."


마치 스스로에게 명령하듯, 그렇게 중얼이며 그녀는 다시금 눈을 감았다.

긴 숨을 들이쉬자, 방을 가득 채웠던 약향이 서늘하게 폐를 스쳤다.

그 향처럼, 그녀의 마음도 깊고 단단했다.


며칠후 황궁의 한적한 정원.


가을이 깊어질수록 나뭇잎들은 점점 더 붉어졌고, 그 사이사이로 피어난 가을 국화는 은은한 향을 내뿜었다.

바람은 나뭇가지 사이로 고요히 흐르며, 때때로 떨어지는 단풍잎은 작은 물결처럼 땅 위를 스쳤다.


연못가의 돌길을 따라 령황제와 서희 황후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황후는 황제의 팔에 살며시 팔을 얹고 있었고, 두 사람의 걸음은 오래된 한 폭의 그림처럼 고요했다.


"올해 마지막 연회는 장락전에서 열릴 예정이오. 외빈들도 오게 될 테니, 황복도 새로 준비하려 하오."


령황제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황후는 잠시 걸음을 멈춰 바람에 나부끼는 감잎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벌써 그때가 다가왔군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황실의 색도 계절과 닮아가듯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단풍처럼 더 짙고, 깊어지는 색으로요."


"그래서 수방에 일러 상수에게 맡기려 하오. 그리고 이번엔 황후의 의복과 함께 짓게 할 생각이오."


"참이십니까? 그럼 그 아이도 함께 해주면 좋겠습니다."


황후의 시선이 령을 향하지 않아도, 말하는 투에는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이 담겨 있었다.


"혹..."


"예. 그 아이의 수는 단순히 손의 솜씨를 넘어선 위로와 같지 않습니까. 어쩐지... 이번에 열릴 연회의 정갈함에, 그 아이의 온기가 어우러진다면 더없이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령황제는 잠시 눈을 내리깔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고개를 살짝 들어, 투명하게 물든 연못 너머로 황후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나도 그대와 같은 생각이오. 그아인.. 항상... 마음을 꿰매는 수를 놓지요."


황후는 작게 웃었다.

단풍이 천천히 그녀의 어깨 너머로 떨어지며 스쳤고, 하화의 이름이 다시금 그녀의 입술에 떠올랐다.


그때였다.

잠시 걸음을 멈춘 령황제는 붉게 물든 나뭇잎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을의 빛이 그의 얼굴을 감싸 안았고,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그의 얼굴에는 깊은 상념이 어른거렸다.

마치 어디 먼 곳, 기억의 너머를 떠도는 듯.

서서히 그의 입가에는 설명할 수 없는 미소가 번졌고, 그 표정은 이내 아주 잠깐 동안, 평온한 사람의 얼굴이 되었다.


"그 사람은..."


령황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작은 손에서 만들어지는 것들을 보면, 내 마음이 마치 고요한 호수처럼 평온해지는 것 같소."


말을 마친 뒤에도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의 눈은 여전히 멀고 깊은 어딘가를 바라보는 듯 머물러 있었고, 그 안에는 잔잔한 바람조차 방해하지 못할 온기와 여운이 깃들어 있었다.



서희 황후는 그의 옆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입꼬리에 스며든 미소, 어딘가 모르게 달라진 공기, 한마디 말조차 조심스러워지는 침묵 속에서 황후는 작은 확신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아주 얇은 미소로 답했다.


"그것은 마치... 한 폭의 꿈 같고, 마음 깊은 곳을 어루만져 주는 것 같지요."


황후는 살짝 고개를 돌리며, 빛에 스친 꽃잎을 내려다보았다.


"그 아이가 만든 작품을 보면, 괜스레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저 또한 느낀 적이 있습니다."


그녀의 말은 온화했지만, 어딘가 담담했다.

숨기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의 말투처럼.


반면, 령황제의 표정은 여전히 그 여운 속에 머물러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조금 흔들리더니, 이내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내가 잊고 있던 것들이, 거기서 피어나더이다."


그 말끝에, 황후의 눈빛이 아주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의 미소는 조금 더 깊어졌다.

서로가 말하지 않아도,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 그런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바람이 한 번 더 정원을 스쳤다.

바람결에 단풍잎 하나가 조용히 두 사람 사이로 떨어졌다.


서희 황후는 소매 끝을 조심스레 들어 올려 매만지며 바라보았다.

그곳엔 연분홍빛 비단 위로 바늘끝에 새겨진 매화가 바람 없이 피어 있었다.

그녀는 그 고운 무늬를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매화는, 겨울에도 핀다 하여 설중매라 부르지요. 눈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피어나는 꽃이라...

"처음 그 아이가 매화를 수놓아 준다고 하였을때, 차가운 겨울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막상 받아보니 너무나도 따듯하더이다.”


그리고 이내, 아주 부드럽고 낮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도, 혹 그 아이를 처음 보셨을 때, 겨울이 아닌 봄을 보셨습니까.”


소매 위의 설중매는 그 말과 함께, 마치 침묵 속에서 꽃잎 하나를 흩날리는 듯 조용히 반짝였다.


령황제는 잠시 시선을 피하며, 답을 망설였다.

그러자 서희 황후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는, 다소 장난스러운 듯 조용히 덧붙였다.


"요즘은, 가끔 폐하께서... 말끝이 자주 흐려지시는 것 같기도 하옵니다."


"내가... 그렇습니까?"


"그 아이가 있는 자리에서 말이지요."


순간, 령황제는 숨을 들이쉬었다가 어정쩡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그런 것은 아니오! 나는... 수가... 수가 그저 참 곱고, 정교해서... 그게 다요."


그의 어설픈 변명에 서희 황후는 한참을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눈가를 살짝 접으며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어딘가 짙은 여운이 담긴, 얇고 잔잔한 것이었다.


"폐하."


황후는 이윽고, 곁에 있는 그를 천천히 바라보았고, 가을빛이 그들의 발 그림자 너머로 스며들었다.


"전... 폐하께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왔사옵니다. 소첩이 병약하여... 많은 것을 해드리지 못하였는데도, 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탓하지 않으셨지요."


령황제는 조용히 황후의 손을 감쌌다.

가늘고 차가운 손끝에, 어느새 깊은 세월이 스며 있었다.


"황후. 나는 그대를 탓할 이유를 단 한번도 찾지 못했소. 오히려... 내게 더 많은 것을 주지 않았소."


"그렇지 않사옵니다."


황후는 고개를 젖히며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에는 아련한 회한과 다정한 온기가 함께 실려 있었다.


"그저 정략혼이라는 이름으로 엮여, 폐하께서는 처음부터 몸이 아픈 저를 받아주셨지요. 다른 누구라도 불편함을 느꼈을 자리에, 늘 미소로 맞아주셨습니다."


"나는..."


령황제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작은 숨결 하나까지 삼키듯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황후를 처음 본 날부터 알고 있었소. 황후가 얼마나 단단한 사람인지... 또 얼마나 귀한지..."


황후는 그 말에 눈을 내리고, 손을 살짝 그의 손등에 포갰다.

그 작은 손끝의 떨림이, 오래 감추어온 감정을 말없이 대변했다.


"후궁 한명 들이지 않으시고, 매번 유화전까지 발걸음해 주시고, 때론 함께 정원을 거닐며 계절을 이야기해주셨지요? 그 모든 것들이 저에겐 과분할 만큼의 은혜였사옵니다."


"내가 황후에게 준 건 은혜가 아니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원의 갈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가 창을 넘어 들려왔다.


“나는 그대를 아끼고, 또한 깊이 존경하오. 그대가 내 곁을 지켜주었기에, 내가 마음 편히 백성을 돌볼 수 있었소."


"그리고 그대가 이 나라의 어미가 되었기에 흔들림 없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이오.”


황후는 그의 손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이 깊은 정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아주 미세하게, 눈가에는 수분이 맺혔다가 이내 곧 사라졌다.


"폐하."


황후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제게 남은 시간동안 폐하의 곁에, 지금과 같은 마음으로 남을 수 있도록... 저를 조금만 더 기억해주시겠습니까?"


령황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은 미안함과 존경, 그리고 알 수 없는 짙은 감정으로 가득했다.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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