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아래꽃]스민다는 것

18화. 어쩌면 사랑은, 스며드는 게 맞을지도 몰라

by 주미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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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상수와 하화는 자택 내 작업실인 자광재에서 황복 제작에 매진했다.

붉은 석양이 겹겹이 얹힌 창호 밖으론 가을 끝자락의 바람이 낮게 스며들었고, 실내는 고요하고 따뜻한 등불 아래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상수는 곧은 허리로 앉아, 예복에 쓸 옷감을 조용히 펼쳤다.

부드러운 광택이 흐르는 비단은 아침 햇살을 머금고 반듯이 펼쳐졌고, 그 위로 상수의 손끝이 천천히, 그러나 섬세하게 움직였다.

오랜 세월 단련된 손놀림은 역시나 망설임이 없었다.

자를 고르고, 먹선을 긋고, 숨을 들이쉰 채 바늘 대신 가위를 들어 천 위에 선을 그었다.


'누가 입을 것인지 생각해야한다.'


속으로 되뇌는 말과 함께, 가위날이 천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도록, 선 하나에도 품이 실렸다.


그의 눈빛은 무뎌지지 않은 칼처럼 날이 서 있었고, 손끝은 고요했지만 무게 있었다.

조심스럽게 접어둔 천 조각들을 차례로 정리하며, 상수는 황후를 위한 황복의 기틀을 조용히 준비해 나갔다.


반면 하화는 작은 상 위에 수실을 펼쳐놓고, 여러 번 접어둔 도안을 번갈아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바늘은 손에 쥐어져 있었지만, 실 한 올 꿰지지 못한 채 시간이 한참을 흘렀다.

눈동자에는 오래 묵은 안개처럼 감정이 내려앉아 있었고, 가녀린 어깨는 낮게 움츠러들어 있었다.


그녀는 실을 고르다 말고, 다시 도안을 펼쳤다.

눈빛은 도안 위에 머물러 있었지만, 시선은 자꾸만 멀어졌다.

그녀의 손엔 실 한 올 걸려 있지 않았고, 마음은 오래된 안개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문득 떠오르는 목소리...

그가 어두운 시장 골목에서 자신을 감싸주던 순간.

붉은 노을 아래 함께 걸었던 그날의 정적.

그리고, 조심스럽게 건넸던 단 한마디.


‘괜찮다면... 함께 걸을 수 있겠소?’


그 모든 순간들이 조용히 스며들어, 지금의 그녀를 흔들고 있었다.

마음을 감출 수는 있어도, 손끝엔 담기기 마련이었다.


무엇을 수놓아야 할까. 어디까지 담아도 괜찮을까.

무엇은 선이고, 무엇은 넘침일까.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다.

그가 입을 황복에, 감히 자신의 마음이 묻어나진 않을까 두려웠다.

어디까지를 담아야 하고, 어디서부터는 넘지 말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작은 숨결 하나, 망설이는 손끝 하나에도 그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그는 멀었고, 그녀는 감히 가까워져선 안 되는 자리였다.


하화는 조용히 도안 위로 몸을 숙였다.

가녀린 어깨가 낮게 움츠러들고, 곱게 묶은 머리카락 옆으로 몇 가닥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유난히 피곤해 보였다.


그녀는 속으로 아주 조용히, 그러나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작업의 한숨이 아니라, 마음을 정리하려는 이의 한숨이었다.


작업하던 손을 멈춘 지 한참이 지났건만, 하화는 여전히 도안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엔 흔들림이 고여 있었고, 잡은 실은 여전히 바늘구멍조차 지나지 못하고 손에 매달려 있었다.


그 모습을 한쪽에서 지켜보던 월상수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기척은 거의 없었지만, 하화는 곧 고개를 들고 스승이자 아비인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느냐.”


하화는 입술을 달싹였으나, 말이 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손끝에서 풀린 실을 다시 감으며, 잠시 고개를 숙였다.


“...아버님, 아무것도 아닙니다. 단지... 옷의 태나.. 그에 새겨질 문양도...좀처럼 떠오르지 않아...”


“하화야.”


상수는 그녀의 말을 조용히 끊었다.

오랜 세월 사람을 바라본 자의 눈빛이 그 부름 안에 담겨 있었다.


“네가 바느질할 때 이리 머뭇거리는 손을 본 적이 없구나. 도안이 없어도, 네 손끝은 늘 길을 알았다.”

“지금 네가 고민하는 것은, 문양 때문만은 아니구나.”


그 말에 하화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감추려 한 건 아니었지만, 드러내고 싶지도 않았던 마음이었다.

상수는 그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다, 말없이 다가가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내일은 궁 안 수방에 좀 다녀오너라.”


“수방이요...?”


하화가 고개를 들고 되물었다.


“짧지만 가는 길에 바깥바람도 쐬면 좋지 않겠느냐."

"그리고 수방에 좋은 옷감들이 새로 들어왔단다. 아직 만들어야할것을 정하지 못한 것 같으니 이번에 쓸 좋은 재료가 있는지 직접 살펴보고 오거라."


"아..."


"무엇보다... 마음이 복잡할 때는 손보다 먼저, 눈이 정리를 시작해야 하는 법인 것을 잊지말아야한다.”


하화는 그의 말에 잠시 시선을 떨구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수는 그녀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예복이란, 옷을 짓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짓는 일이니라. 지금 네가 고민하는 그 마음이, 언젠가는 가장 아름다운 실이 되어줄 테니... 조급해하지 말아라.”


그 말에 하화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입가에 아주 작고 조심스러운 미소가 스쳤다.


“예, 아버님...”


방 안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그녀의 가슴속에는 미세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그 바람은 아직 작고 어지러웠지만, 무언가가 움직이려는 조짐이었다.


다음날 아침, 하화는 내관의 안내를 받아 황실 수방으로 향했다.

아침볕이 조용히 내려앉은 길목엔, 궁녀들이 이른 시각부터 분주히 오갔고 수방 앞마당에는 잘 다듬어진 배롱나무 잎들이 은은한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낮은 햇살이 비단 위로 길게 누워 있었고 그 틈 사이로 실과 천이 정갈히 정리된 장대가 쭉 이어져 있었다.

길게 드리운 창문 너머로 얇은 햇빛이 스며들며, 실과 비단을 감싼 먼지마저도 조용히 부유하고 있었다.


하화는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서며, 벽에 가지런히 걸린 비단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장대에 매달린 고운 비단 천을 하나하나 눈으로 따라갔다.

은실이 섞인 옥빛 비단, 낙엽 색을 머금은 담홍빛 비단, 그리고 아직 수를 놓지 않은 여백 가득한 흰 비단까지.

그 모든 천들이 하화의 눈에 조용히 담겼다.


한참을 바라보다, 하화는 손끝으로 실의 감촉을 느끼듯 가볍게 비단을 쓰다듬었다.

그 표정엔 어떤 아련한 집중이 깃들어 있었고, 눈동자는 마치 이야기 없는 서책을 읽듯 고요히 머물렀다.


그때였다.

수방의 바깥, 그 너머

한 사내가 문정전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춘 채, 수방 안쪽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엔, 높은 천장에 길게 드리워진 비단들이 물결처럼 너울거리고 있었다.

햇살은 그 틈을 타 조용히 스며들어, 비단 사이마다 금빛 가루처럼 퍼졌고 그 빛을 등지고 선 한 여인이 천 사이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하화였다.


손끝으로 조심스레 비단의 결을 느끼며, 때로는 발끝을 멈춰 한 겹의 색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기는 모습은 마치 풍경화의 한 장면처럼 고요하고도 아름다웠다.

그녀의 어깨 위로 흩어진 햇살이 투명하게 부서졌고, 그 사이로 가늘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빛에 닿아 은빛으로 빛났다.


“...폐하?”


곁에 서 있던 방내관이 황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더니,

비단 사이에서 움직이는 여인의 실루엣을 보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폐하... 안으로 드시겠습니까? 제가 안에서 불러올까요?”


령황제는 눈을 떼지 않은 채,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 바스락거리지 말고 조용히 좀 서 있으라 했지!”


방내관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속삭이듯 물었다.


“...허면, 말씀이라도 전할까요? 아니면, 그... 혹시.. 취향이 몰래 보시는...”


“하, 참!! 너는 지금 나더러... 여인이나 몰래 훔쳐보는 그런 놈이라는거냐!”


“아닙니다! 그런 뜻은~”


령황제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날카롭게 짧게 말했다.


“눈치가 없는 것이 죄면 이미 너는 몇번이고 죽었다.”


“허면... 소인이 있는 이곳은 지옥인가요..?”


“어휴.. 이놈을.. 그냥...”


방내관은 입을 쭈삣거리다 이내 다물며 바로 자세를 고쳐 세웠고, 령황제는 다시 비단 사이를 바라보았다.

햇살 속을 천천히 걷는 하화의 모습은 더없이 조용하고 아름다웠다.


그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눈빛엔 말 못 할 여러 감정이 교차했고, 입술은 무언가 말하려다 닫은 사람처럼 가만히 멈춰 있었다.

하화의 움직임이 멈췄을 때, 마침내 그녀도 문밖의 시선을 느낀 듯 몸을 돌렸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쳤다.

하화는 놀란 듯 동그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비단 조각이 살짝 떨렸다.


수방 안으로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멈춘 령황제는, 말없이 그 자리에 서서 조용히 미소를 머금었다.

령황제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비단 사이로 고개를 숙인 하화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깐의 정적.


그는 이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부드러운 발소리가 조용한 수방 안을 채우며 다가왔다.

하화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손에 들고 있던 비단을 단단히 쥐었다.

조심스레 숨을 고르려 했지만, 속마음은 점점 더 바짝 긴장된 채였다.


“그 비단이... 마음에 듭니까?”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하화는 깜짝 놀란 듯 몸을 굳혔다.

그녀는 급히 자세를 바로잡고,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했다.


“폐하...? 이곳에 어찌...”


령황제는 비단 사이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자연스럽게 햇살 속에 섰다.

그의 얼굴은 온화했지만, 눈빛엔 짙은 여운이 어린 채였다.


“문정전으로 향하던 길이었소. 그런데 그대가 이곳에 있을 거라곤...”


“...아! 그것이... 아버님께서 다녀오라하셔서..”


하화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지만, 손끝은 여전히 떨려왔다.

그의 기척이 가까워질수록 호흡은 조심스레 얕아졌고, 고개를 숙인 채 비단만 빤히 바라보았다.

령황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작게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그대가 들고있는 그 비단, 내 눈에도 꽤나 곱게 보였습니다.”


하화는 황제의 시선이 아직 자신에게 머물러 있음을 느끼며, 부드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엔 놀람과 조심스러움이 뒤섞여 있었지만, 억지로 웃음을 머금으려 애쓰는 기색이 엿보였다.


“이것이... 빛을 잘 받아서... 잠시 눈길이 머물렀을 뿐이옵니다.”


령황제는 그녀 곁에 멈추어 섰다.

하화와 가까워진 거리, 부드러운 햇살 아래서 그의 눈매는 전에 없이 편안해 보였다.


“햇빛 때문만은 아니었을겁니다. 그대는 무언가를 좋아할 때, 눈으로 먼저 보이는 사람이니까요. 방금, 그 비단을 볼 때처럼"


하화는 그 말에 당황한 듯 시선을 돌렸다.

귀 끝이 붉어졌고, 손에 들고 있던 비단을 조금 더 꼭 쥐었다.


“폐하께선... 너무 세심히 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령황제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습니까. 요즘 들어, 별것 아닌 것들도 자꾸 눈에 들어오고, 생각치 못한 것도 눈에 들어오고.”


그의 말은 너무도 조용히, 너무도 부드럽게 다가와, 단숨에 그녀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시선을 비단에 고정한 채, 억지로 입꼬리를 내렸다.


“폐하, 아직 황복 문양이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혹 이번에 폐하께서 뜻하시는 바가 있으신지요?"


“그대가 담고 싶은 것이 있다면, 내 무엇이든 좋습니다.”


그때 그녀의 옆머리에 얇은 실오라기 하나가, 마치 새의 깃털처럼 가볍게 내려앉았다.


“내가 원하는 마음보다도... 그대가 바라는 마음을 담아주는 것이 더 귀할 테니까.”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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