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가장 조용한 사랑은, 가장 멀리서
걷고 걷다 점점 어두워지는 노을빛은 천천히 담장을 타고 내려와, 두 사람의 어깨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정적 속에서도 바람이 한 번씩 스쳐 지나며, 스산하지 않은 고요를 더했다.
서희 황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바람에 스치는 소리, 나뭇잎이 스러지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이윽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령황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황후의 눈동자는 조용히 떨리고 있었고, 마른 입술이 한참을 맴돌다 조용히 말을 이었다.
“소첩, 감히 여쭐 말씀이 있사옵니다.”
“말씀해보시오.”
그 말에 황후는 아주 짧게, 그러나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곱게 모은 손끝에 조심스레 힘이 들어갔고, 눈길은 바닥의 은행잎 사이로 흘렀다.
“이 말로 폐하의 마음이 상하시지 않기를 바라옵니다. 부디...”
서희 황후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눈빛엔 단정한 망설임과 함께, 깊은 걱정이 묻어 있었다.
“...소첩의 마음이 폐하께 짐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옵니다.
그저... 폐하께서 요즘 더욱 깊은 생각에 잠기시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놓이지 않아 감히 여쭈려 하옵니다.”
그녀는 이내 시선을 거두며, 고요한 정원 너머로 시선을 보냈다.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이 잔잔히 울었고, 그 바람에 머리카락 한 올이 이마에 스쳤다.
“소첩은 알고 있사옵니다. 폐하께서 나라를 이끄시느라 얼마나 많은 짐을 짊어지고 계신지.
허나... 가끔은 그 짐 속에 너무 깊이 스스로를 가두고 계신 것은 아닌지...
그것이, 소첩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옵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소첩은 황후로서 폐하와 나란히 걷고 싶었사오나,
어느 순간부터는... 폐하의 마음이 자주 멀어져 있는 듯하여, 괜스레 제 탓인 것만 같기도 하였사옵니다.”
그 말에 령황제는 문득 시선을 돌렸다.
붉게 물든 하늘과 단풍 아래 그녀의 말은, 마치 떨어지기 직전의 꽃잎처럼 아릿하게 다가왔다.
황후는 문득 손끝을 멈추더니, 천천히 자신의 소매를 다시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그 수를 따라가듯 조용히 흐르다, 잔잔한 목소리가 정원 너머로 흘렀다.
“아까 이 설중매를 보여드렸지요.”
비단 위에 수놓인 매화는 마치 겨울의 새벽녘에 피어난 한 줄기 붉음처럼, 차가운 공기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피어 있었다.
“눈 속에서도 피는 꽃이기에, 피어 있는 동안은 추위를 벗할 수밖에 없지요.”
황후는 소매 위에 놓인 매화를 바라보다가, 잠시 시선을 거두었다.
“저도... 그처럼 오래 버티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병석에 누워 있는 날이 더 많았으니, 폐하께 든든한 힘이 되어드리지 못한 적도 많았지요.”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오랜 시간 스스로를 다독이며 견뎌온 이의 고요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말끝을 따라 흔들린 눈빛이 잠시 떨리다가, 이내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습니다. 제게 허락된 자리가 너무도 커서...
혹여 그 무게가 폐하의 걸음을 붙드는 것은 아닐까, 늘 두려웠습니다.”
바람이 불었다.
정원의 끝자락에서 흩날린 낙엽 한 장이 그녀의 발끝에 머물렀고, 황후는 아무 말 없이 잠시 그 자리에 시선을 떨구었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온화했지만, 그 미소 너머에 스친 오래된 시간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깊이를 품고 있었다.
“폐하께 짐이 되지 않으려, 제가 약점이 되지 않기 위해... 많은 것을 삼켜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송구하게도, 오래 피는 법만을 익히고 말았사옵니다.”
황후는 말끝에 작게 숨을 고르며, 소매 위의 매화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 시선이 다시 령황제에게 닿을 때, 그녀의 입가엔 아주 엷은 미소가 피어 있었다.
“하지만... 저 또한 압니다. 폐하께서 오래도록 품어오신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요.”
그녀는 고요히 령황제를 바라보았다.
눈빛엔 원망도, 질투도 아닌, 그저 다 알아버린 사람의 따뜻하고 씁쓸한 연민이 담겨 있었다.
그 말에 령황제는 말문이 막힌 듯 숨을 고르지 못한 채, 순간 시선을 피했다.
바람 한 줄기가 불어 정원 끝의 단풍이 바스락였고, 그의 옷깃을 스치고 지나간 바람이 얼굴을 식혔다.
하지만 식지 않는 것은 가슴 안 깊은 곳에서 급히 피어오른 당혹이었다.
“황후... 그건...”
그의 목소리는 잠시 망설임을 머금었다.
입술을 다물고 다시 그녀를 바라보려 했지만, 눈빛이 흔들렸다.
마치 들켜서는 안 될 마음 한 조각이, 그 순간 무심히 손에 쥐어져버린 사람처럼.
황제의 눈을 조용히 바라보던 황후는, 그 흔들림마저도 조용히 감싸 안듯 다시금 엷게 미소 지었다.
그 웃음은 허락도 아니었고, 묵인도 아니었다.
그저, 오래도록 그를 지켜본 이만이 지을 수 있는 얼굴이었다.
황후는 한순간 시선을 낮추었다가 다시 들어, 조심스레 물었다.
“폐하, 하화... 그 아이를 마음에 두신 것이 맞으시지요?”
그 말은 곧 허락이 아닌, 이해의 손을 내미는 듯한 따뜻한 청처럼 흘러나왔다.
서희 황후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아주 조용히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잎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가을 햇살 아래 잎 하나가 바닥에 내려앉는 그 짧은 찰나, 그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이내 그는 고개를 천천히 숙이며, 낮은 숨결 속에 말을 꺼냈다.
“황후... 내가... 미안하오. 감추려 한 건 아니었으나... 그대 눈엔, 말보다 먼저 다 읽혔던 모양이오.”
서희 황후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엔 비난도, 상처도 없었다.
그저, 오래도록 곁에서 그를 지켜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깊고 맑은 수용이 담겨 있었다.
“폐하께서 미안해하실 일은 아니옵니다. 소첩은... 폐하의 마음을 모르지 않사옵니다.
그 마음 또한, 외롭고 지친 어느 밤의 안식처였을 테지요.”
그녀는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황제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가만히 얹었다.
차가운 듯 따뜻한 손길이었다.
“소첩에게 있어 가장 큰 기쁨은, 폐하께서 평안하신 것이옵니다.”
황제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 손끝 너머로 오래된 정과 슬픔, 그리고 묵묵한 사랑이 흐르듯 전해졌다.
그 속에는 용서도, 질투도 아닌 깊은 이해와 다정한 작별의 기색이 있었다.
“황후는... 늘 이 나라의 중심이었소. 그리고 내 마음의 기둥이기도 하오.
그 사실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변치 않을 것이오.”
황후는 아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소첩 또한 그 마음을 안고 살아가겠습니다. 그리고... 하화가 참 고운 아이라는 것을 곁에서 지켜본 제가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러기에 소첩도 그 아이를 많이 아낀다는 것을 기억해주세요.”
그녀는 잔잔히 웃었다.
그 웃음은 누구보다 먼저 황제를 이해하고, 누구보다 늦게까지 그를 지켜보는 이의 것이었다.
그 미소엔 수많은 말들이 담겨 있었지만, 결국 단 하나의 마음만이 남았다.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으며 그 마음으로 황제를 놓아줄 준비도 하고 있다는, 평온한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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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제국 황실은 다가올 연회 준비로 유난히 분주했다.
가을의 끝자락, 궁궐 곳곳에는 붉게 물든 단풍과 노란 국화가 어우러져 계절의 정취를 더했고,
연회가 열릴 대전은 아침부터 분주한 궁인들의 발걸음으로 활기를 띠고 있었다.
궁녀들은 자수를 놓을 비단을 나르고, 내시들은 의례에 필요한 물품들을 점검하며 숨 돌릴 틈 없이 움직였다.
곳곳에서 부드러운 향이 피워오르고, 정원에는 특별히 고른 꽃들이 심어져 연회의 격을 더하고자 하였다.
그날 아침, 서희 황후는 유화전의 창 너머로 안개 걷히는 궁 안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내관에게 이르렀다.
“상수 대감과 하화를 들라 전하시게. 폐하께서도 이리 오신다고 기별하셨으니.”
환한 아침빛이 유화전 안으로 스며들고, 길게 드리운 발걸음 아래로 연회의 시작이 조용히, 그러나 엄숙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른 아침. 유화전에는 맑은 향이 은은히 감돌고 있었고, 문 앞에는 이미 침선장 월상수와 하화가 정중한 태도로 서 있었다.
궁녀가 문을 열고 안으로 안내하자, 두 사람은 고개를 깊이 숙이며 천천히 황후전 안으로 들어섰다.
“폐하, 황후 마마. 침선장 월상수와 월가 하화가 들었습니다.”
령황제는 창가에 서 있다가 조용히 고개를 돌렸고, 서희 황후는 그들을 보며 따뜻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오랜만입니다, 상수 대감.”
상수는 품을 단정히 가다듬고 곧은 자세로 절을 올렸다.
“황후 마마, 폐하. 이처럼 불러주심에 감읍하옵니다. 두 분의 평안하심을 뵈니 이 노심도 안심이 되는 바입니다.”
하화 역시 정중히 예를 올리며 한걸음 뒤에 섰다.
“폐하, 황후 마마.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령황제는 조용히 미소를 머금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상수, 자네와 그대의 딸을 이리 부른 것은 다른 것이 아니오. 곧 다가올 연회를 위해 황복을 새로이 마련하고자 하는데... 그대들의 손에 맡기고 싶소.”
서희 황후도 조용히 말을 보탰다.
“이번 연회는 여러 나라 사절단이 함께할 예정이라 들었습니다. 내외부를 막론하고 시선이 집중될 것이니, 우리도 그만큼 품위 있고 아름다워야겠지요.”
령황제가 이어서 말했다.
“황후의 말씀대로요. 자네들과 같은 장인들이 아니고서야, 우리가 입을 옷을 감히 누구에게 맡기겠소.”
하화는 순간 고개를 들고 두 사람의 얼굴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짧은 숨을 삼킨 뒤, 곧 낮고 또렷한 목소리로 답했다.
“폐하, 황후 마마. 소녀에게 그리 큰 임무를 맡겨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버님과 함께, 소녀의 모든 것을 다하여 준비하겠나이다.”
서희 황후는 살며시 미소를 머금으며, 하화를 향해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황복은 상수대감이 맡아주시고... 폐하의 황복은 너가 맡아주면 어떻겠니?”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곁에 서 있던 상수와 령황제의 얼굴이 거의 동시에 굳어졌다.
“황후, 그건 너무...”
“황후마마, 그건...”
령황제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고, 상수 또한 황후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한마디 하려는 찰나,
서희 황후가 조용히 웃으며 손을 들어 두 사람의 말을 막았다.
“염려 마세요. 내 눈에 띈 솜씨이니, 그리하는 것이 옳다고 여긴것입니다. 그리고 믿고 있습니다.”
그녀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단호했고, 그 안엔 하화에 대한 깊은 신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하화는 순간 숨을 멈춘 듯 굳어 있다가, 곧 두 손을 모으고 황후를 향해 다시 고개를 깊이 숙였다.
“황후마마의 그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소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폐하의 황복을 짓겠습니다.”
령황제는 잠시 말없이 하화를 바라보다, 이내 눈을 피하며 입꼬리를 가만히 들어올렸다.
그의 눈빛엔 여전히 낯선 감정이 맴돌았지만, 서희 황후의 신중한 배려 앞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황복도 잘 부탁드립니다. 대감.”
상수는 말없이 고개를 깊이 숙였고, 하화는 두 손을 모은 채 다시 한 번 조심스레 절을 올렸다.
“소녀, 그 신뢰에 누가 되지 않도록... 성심껏 바늘을 들어내리다.”
정갈한 침묵이 잠시 흐른 후, 서희 황후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좋아요. 연회의 주제는 ‘화평’이니, 그 의미를 담을 수 있는...”
하화와 상수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고, 황궁의 긴 아침은 조용히 다음 장으로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