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아래꽃]하화, 이름을 다시 얻다

5화. 낡은 그림자를 걷고, 새로운 빛으로 피어나다

by 주미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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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하루하루를 보냈고, 어느 날 밤 하화는 갑작스러운 낯선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평소처럼 지친 몸을 누인 채 잠들어 있던 그녀는, 희미하게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눈을 떴다.

밖으로 나가보니 마당 끝자락, 희미한 달빛 아래 한 사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더니, 곧장 하화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저와 함께 가시면 됩니다."


무엇인가 다른 사내..

그 말투는 분명 존댓말이었고, 그의 눈빛에는 급박함보다 예의가 서려 있었다.

하화는 멈칫한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네...? 저요...?"


"저는 인수라고 합니다. 제 아버님께서 당신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그 말 한마디에 하화의 가슴 어딘가에 조용히 파문이 일었다.


'나를...?'


그는 덧붙였다.


"아버님의 일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하화는 눈을 깜빡이며 인수를 바라보았다.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그 말은 묘하게 따뜻했다.


"어떤 종류의 도움인가요?"


"저희 아버님을 뵈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저를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언뜻 보면 단순한 호출이었지만, 하화는 알 수 없는 기운을 느꼈다.

마치 칠흑 같은 일상 속으로 한 줄기 빛이 내려온 듯한 기분이었다.

하화는 찰나 고민했지만, 이 낯선 기회를 외면할 수 없었다.

어디든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희미한 희망이, 그녀를 붙들었다.


"좋아요. 함께 갈게요."


그렇게 하화는 인수와 함께 그의 아버지라는 사람을 만나러 떠났다.

이게 단지 또 다른 노동일지, 아니면 운명을 바꾸는 문턱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다시 한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하화는 인수의 뒤를 따라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인수는 묵묵히 앞장서 작은 마을의 중심부로 향했고, 하화는 걱정과 설렘이 뒤섞인 채 그 뒤를 따랐다.

길가에는 아직 피지 않은 매화 봉오리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고, 산뜻한 냄새와 함께 봄이 성큼 다가오고 있음을 알렸다.


하지만 하화의 마음은 주변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낄 수 없었다.

낯선 곳, 낯선 사람, 그리고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는 운명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드디어 도착한 곳은 고요하고 단정한 기운이 흐르는 기와집이었다. 단아하면서도 위엄이 느껴졌고, 마치 시간의 흐름과는 동떨어져 존재하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집 앞에는 높고 묵직한 대문이 위풍당당하게 자리하고 있었고, 정교하게 조각된 문양이 새겨진 문틀 위에는 두 개의 등롱이 나란히 매달려 있었다.

등롱에서는 은은한 불빛이 퍼지고 있었으며, 그 위에는 ‘침선장 月上洙’라는 글씨가 정갈한 붓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침선장... 월상수...’


하화는 숨을 멈추고 조용히 속삭였다.


“뭐? 침선장...?”


인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제 아버지는 이 나라 침선장이십니다.”


“진짜... 진짜 그 황제폐하의 옷을 짓는 침선장 말이에요?”


“네. 그 침선장 맞습니다.”


놀람도 잠시, 대문이 조용히 열리는 소리에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섰다.

문틈 사이로 들어선 공간은 더없이 정갈하고 조용한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작은 연못 위에는 돌다리가 아치형으로 놓여 있었고, 연못 위를 떠도는 연꽃 잎과 잔잔한 물결이 바람을 타고 속삭이는 듯했다.


다리를 건너니 나무 바닥이 깔린 넓은 마당이 나왔고, 그 끝에는 작은 정자와 의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정원은 마치 자연과 인간의 손길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듯한 풍경이었고, 그 속을 걷는 하화의 마음은 점점 긴장과 호기심으로 가득 차올랐다.


집 자체는 고풍스럽고 넓은 기와집이었다.

기와지붕 아래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목재 기둥과 문틀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었고, 흰 벽과 나무색이 조화를 이루는 외벽이 이곳이 단순한 가정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문 앞의 작은 돌길은 마치 예로부터 이 집을 드나들던 이들의 발자국을 기억하고 있는 듯 고요했다.

대문을 지나 대청에 들어서자, 그 안은 더욱 정갈하고 따뜻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넓은 마루와 고운 빛깔의 다다미가 깔린 방, 곳곳에 놓인 천과 바느질 도구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 모든 공간이 단지 바느질만을 위한 곳이라기엔, 마치 한 예술가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성소처럼 느껴졌다.


인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곳입니다. 저희 집은 대대로 침선장을 배출한 집안이지요. 아버지께서는 그 솜씨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으셨고, 할아버님의 뒤를 이어 지금은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그의 말 속에는 자부심과 경외가 함께 담겨 있었다.

하화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 공간의 분위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던 하화는, 이곳이 지금까지 자신이 머물렀던 어느 곳과도 다르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차분하면서도 단단한 기운, 그리고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정성과 예술의 기운이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을 조용히 두드리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이곳에서 어떤 새로운 인연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리고 그녀의 운명이 어디로 향하게 될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길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고 싶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하화의 눈앞에 펼쳐진 건 정갈하게 정리된 천과 자수틀, 그리고 묵묵히 바늘을 움직이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가 바로 인수의 아버지, 침선장 월상수였다.


“아버님, 소자 인수 들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 여인을 데려왔습니다.”


상수는 바느질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에는 예상과 달리 날카로움보다도 따뜻한 온기가 먼저 스며 있었다.


“그래, 들어오너라.”


하화는 예를 갖추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월하화라고 합니다. 저를 불러주신 연유는 알지 못하오나, 침선장 나리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서 오너라, 오는 길은 힘들지 않았느냐?”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 대답 속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노비로서의 고된 노동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안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례가 안 된다면, 높으신 침선장 나리께서 미천한 소녀를 부르신 까닭을 알고 싶습니다. 듣기로는... 제 도움이 필요하다 하셨다 들었습니다.”


“허허, 맞지. 내 너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월상수는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천을 옆에 내려놓았다.


“그 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다. 혹, 바느질을 배운 적이 있느냐?”


하화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과거의 이야기를 사실대로 말할 수도, 완전히 감출 수도 없었다.


“송구하오나, 제가 어렸을 적 기억을 잃은지라 부모의 기억도 없으며, 정확히는 배워서 바느질을 하는 것인지, 그저 손이 가는 대로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이전에도 이런 식으로만 설명해왔다.

21세기의 기억을 믿으려 하지 않던 사람들, 그리고 그녀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시선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쉽게 진실을 꺼낼 수는 없었다.


“음... 그렇구나. 그럼 지금 이 천에 자수를 하나 놓아보겠느냐?”


월상수가 작은 천을 건넸고, 하화는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지금 말씀이십니까?”


“그래, 지금. 무엇이든 좋다. 네가 가장 좋아하거나, 잘할 수 있는 것으로.”


하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인수가 어느새 조용히 다가와 바늘과 색색의 실들을 건네주었다.

하화는 천을 손에 들고 조심스럽게 숨을 골랐다.

그리고 그녀의 손끝에서, 고민끝에 서낭당에서 보았던 그 은빛 벚나무의 꽃잎이 수놓아지기 시작했다.


월상수는 말없이 그녀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손은 숙련된 이의 그것처럼 망설임이 없었고, 눈빛에는 오히려 편안함이 감돌았다.

잠시 후, 작은 수가 완성되었을 때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손이 참 빠르구나. 이 수는 꽃이더냐?”


“벚꽃입니다.”


“벚꽃? 처음보는 어여쁜 꽃이로구나.”


“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꽃입니다. 그 아름다움에 늘 매료되곤 했지만, 동시에 가장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꽃이기도 합니다.”


상수는 자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많은 의미가 담긴 것이로구나.”


그는 깊은 숨을 들이쉬며 다시 말했다.


“이름이 월하화라고 했느냐?”


“네, 그러하옵니다.”


“혹 본인의 이름이 어떤 뜻을 담고있는지 아느냐."


“송구하오나, 이름만을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상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노비인 아이가... 정상적인 이름이라... 심상치않구나...'


“그렇다면 내가 너의 이름에 뜻을 담아주마. 음.. 그렇지!! 달 월(月)자에 아래 하(下).. 그리고 꽃 화(花)가 좋겠구나! 달 아래 피어난 꽃, ‘월하화’.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존재가 되라는 뜻으로.”


하화는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름을… 저에게…?”


“그렇단다. 네가 지금껏 어디에서 왔고, 어떤 삶을 살아왔든, 앞으로는 네 이름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아가면 되지 않겠느냐.”


하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감정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때, 상수는 문득 한 기억을 떠올렸다.


며칠 전, 임대감 댁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대감님, 침선장님께서 오셨습니다.”


“어유! 제가 가져다드린다고 하였는데, 어찌 여기까지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예상치 못한 방문을 받은 것처럼 임대감은 신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버선발로 상수를 맞이하러 대청에서 뛰듯이 달려 나왔다.


“아닐세, 아닐세~ 내가 어찌 자네에게 받기만 하겠는가. 자네가 말한 그 대단한 옷은 어디 있는가? 내 자네가 너무 기대감을 심어주어서인지 잠도 안 오지 뭔가, 허허~ 그래서 내가 이리 받으러 왔다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 하지 않는가? 허허허!”


“어휴! 대감님도 참, 얼른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곧 당도한다고 기별 받았습니다. 어서어서!! 이리로 들어오십시오!!"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얼마 전 저희 집에 한 노비 계집이 왔었는데, 그 아이 솜씨가 실로 엄청나지뭡니까~!! 크~~~ 보는 눈이 없는 제 눈에도 너무 아름다운 수다! 이런 느낌이었지요~ 제 말주변으로는 더이상 설명할 재간이 없어, 제가 대감께 감히 수를 선물로 드리고 싶다고 청한 것이니, 안으로 드셔서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그렇다. 바로 그때 임대감이 얘기한 그 노비 계집이 바로 하화였다.

어느 날 임대감은 바느질을 곧잘한다는 노비아이를 하나 받아 일을 시켰는데, 그때 그 솜씨가 실로 놀랍다는 것을 알고, 침선장인 월상수에게 그 아이가 만든 것을 선물하고자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그렇게 여러 인연이 겹치고 겹쳐 지금 이 자리에 마주 앉게 된 하화를 바라보며, 상수는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가, 네가 놓은 수를 보니 단순한 솜씨만이 아니구나. 거기엔 마음이 담겨 있었고, 이야기가 스며 있어.”


하화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상수의 목소리는 꾸짖음도, 시험도 아닌 따뜻한 울림이었다.


“그 재능을 그냥 흘려보낼 순 없지. 그래서 말인데… 혹시 너만 괜찮다면, 나의 딸이 되어주지 않겠느냐?”


그 말에 하화의 숨이 멎는 듯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딸이라니? 양녀말인가?

이 세상에서 노비 취급받던 자신이?

당황한 그녀를 보며 인수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기는 아가씨께서 있으셨던 그런 우락부락한 사람들도 없고, 괴롭히는 이도 없습니다. 지금은 아버지와 저, 그리고 집안일을 돕는 몇 분뿐입니다. 아버지께서 직접 원하시는 바이니, 이 집안 모두가 아가씨를 환영할 것입니다.”


그제야 하화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해가 지나가면서도 몇 번이고 꾹 눌러 참아온 감정이 터진 듯,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흐느꼈다.


그 눈물을 본 상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괜찮다, 아가. 울고 싶을 땐 울어도 돼. 지금 네가 흘리는 눈물은 새로운 시작의 문을 여는 눈물이니 말이다.”


하화는 눈물을 닦으며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 눈에는 아직 눈물이 고여 있었지만, 그 속엔 분명 반짝이는 무언가가 피어나고 있었다.


“정말… 저를 딸로 삼으신단 말씀이십니까…? 저 같은 사람을…”


“그럼. 넌 이제부터 더 이상 누구의 그림자도 아니야. 내 딸이자, 이 집안의 이름을 함께 나누는 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거다.”


상수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우리 둘 다, ‘월’이라는 성을 가졌잖느냐. 운명이 이끌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테지. 나에게도 이리 어여쁜 딸이 생기고말이다~"


그 말에 하화는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가슴이 벅차올랐고, 이 모든 상황이 믿기지 않을 만큼 꿈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다짐했다.


이제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시 어둠 속에 갇히지 않겠다고.

이 손끝으로, 이 마음으로,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 나가겠다고.

눈물에 젖은 얼굴로, 하화는 상수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대감님… 아니, 어르신. 아니… 아버지… 앞으로 열심히 배우고, 꼭 보답하겠습니다.”


그 순간, 따스한 햇살이 창을 통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녀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빛은 마치 새로운 삶을 축복하는 듯했다.

그녀는 이제 다시 피어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달 아래 피어난 꽃처럼.

‘월하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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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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